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글연성/DC (25)
A.Y.A.D.
아, 이런. 더러워졌잖아. 남자의 목소리는 무심하고 심드렁했다. 마치 지나가다 바짓단에 먼지가 묻은 걸 내려다볼때처럼, 이내 잊혀지고 말 약간의 짜증만을 담은 어조였다. 한없이 하찮은 일이라는 듯한 그 말투가, 제이슨에게는 마치 경멸과 혐오를 던지는 것처럼 들렸다. 제이슨은 입술을 다시 한번 깨물었다. 맞아서 찢어진 입술에서는 비린 피맛이 났다. 제이슨은 양 팔을 구속 당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강제로 앉혀져 있었다. 두 팔은 쇠사슬로 칭칭 감긴 채 벌려져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곧 험악한 사내들이 그의 명치를 가격하고는 그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사이에 강제로 무릎을 꿇고 앉게 만들었던 것이다. 남자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홀..
그는 항상 웃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더군다나 오늘은 더욱 더 환하게 웃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이유로 제이슨은 여기 오는 것을 무척이나 망설였다. 스스로도 얼마나 고민했는지 횟수를 세기도 어려우리만치, 그냥 한없이 머리가 아플만큼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와버렸다. 일단 빚지고는 살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가 자신의 생일 때 필요없다는 데도 강제로 덥석 안겨준 선물의 답례는 해야했다. 제이슨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차가워지는 가을 바람을 맞으며 길 위를 서성였다. 버석이는 호주머니 속, 손 끝에 매끄러운 리본의 감촉이 걸렸다. 고담의 늦가을은 가을보다는 겨울에 가까웠고, 그래서 아직 11월인데도 제이슨의 코끝은 금방 빨개졌다. 겨우 삼십분 정도만 서있었을 뿐인데. 제이슨은 마찬가지로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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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하늘은 유달리 높고 맑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본래는 어둡고 거무죽죽한 색깔인 고층건물마저 하얗게 햇빛을 반사했고, 공기에 뒤섞인 매연마저도 상쾌한 바람에 어느새 날아가버렸다. 고담에서는 보기 드문 깨끗하고 청명한 날씨에 너도나도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로 공원은 붐볐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무 사이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잔디 위에 앉아 있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연인들이 나란히 앉아 가볍게 키스하고, 새파란 하늘 위로 아이들의 빨간 풍선이 떠오른다. 제이슨은 벤치에 앉아 멍하니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제이슨의 생활리듬은 야행성이었고, 그러니 이런 오전 시간대에 나와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아침..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정기 주주 총회는 성공리에 끝났다. 오랜만에 그룹의 최대주주인 데미안 웨인과 회장인 팀 웨인까지 참석한 회의인지라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간 회의기도 했다. 복잡하고 긴 회의가 끝나면 그들은 오늘을 위해 빌린 최고급 레스토랑에 안내되어 간단한 오찬을 즐길 예정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회의가 끝나고 마침내 오찬이 시작되었다. 붉고 싱싱한 장미와 하얀 안개꽃이라는 고전적인 조합으로 꾸며진 테이블 세팅이 돋보였다. 중앙에는 데미안 웨인이, 바로 그 옆자리에는 팀 웨인이 앉았다. 이윽고 모든 이들의 착석이 끝나고 데미안은 간단하게 건배를 제의했다. 그최고급 샴페인의 공기방울이 그가 들어올린 잔 속에서 노랗게 퐁퐁 터지고 있었다. 사람들도 함께 잔을 올리며 건배를 외쳤다. 그 와중에서 팀은..
데미안은 제이슨을 처음 봤던 그 순간을 기억했다. 그는 그날 따라 무척이나 기분이 나빴다. 물론 아침에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절인 청어가 식사로 나왔으며, 게임기를 켜보니 팀이 자기 기록을 추월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학교 숙제가 산더미같이 쌓이는 바람에 오늘은 브루스와 팀만이 패트롤을 돌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런 짜증이 불합리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짜증을 더 돋구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 앞에 선 이 꾀죄죄하고 빼빼 마른, 그런 주제에 사람을 쏘아보는 이 꼬맹이는 도대체 뭐냐고. 데미안은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아버지, 브루스를 노려보았다. 브루스는 꼬맹이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며 그의 이름을 소개했다. -이 아이는 제이슨 토드. 오늘부터 우..
누가 무엇을 먼저 시작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무엇이 이렇게 망가지기 시작했는지도 조금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딕 그레이슨에게는. 언제부턴가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뒤틀린 관계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뿐이다.제이슨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 위로 홍조가 떠올랐다. 딕은 제이슨의 목에서 손을 뗐다. 붉은 손자국이 그의 목에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제이슨은 쿨럭거리며 한참동안 기침을 했다. 딕은 느긋하게 그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제이슨의 눈가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그는 딕을 노려보았다. 딕은 그 눈빛을 웃음으로 받아냈다. -새로운 놀이인데, 어때?-꺼져, 딕 그레이슨.제이슨..
ㅇㄷ혼놀판에서 풀던 거 완결하고 가져옴. happily never after 라는 노래를 브금으로 깔고 싶었으나 저작권 의심 어쩌고 저쩌고가 떠서 걍 포기. 진단메이커 돌렸더니 악연/진수성찬/장난 이라는 키워드가 나와서 쓰기 시작했는데 어째선지 마구마구 길어진데다 쓰다보니 키워드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진 것이다..ㅋㅋ 비가 내렸다. 어둡고 타락한 도시 위로 내리는 비는 거무죽죽한 빛깔을 띄었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는 음산한 빌딩 사이를 꿈틀거리며 기어다녔다.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색깔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를 딕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보아왔던 것처럼 익숙했다. 몇 년만에 돌아왔는데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도시를, 딕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은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새로운 시장의 후원파티를 왜 하필 지금 하는지, 그리고 왜 자신이 끼어있어야만 하는지 제이슨 토드는 조금도 납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고담의 밤거리는 근래들어 그가 봐온 이래 가장 조용한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덕분에 시장의 지지도는 조금 더 치솟았고 시장이 이참에 다음번 선거를 준비하자고 마음먹었는데 브루스가 마침 후원해주기로 했다는 짜증나고 복잡한 인과관계는 제이슨 토드가 알바가 전혀 아니었다. 그보다는 밤거리가 조용해진 탓에 할일이 없어 몸이 둔해졌고 그 탓에 자신을 초대하러 온 딕 그레이슨의 얼굴에 펀치를 제대로 날리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 온 것이라는 추론을 더 선호했다. 제이슨은 결국 얼굴에 짜증을 잔뜩 담은 채 브루스가 연설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발코니로 도망치듯 나갔다.선선한..
문은 소리없이 열렸다. 어두운 방안에는 탁자 위의 주황빛 작은 등만이 엷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발그스름한 빛 아래에서 보이는 딕의 얼굴은 한층 더 붉었다. 자그맣게 콜록이는 기침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데미안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소리에 딕은 얼굴을 들었다가 데미안을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딕은 침대 위에서 무릎을 세워 앉은 채 이불을 끌어안고 있었다. 동그랗게 구부러진 등은 유달리 작은 느낌이었다. 딕은 다시 한번 약한 기침을 내뱉고는 가늘게 쉰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왜 온거야? -뭐긴 뭐야, 네 기침 소리가 복도까지 다 들리니까 그렇지. 데미안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딕의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딕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크고 두꺼운 데미안의 손은 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