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글연성/조각글 (11)
A.Y.A.D.
#봄피터에게서 따스한 냄새가 났다. 맷은 몸 위로 훅 끼쳐오는 온기에 고개를 들었다. 이제 왔어? 피터가 웃으면서 맷의 목에 팔을 둘렀다. 피터의 몸은 햇빛의 온도만큼 따끈따끈했다. 오늘은 밖에 오래 있었나 보네. 맷은 피터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으며 속삭였다. 햇빛에 오랫동안 구워진 머리카락은 매끄럽고 폭신폭신했다. 피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요, 오늘은 하루 종일 밖에 있었어요. 센트럴 파크를 계속 돌아다녔거든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실내에 있고 싶지가 않았어요. 속살거리는 피터의 목소리마다 더운 숨결이 맷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러게, 온갖 냄새가 나. 맷은 여전히 피터에게 머리를 묻은 채 중얼거렸다. 오후의 햇살을 반사하는 잔디의 냄새, 아직 꽃봉오리인데도 진한 향을 뿌리는 금목서..
단어 : 영원 문장 : 눈이 내리는 밤에 너를 생각해. 분위기 : 위태롭게 외줄타기 하듯 밤은 길었다. 지평선 위로 어둠과 함께 눈이 내렸다. 맷은 아주 오랫동안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흰 눈송이 위로 침묵이 덧씌워지며 천천히 침몰하는 소리를, 맷은 들었다. 밤은 길었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눈이 오면 돌아오겠노라고 해놓고선,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늦었다. 사람들은 그가 자기 장례식에도 늦게 나타날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니까, 맷은 기다릴 수 있었다. 밤은 길다. 맷은 기다릴 수 있다. 영원처럼 이어지는 밤과,그 속에서 홀로 걸어올 너를. 자꾸 다리가 눈에 잠겼다. 걸음을 뗄 때마다 푹푹, 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발 밑의 눈이..
피터는 언제나 토니의 곁으로 되돌아오고는 했다. 그것은 떠남의 개념을 몸에 익혀 늘 바람 냄새를 묻히고 다니는 철새의 움직임과도 비슷했다. 토니는 익숙한 바람이 불때쯤이면 생각하곤 했다. 피터를 이제 볼 수 있겠구나, 라고. 피터가 언제나 되돌아온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언제나 떠난다는 것이기도 했다. 토니는 피터가 못 견뎌하는 것이 자신의 끝없는 바람기인지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술버릇인지, 아니면 나이라곤 먹지 않는 성격 때문인 것인지 궁금해했다. 어쩌면, 그 셋 모두일지도. 피터가 떠날 때는 언제나 비슷했다. 나지막한 한숨을 바람에 흘리며 피터는 그 길고 투명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갈색 눈동자 위로 마찬가지로 갈색인 눈썹이 가볍게 떨리다가, 피터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안녕, 토니. 언젠가 또 다음에..
바람이 계속, 계속 불었다. 갈대밭 한가운데서 플래시는 눈썹을 한껏 찡그리며 걸어갔다. 갈대를 짓이기는 군화의 감촉은 오늘따라 딱딱하고 무거웠다. 헬멧의 끈이 턱에 단단히 고정되지 못하고 자꾸 바람따라 피부에 부딪쳤으나, 그의 두 손은 이미 무거운 장총을 들고있었으므로, 헬멧을 고쳐쓸 여유는 없었다. 사막에도 강이 있어 그 옆으로 갈대가 잔뜩 자랐다. 노란 지평선 위로 강과 네모낳고 조그만 사람의 집, 갈대밭말곤 없었다. 그의 상관은 이 주위를 순찰해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본래 이곳은 공터나 마찬가지였던 듯, 사람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거기다 이미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다. 그것은 플래시의 나라가 사막의 도시와 마을에 폭탄을 쏟아붓고 난 뒤의 일이었다. 플래시는 계속해서 걸었다. 허..
맨처음 그의 노래를 들었던 것은 어두운 저택 안, 열려진 방문 틈 사이로였다. 혼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앳된 소년의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설었다. 딕은 슬그머니 열려진 문 틈새로 머리를 내밀었다. 제이슨이 교과서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숙제라도 있는 걸까, 오래된 동요를 부르는 제이슨의 목소리는 맑고 청량했다. 평소 거칠었던 그의 언행을 생각해보면 놀라우리만치 단정하고 깔끔해서 딕은 놀라면서도, 어쩐지 제이슨이 새삼 귀여워보여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었다. 그리고 제이슨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문에 머리를 기대고 제이슨의 노래를 한참동안 듣고는 했다. 그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은 항상 좋았다. 낮은, 그러면서도 의외로 소년의 ..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여느때처럼 에스페란자는 누구인지 확인한 다음 마이런은 현재 부재중이니 할 말은 여기 남기라는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에스페란자는 방문자의 얼굴을 본 순간 전혀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대신 에스페란자는 입술에 미소를 살짝 올리며 인사했다. 마이런은 여기 없어요, 윈. 의례적인 말이라고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윈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알고 있어. 그리고 여기에 15분 뒤에 도착할 것이라는 것도 알지. 윈의 말에 에스페란자는 못 당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겠죠, 당신이야 마이런에 대한 건 뭐든 다 알고 있으니. 윈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
내 첫사랑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너희들 무슨 여자애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냐? 아, 그래. 뭐 나야 여자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누구보다 많은 사람이지. 내 첫 여자친구는 금발 치어리더였어. 알잖아? 태닝한 피부에, 자연산 금발, 웃으면 보조개가 들어가는 얼굴. 가슴도 컸지. 잘 아네, 그게 사실 포인트지.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미식 축구부의 주전 쿼터백이었으니까. 사실은 이렇다 할 이유가 있어서 사귄 건 아니야. 그냥 치어리더와 미식축구 선수는 사귀는 게 당연한 거잖아. 너희들도 고등학교 나와봐서 알겠지만 그건 그 나이대 애들한텐 해가 지면 밤이 온다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한 거라고. 그리고 나는 우리학교 치어리더 중에서 제일 예쁜 애랑 사귄 거고. 그런데 여자를 사귄다는 건 확실히 귀찮더라고. 섹..
낡은 도시 위로 비가 내렸다. 내리는 소리는 요란했으나 빗줄기는 약했다. 깨진 금 사이로 잡초가 삐죽 튀어나온 보도블럭 위로 빗방울이 동그란 무늬를 그리며 떨어졌다. 제이슨은 곧 고개를 들어 흐린 하늘을 쳐다보았다. 검은 우산이 하늘을 반이나 가리는 것이 어쩐지 성가셔, 제이슨은 들고 있던 우산을 그대로 접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올려다 본 하늘은, 지독하게도 탁한 빛깔이었다. 비는 더 약해지지도 더 세지지도 않은 채 끈질기게 내렸다. 제이슨은 먹먹한 공기 속으로 푸른 눈동자를 고정했다. 그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의 약속이었다. 그 색깔이 바래다 못해 바스라져버릴만큼, 오래 전의, 스쳐지나가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엷은 안개 사이로 누군가의 형체가 보였다. 제이슨은 눈썹..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버키는 당연하다는 듯이 입대했다. 밤이 되면 올빼미가 울고 날이 밝아오면 참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그 역시도 그저 전쟁이 일어났으니 입대한다는 듯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스티브는, 친애하는 그의 친구는 언제나 당당했고 꼿꼿했기에, 그가 이뤄낼 수 있는 수많은 일들 중에 나라를 지키는 것 또한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버키가 군복을 입고 그에게로 돌아왔을 때, 스티브는 맞춘 것처럼 군복이 잘 어울리는 자신의 친구를 보며 미소를 지었더랬다. 오랜만에 들린 그들의 단골 바는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먼지 낀 냄새가 맴돌았다. 하지만 위스키를 한잔에 1달러에 파는 곳은 여기뿐이었다. 낡은 전축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재즈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스티브는 버키와 가볍게 잔을..
제이슨의 생일을 알았을 때 딕의 첫 소감은 왠지 그럴 것 같았다, 라는 거였다. 8월 16일, 여름의 한가운데에 던져진 작은 갓난아기가 커서 제이슨이 되는 것을 딕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폭력적이기까지한 여름의 따가운 햇살과 제이슨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딕은 제이슨의 짧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감싸쥐며 얼굴을 묻었다. 바싹 마른 햇볕의 냄새가 났다. 제이슨은 여름에 태어난 아이답지 않게 여름을 땀 난다며 싫어했지만-아마도 그 헬멧 때문이겠지-딕은 여름의 제이슨을 사랑했다. 사실은 모든 계절의 제이슨을 사랑했다. 그러니, 축하해주고 싶었다. 네가 태어난 것을. 그러기에 내가 행복하니까. -생일 축하해, 제이슨. -뭐야. 제이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딕을 바라보았다. 쑥스럽다면 쑥스럽다고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