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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제이슨]라자냐와 꽃과 검댕, 그리고 어느 날의 약속 본문

글연성/DC

[피터제이슨]라자냐와 꽃과 검댕, 그리고 어느 날의 약속

DayaCat 2015. 12. 13. 23:51

 

안녕, 이라는 한마디였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그러했다. 뉴욕의 뒷골목에서 제이슨이 감히 레드후드의 주머니를 털려고 하던 간큰 강도 둘을 반쯤 죽여 놓았을 때, 피터가 제이슨에게 처음 건넨 인사였다. 데일리 뷰글의 1면을 언제나 장식하는 유명인사이자 모두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인사에 대한 제이슨의 반응은 이러했다. "미쳤냐?" 거미줄에 거꾸로 매달린 스파이더맨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이런 걸 보고도 안녕은 무슨 빌어먹을 안녕이야. 아, 미리 말해두겠지만 이건 정당방위였으니까 엄한 시비 털지 말고 그냥 너는 너 갈길 가라, 응?" 그러면서 바닥에 널부러진 강도들의 몸을 발로 툭 쳤다. "너구나, 그 고담의 레드후드가." 빨갛고 하얀 큰 눈의 마스크에서 나온 목소리는 의외로 낭랑했다. 스파이더맨은 몸을 크게 한 바퀴 돌리면서 바닥에 사뿐하게 착지했다. 춤을 추는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이 한걸음, 두걸음. 순식간에 빨간 마스크와 빨간 헬멧이 마주보았다. "너, 되게 재밌다." 정말로 즐거워 죽겠다는 것 같은 목소리. 새빨간 마스크의 희고 큰 눈이 가늘게 휘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것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몇번의 마주침과, 맞잡은 손의 열기 혹은 기댄 몸의 무게, 그 모든 것의 시작.

 

 

피터는 최근에 얼굴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심지어 오늘도 쓰레기같은 사진을 가져왔다며 고성을 지르는 J.조나 제이슨의 앞에서도 피터는 웃는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나의 사무실에서 나오자 로비 로버트슨이 그에게 귓속말했다. "피터, 비결이 뭐야?" 피터는 쯧쯧, 하고 혀를 차며 손가락을 그의 앞에서 흔들었다. "기업비밀이에요, 로비. 힌트를 주자면 역시 사랑, 일까요?" 그렇게 말하는 피터의 얼굴은 시종일관 차오르는 웃음에 여전히 못견디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로비는 웃으면서 고래를 절레절레 젓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애인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정도로 열렬할지는 몰랐네. 사이 좋나봐?" "그럼요. 한달 전에 저희 집으로 이사왔거든요. 로비, 생각해봐요. 이것보다 더 완벽할 수 있겠어요? 집에 가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날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거!!" 피터는 팔을 쫙 펴면서 노래부르듯이 외쳤다. 조금만 있으면 싱잉 더 레인을 부르며 책상 위로 뛰어오르겠는걸. 로비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래, 한참 좋을때지. 그래도 너무 흥분해서 가장 중요한 걸 잊어버리면 안돼." 로비의 말에 피터의 눈이 동그래졌다. "중요한 거요?" "그래, 예를 들어... 상대방도 너만큼 행복한지 같은 거. 의외로 같이 살면서 잊어버리기 쉬운 거야." 피터의 얼굴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그 순간 로비는 아차,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늙은이들의 좋지 않은 버릇이지. 틈만 나면 설교를 하려고 든다는 것. 로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튼 같이 산다니 잘됐구나, 축하한다. 피터." 로비가 마무리하듯 다정하게 건넨 말에 피터가 네, 하고 대답하며 웃었다. 아까처럼, 하얗게 차오르는 미소는 아니었다.

 

 

 

침실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연한 색의 어둠 속으로 제이슨은 중얼거렸다. "그냥 문으로 들어오지 그래?" 창문턱에 반쯤 몸을 걸치던 피터가 움찔했다. 곧 그는 팔짝 뛰어오르듯이 방 안으로 들어와 제이슨에게 달려갔다. 제이슨은 여전히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채였다. 피터는 제이슨의 등을 껴안으며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미안해." 다정한 목소리가 숨결과 함께 어깨를 간지럽혔다. 제이슨은 피터의 몸에 묻어있는 도시의 매연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코스튬을 채 벗지않아 여전히 빨갛고 까만 줄무늬가 있는 장갑을 낀 손이 보였다.

 

"저녁 같이 먹자고 했었는데, 미안해.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 오다가 강도를 당하는 할머니를 봤거든."

"그래."

"그러고나니까 또 어떤 애가 차에 치일 뻔 해서 구해준 다음 집에 데려다줬고."

"그래."

"그래서 진짜 집에 가려는데 이번엔 보석가게에 도둑이 들어서 알람이 울리지 뭐야. 어쩔 수가 없었어. 막 범인이 도망쳐 나오려고 했단 말야."

"그래'"

"그래서 늦은거야. 진짜로."

 

색을 지우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빛의 손이 제이슨의 맨손 위로 겹쳐졌다. 한 겹의 천 너머로 깍지낀 손의 체온이 전해졌다. 조근조근 속삭이는 목소리, 함께 포개진 맥박의 리듬. "화난 거 아니지....?" 피터의 목소리가 제이슨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벽 위로 도시의 불빛이 흔들리는 커튼을 따라 물결치며 비쳤다. 밤의 침묵과 함께 흘러들어오는 서늘한 바람, 그리고 어둠. "화난 거 아니야." 한 템포 늦은 대답. 피터는 제이슨의 가슴을 좀더 끌어안으며 등에 머리를 댔다. 제이슨의 등은 넓고 단단해 기대기 좋았다. "정말로?" 피터의 말에 제이슨이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네가 어떤 놈인지 몰라서 같이 살자고 한 거 아니야. 그냥, 내가 궁금한 건...." 목소리와 목소리의 공백. 피터는 다시 한번 제이슨을 한껏 끌어안았다. "...이게 도대체 몇번째냐는 거지. 네가 정말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긴 한 건지, 그걸 모르겠다고." 또다시, 한숨. 제이슨은 입을 다물었다. 피터의 손이 제이슨의 손가락을 한참동안 만지작거렸다. "정말로, 노력했는데...." 반쯤은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 제이슨은 말없이 피터의 손을 잡아서 뗐다. "그럼 증거를 보여주던가. 난 그럼 이제 잔다." 제이슨은 돌아누운 그대로 이불을 끌어올렸다. 밤은 깊었고 도시는 이제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피터는 하아, 하고 들리지 않을 낮은 한숨을 쉬었다.

 

 

도시의 하늘을 찢는 사이렌 소리에 피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설마?! 피터는 머릿속으로 필사적으로 빌었지만 설마가 진짜였다. 어두운 도시의 빌딩 사이로 사이렌 소리와 연기가 함께 하늘로 치솟는 게 보였다. 화재였다. 피터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일이 미안해 일부러 막 싱싱한 수선화를 골라 포장해서 받았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일이 터지다니. 아무리 파커 럭이라지만 해도해도 너무하잖아. 피터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이미 발은 달려가고 있었다.

화재는 꽤 컸다. 5층 건물의 창문이 모두 불꽃의 한가지 색깔로 일렁이고 있었다. 둘러싼 소방차가 물대포를 쏘고 있었지만 금방 진화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건물 밖에서 간신히 대피한 사람들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향해 울부짖었다. 우리 아기가..! 내 아내가 아직 있어요!!! 뻔하지만, 아니 뻔하기에 더욱더 절박한 목소리. 피터는 더이상 잴것없이 바로 코스튬으로 갈아입었다. 여전히 한손에 들려있던 꽃다발은 옷과 함께 백팩에 집어넣었다. 피터는 그대로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제이슨은 식어버린 요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오늘은 꼭, 이라고 말하면서 아침에 배시시 웃던 피터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은 꼭, 꼭 같이 저녁먹자는 약속지킬게. 진짜야, 약속. 그러면서 짐짓 새끼손가락을 내미길래 제이슨은 매몰차게 고개를 돌리면서 무시했었다. 네가 무슨 어린애냐, 라는 퉁명스러운 면박과 함께. 그럼에도 기대해버리는 것이 사람 마음이런가, 결국에는 이렇게 실망하고 마는 것이다. 제이슨은 라자냐가 담긴 접시를 싱크대 위로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기대해버린 사람이 잘못이다. 제이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주 오랫동안 그는 기대하지 않는 법을, 실망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열망을 흘려보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와 함께 잠드는 평범한 삶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닐거라고. 아주 꼴좋은 착각이었다. 제이슨은 싱크대를 양손으로 붙잡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맘놓고 미워할 수 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이해와 서운함은 언제나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제이슨을 화나게 만들었다. 제이슨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미안, 제이슨. 늦었지?"

 

제이슨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터가 거실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다. "진짜로 노력했는데, 오늘은 하필이면 화재가 터졌지 뭐야. 너도 알지? 거기, 뉴턴 에버뉴 근처에, 차이나 타운 들어가는 골목 쪽... 여튼 그래서 늦어버렸어. 또 변명하는 것 같지만, 진짜로 그랬어. 미안해." 새까만 검댕이 묻은 얼굴로 피터는 하얗게 웃었다. 군데군데 탄 붉은 코스튬이 대충 걸친 후드집업 안으로 보였다. 창문에서 거실로 들어오는 피터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비틀거리면서 한쪽 발을 끌듯이 걸으며 그는 식탁으로 다가왔다. "너, 다쳤냐?" 제이슨의 질문에 피터가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아, 별 거 아냐. 한참 불 속에 있었는데 하필 그때 가스탱크가 터지더라고. 뭐 그래도 운좋게 잘 피해서 좀 데인 정도로 끝났어." 후드 집업 사이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피터의 맨살갗이 보였다. 제이슨은 혀를 차며 구급상자를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아냐, 이런건 금방 나아. 너도 잘 알잖아, 나 튼튼한 거." 그렇게 말하면서 피터는 다시 한번 제이슨을 향해 웃어보였다. "아니, 그래도..." "잠깐만 기다려봐, 제이슨." 어이가 없어서 대꾸하는 제이슨을 피터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는 등 뒤에 메고 있던 새까맣게 탄 백팩을 뒤적거렸다.

 

"여기, 다 타버렸지만 한 송이는 남았네. 이거라도 받아줄래?"

 

꺾여서 고개숙인 줄기와 반쯤 탄 노란색 이파리. 꽃이라기보다는 '꽃이었던 것'으로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작은 수선화 한 송이. 피터는 그 꽃을 들고 웃고 있었다. 꽃이파리보다도 더 노랗게 차오르는 웃음.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도 조금도 변하질 않을, 소년같은 미소. "제이슨, 나 오늘 진짜 노력했다? 진짜 너한테 이거 꽃다발로 예쁘게 주면서 사과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제이슨. 이 도시에선 항상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서 도망칠 수가 없었어.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약속할게." 피터의 갈색 눈동자가 제이슨의 푸른 눈동자를 향했다. 또렷하게 마주보는 눈길과 확신에 찬 목소리.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너에게 돌아온다고."

제이슨은 피터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연상임에도 어려보이는 얼굴 뒤에는 숱한 좌절과 상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각자의 슬픔을 짊어지고 걸어온 경로는 달랐지만 결국엔 이렇게 마주치고, 결국엔 함께 걷기로 했다는 것. 다른 곳을 보더라도 결국엔 돌아온다는 것. 저 갈색 눈동자에서, 대답을 기다리며 꼭 다문 입매에서, 그 모든 것을 약속하고 있는데. "....이러면 화를 낼 수가 없잖아." 제이슨이 중얼거렸다. "치사한 자식 같으니. 그냥 닥치고 기어들어왔으면 얼굴이라도 한대 후려쳐줬을텐데." 제이슨이 투덜거리면서 피터가 내민 꽃을 낚아챘다. 피터의 얼굴에 순간 환한 빛이 들었다. "앉아있어, 치료해줄테니까." "응, 응. 얌전히 기다릴게!" 어린애처럼 들떠서 대답하는 피터를 보고는 제이슨은 하, 하고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구급상자가 있을 방 안으로 걸어가면서 제이슨은 반쯤 불탄 수선화를 들어올렸다. 불타버렸어도 여전히 수선화의 이파리는 선명하고 밝은 노란색이었다.



티스토리 방문자 10,000명 이벤트로 받은 무료 커미션 글입니다. 웰치님의 리퀘였어요. 디씨의 제이슨 토드와 마블의 피터 파커의 크로스오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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