목록글연성/DC (25)
A.Y.A.D.
안녕, 이라는 한마디였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그러했다. 뉴욕의 뒷골목에서 제이슨이 감히 레드후드의 주머니를 털려고 하던 간큰 강도 둘을 반쯤 죽여 놓았을 때, 피터가 제이슨에게 처음 건넨 인사였다. 데일리 뷰글의 1면을 언제나 장식하는 유명인사이자 모두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인사에 대한 제이슨의 반응은 이러했다. "미쳤냐?" 거미줄에 거꾸로 매달린 스파이더맨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이런 걸 보고도 안녕은 무슨 빌어먹을 안녕이야. 아, 미리 말해두겠지만 이건 정당방위였으니까 엄한 시비 털지 말고 그냥 너는 너 갈길 가라, 응?" 그러면서 바닥에 널부러진 강도들의 몸을 발로 툭 쳤다. "너구나, 그 고담의 레드후드가." 빨갛고 하얀 큰 눈의 마스크에서 나온 목소리는 의외로 낭랑했다. 스파이더맨..
팀슨의 소재 멘트는 '우리 잠깐만 이러고 있자..', 키워드는 서투름이야. 애석한 느낌으로 연성해 연성 소년의 목소리는 앳되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낮고 어두웠다. 그 나이대의 어린 아이가 가질 법한 낭랑한 목소리였는데도 그런 느낌이 드는 것에 팀은 의아해했다. 소년은 조금 거친 구석은 있었지만 활발했고 웃기도 잘 웃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팀은 어딘가 귓가를 스산하게 스치는 슬픔 같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데미안은 그런 팀의 의문을 간단하게 일축했다. 그냥 네가 이상한 거야.그리고 그 꼬마도 이상하고. 데미안의 말에 팀은 하,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대꾸했다. 그러시겠죠. 밤마다 자기 아버지와 함께 쫄쫄이 코스튬을 입고 빌런들을 구타하러 다니는 누군가의 가족이 이상한 건 당연한 거겠죠. 팀의 말에 데미..
뎀슨의 소재 멘트는 '잠깐 쉬는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키워드는 파란새벽. 평범한 느낌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천천히 어두운 하늘을 물들였다. 새벽의 공기는 옅푸르게 젖어있었다. 데미안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미 쓰러진 강도의 머리를 발로 툭, 쳐서 제대로 기절했는지 확인했다. 강도는 미동조차 없었다. 데미안은 몸을 돌렸다. 그는 그리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토드.-여어.제이슨 토드는 마치 찡그리듯이 웃으면서 데미안 웨인에게 인사했다. 고담의 밤은 어둠 속에서 시끄럽게 반짝였다. 그러나 고담의 새벽은, 고요하고 가라앉아있었다. 밤새도록 일어나는 소동과 요란함마저도 새벽이 되면 모두 지쳐 쓰러져 잠들었다. 주위를 가득 메운 침묵 속에서, 데미안은 빌딩 위에 주저앉은 채 제이슨에게..
딕슨딕의 소재 멘트는 '날 믿어줄래?', 키워드는 손톱자국. 미묘한 느낌으로 봄이었다. 제이슨은 몽롱해지는 의식의 한 구석에서도, 따스한 밤공기에서 봄의 냄새를 맡으며 안도했다.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 점점이 피어나는 새순과 향기를 흩뿌리는 꽃송이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콘크리트의 도시에도, 봄은 찾아온다는 사실에 제이슨은 안도했다. 그러니, 이런 건 아무래도 괜찮을 것이다. 아픔에 저도 모르게 간헐적으로 헐떡이는 숨결도, 붉게 물든 옆구리와, 마찬가지로 붉게 물든 손도. 힘없이 시멘트 바닥 위로 늘어진 두 다리도. 죽음은 이미 그에게 한번 키스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는 멍한 머리로, 자신이 예전에 한번 죽었을 때, 마지막을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떠올렸다. 그토록 강렬한 순간이었는데..
1. 정사의 끝은, 마치 길고 긴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몽롱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제이슨은 그 여운을 담배연기에 실어서 흘려보냈다. 흑백 톤의 공기 속으로, 새하얀 연기가 실처럼 엉켜 흩어진다. 나른하고, 몽롱하고, 질척거렸다. 제이슨은 정액과 젤로 범벅이 된 시트를 보며 혀를 찼다. 딕은 제멋대로 사정해버리고는, 그대로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 잠들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 심지어 이 자식은 오늘은 콘돔조차 쓰지 않았다. 제이슨은 분명 지금 움직이면 주륵, 하고 흘러내릴 하얀 액체를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거기다 내일은 배앓이도 한참 하겠지. 제이슨은 모든 게 지긋지긋해져서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며,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딕을 욕할 수 없었다. 자신도 거부하지 않았으니까. 사실은..
진단메이커 - '모두가 거짓말을 해', 키워드는 낯설음, 조용한 느낌 -반가워.나직한 목소리가, 새하얀 숨결과 함께 흘러나왔다. 차가운 날이었다. 옷이 미처 보호해주지 못한 맨살은 꼭 얼음에 문지르는 것 같은 감각에 마비되기 직전이었다. 추위에 창백하게 질린 피부 위로 코끝과 볼만이 꼭 물감을 뿌린 듯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망토도 없는, 얇은 코스튬 하나로 버티기엔 퍽이나 무리인 날씨였다. 제이슨은 그런 딕을 보며, 굳이 추워보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 뒹굴었던 날들 중에는 눈이 종아리까지 쌓인 날도 있었다. 그날도 그가 입은 옷은 오늘과 똑같았다. 그러니 제이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다 그 역시, 외투랍시고 걸친 건 낡은 가죽자켓 하나가 전부였으니까. 제이슨은 말없이 들고 있던..
-눈이다.데미안이 중얼거렸다.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낮게 숨죽인 목소리에는 작은 경탄이 묻어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것에 대한 신기함, 한없이 아름답고 연약한 것에게 드는 조심스러움이 녹아난 목소리였다. 그의 동그란 파란 눈동자는 허공 위를 떠다니는 작은 눈조각을 바쁘게 쫓아다녔다. 그러고보니 데미안은 사막에서 왔었지. 딕은 새삼스레 데미안의 고향을 상기했다. 뜨겁고 메마른 모래바람이 부는 곳에서 차갑고 축축한 눈이라는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딕은 처음으로 눈을 맞이하는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뒤에 서 있었다. 매끄럽고 단단한 유리창에 데미안은 얼굴을 붙이다시피 가까이 댔다. 어두운 진회색 하늘 아래로, 새하얀 눈송이들이 마치 춤을 추듯 너울거렸다. 데미안이 중얼..
너는 하얗게 웃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둥글게 휘어지는 눈매에는 다정함을 담고 있었다. 너는 나를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야. 너의 목소리는 반가움에 약간 들뜬 어조였다. 너의 걸음걸이는 망설임이라곤 없었고 이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목을 껴안는 너의 행동에 나는 조금 당황해버렸더랬다. 못본 사이에 이렇게 키가 컸네? 금새 날 따라잡겠는걸?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너의 손이, 목에 와닿던 너의 체온이 사실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간질거려서 견딜수가 없었다고 말한다면, 너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나는 애써 너의 몸을 떨어트리려고 했지만 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의 몸은 아직 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가늘었기에, 너는 나의 거부하는 몸짓도 그저 장난처럼 여기고 껴안았다. 너의 체온은 따뜻하고 뜨거워서..
데미안 웨인은 싫어하는 것이 많았다. 그가 싫어하는 것을 목록으로 적는다면 a4용지가 5장은 넘게 필요할거라고 알프레드는 장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아무리 잘게 잘라서 요리에 섞어놔도 귀신처럼 골라내는 완두콩이라든가, 원래 있던 물건을 쓰고 난뒤 제자리에 돌려놓는 행위라든가, 아니 그전에 물건을 원래의 형체가 유지되도록 쓰는 행위라든가. 그 수많은 싫어하는 것 중에 최근에 자선파티가 포함되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데미안을 지켜본 알프레드로서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알프레드는 자선파티에 가기 싫다면서 불퉁하게 내뱉는 데미안의 말에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데미안 도련님?-몸이 안 좋아요.-오늘 아침 훈련하신다고 한대당 1억짜리 대련용 로봇을 세대나 부수신 분이 ..
#연성 키워드 - 나를 안아줄래? 이미지는 깨진 유리컵. 부드러운 느낌. 푸른 밤이었다. 요 며칠 내내 살을 에일 듯 불던 삭풍도 멎어든, 고요하고 서늘한 밤이었다. 샛노란 달무리가 골목 위로 쏟아졌다. 고담의 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한 날이었다. 제이슨은 자신이 고담을 떠난 사이 모든 고담의 빌런들이 개과천선이라도 했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건 커다란 소동 이후 찾아오는 짧고 급박한 침묵일지도 몰랐다. 고담을 떠나있었어도, 언제나 그의 고향의 소식은 건너건너 그를 찾아오고는 했기에 그 역시 최근에 이 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였기에 이렇게 돌아온 것이고. 고담 역시, 그의 고향답게, 마찬가지로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