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Y.A.D.

[딕슨]밤의 끝 본문

글연성/DC

[딕슨]밤의 끝

DayaCat 2014. 1. 29. 13:07

1.

정사의 끝은, 마치 길고 긴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몽롱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제이슨은 그 여운을 담배연기에 실어서 흘려보냈다. 흑백 톤의 공기 속으로, 새하얀 연기가 실처럼 엉켜 흩어진다. 나른하고, 몽롱하고, 질척거렸다. 제이슨은 정액과 젤로 범벅이 된 시트를 보며 혀를 찼다. 딕은 제멋대로 사정해버리고는, 그대로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 잠들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 심지어 이 자식은 오늘은 콘돔조차 쓰지 않았다. 제이슨은 분명 지금 움직이면 주륵, 하고 흘러내릴 하얀 액체를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거기다 내일은 배앓이도 한참 하겠지. 제이슨은 모든 게 지긋지긋해져서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며,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딕을 욕할 수 없었다. 자신도 거부하지 않았으니까. 사실은,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딕은 잘 알고 있다.

그는 언제나 느닷없이 찾아왔다. 격한 싸움이 있고 난 뒤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짜증이 난 기분을 풀기 위해서기도 했고, 여자에게 차여서기도 했다. 제이슨은 사실 이유를 그다지 묻지 않았다. 딕이 찾아와서 키스를 하면, 그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익숙해진 수순에 따라 몸을 섞었다. 언제나 찾아오는 것은 딕이었다. 제이슨은 단 한번도 딕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기다렸고 받아들였다. 이유는 제이슨도 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깼어?

제이슨의 말에 딕은 반쯤 감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아, 역시 마피아들하고 한바탕 하고 난 직후에 섹스하는 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 너무 피곤해지네. 제이슨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그렇겠지. 딕은 여전히 베개에 반쯤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브루스한테 보고했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해.

-이미 늦었어.

딕은 그러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가끔은 나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일 때가 있다니까. 제이슨은 말없이 딕을 바라보았다. 딕은 제이슨을 마주보며 웃었다. 그래도, 너하고 있었다고 그러면 브루스도 혼내지는 않을거야. 제이슨이 툭, 내던지듯 되물었다. 왜? 왜냐니, 우리 동생하고 있던 거잖아. 제이슨은 딕의 얼굴을 한참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딕은 말없이 웃어보였다. 딕은 손을 뻗어 제이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래 전 자신보다 훨씬 작던 동생에게 하던 그대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면서. 

-걱정 마, 브루스한테는 절대 말 안해. 난 네 형이잖아.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오래전의 언젠가처럼, 작은 실수를 저지르고는 브루스한테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던 작은 동생을 대하듯이, 여전히 다정하고 자상한 목소리. 하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제이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가족끼리는 섹스하지 않는다고, 대꾸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면, 그는 사실 걱정하지 않는다고. 사실 브루스가 알았으면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수많은 말을 할 수 있었겠지만, 제이슨은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잃게 될 것이 무엇인지 제이슨은 잘 알고 있었다.


2.

관계의 시작이 정확하게 언제쯤이었다고 정의내리는 것은 딕에게도, 제이슨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시작점을 굳이 찾아낸다면, 제이슨이 홀로 잠들려 건투하던 어느 밤이었다. 불조차 제대로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에서, 제이슨은 침대에 누운 채 오지 않는 잠을 찾아 천장을 더듬었다. 그는 이런 밤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모가 죽은 후 다 무너져가는 집에서 낡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 억지로 잠을 청하던 순간을 기억나게 만들었다. 침잠하는 어둠 가운데 과거의 기억 속에서 익사하기 직전, 누군가가 제이슨의 문을 두드렸다.

쾅쾅, 배려라고는 없는 노크 소리였다. 늦은 밤에 듣기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제이슨은 그 소리에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었을 때 보인 것은, 자신의 의붓형이었다. 딕은 제이슨을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지었다. 좋은 밤이지, 제이. 제이슨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용건은? 딕은 대답대신 손에 들린 맥주를 들어올렸다. 제이슨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들어와.

딕은 마치 자기 집인양 냉큼 소파에 앉아서는 TV 리모콘을 들었다. 딕은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더니 실망한듯 중얼거렸다. 에이, 이게 뭐야. 케이블 채널은 하나도 안 나오잖아. 제이슨은 딕이 가져온 과자봉지를 뜯으며 대꾸했다. 난 TV같은 거 안봐. 이것도 원래 여기 붙어있던 거라서 놔둔거야. 하지만 딕은 실망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다른 것을 발견하고는 신난다는 듯이 외쳤다.

아, 그래도 비디오 플레이어는 있네! 잘됐다, 내가 혹시나 해서 비디오를 빌려왔거든.

블루레이 DVD가 나오는 요즘 세상에 비디오라니. 제이슨은 기가 찼지만 가만히 딕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먼지가 잔뜩 쌓인 비디오 플레이어를 한참동안 버튼을 누르고 두드리고 별짓을 다 하더니 마침내 딕은 비디오를 플레이어 속으로 밀어넣었다.

딸깍. 재생버튼을 누르자 푸른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나타났다. 그러고보니 제이슨은 지금 딕이 무슨 영화를 가져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거, 제목이 뭐야? 딕은 어느새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조차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 뭐야, 그거 되게 옛날 영화잖아. 그래도 고전이라고. 그래, 그래. 제이슨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았으니, 재미없는 영화 좀 본다고 안될 거 없겠지. 제이슨은 그리 생각하며 맥주를 홀짝였다.


영화는 완벽했다. 엔딩으로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하모니에 제이슨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해피엔딩이네. 발단-위기-전개-절정-해소라는 표준적인 서사 구조에 딱 맞아 떨어지게 잘 만든 영화였다. 약간 유치한 감이 있긴 해도, 보고 나니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인정해야 했다. 제이슨은 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제이슨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딕은 영화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심각하고 지친 얼굴이었다. 단 한번도 그에게서 볼 것이라 기대한 적이 없었던 표정에 제이슨은 할말을 잊어버렸다. 곧 제이슨의 시선을 느낀 딕이 제이슨에게 싱긋 마주 웃었다. 좀전의 그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딕의 얼굴에, 제이슨은 잠시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싶었다.

-너...

-왜, 제이슨?

-아니, 네가 빌려온 영화잖아. 재미없었어?

딕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냐. 그럼? 제이슨의 되물음에 딕은 검은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냥, 조금 피곤해서.

다시 한번, 그의 눈에서 아까의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고된 일에 지치고 힘들어서 모든 것을 다 놔버리고 싶어진, 늙은이의 표정. 제이슨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딕을 쳐다보았다. 딕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잠깐, 그냥 피곤한 것 뿐이야. 별일 아니야. 그것은 제이슨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딕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제이슨은 침묵했다. 곧 딕은 손을 내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럼에도 그 미소에는 여전히 어딘가 지친 흔적이 묻어났다. 마치 달의 뒷면을 본것처럼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딕은 곧 손을 뻗어 또다른 맥주캔을 따면서 물었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돼?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동생밖에 없다니까. 딕은 친근하게 제이슨의 어깨를 끌어안고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제는 시간을 세는 것이 무의미해질만큼 오래 전 그때, 형이 동생에게 했던 그대로, 부드럽고 따뜻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 형은 결코 몰랐을 것이다. 동생은 그럴 때마다 붉어진 얼굴과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감춰야만 했다는 걸.

제이슨은 침대를 딕에게 양보했다. 딕은 자기는 소파에서 자도 된다고 말했지만 제이슨은 잔말말고 그냥 침대에서 자라고 대꾸했고 결국 딕은 멋쩍게 웃으며 침대의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렸다. 제이슨은 맥주캔과 과자 부스러기로 엉망인 거실을 잠깐 노려보다가,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좀전의 소란은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듯, 순식간에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어둠이 내려앉았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희미한 숨소리와, 시계의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전부였다. 맥주를 몇캔을 마셨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순간 제이슨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했지만 졸음기라고는 없이 또렷한 목소리였다. 제이슨, 자? 딕의 목소리에 제이슨은 몸을 일으켰다. 아니, 아직. 그럼... 여기 침대에 올래? 제이슨은 일어나 딕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딕이 누운채 제이슨을 보고 생긋 웃어보였다. 침대가 너무 넓어서 그런데 같이 잘래? 제이슨의 침대는 1인용이었다. 제이슨은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짧게 한숨을 쉬고는 딕의 옆에 누웠을 따름이었다.

1인용 싱글베드는 성인 남자 둘이 함께 눕기에는 비좁았기에 제이슨은 몸을 불편하게 뒤척였다. 딕은 몸을 제이슨 방향으로 하고 누운 채 제이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아도 돼? 딕의 말에 제이슨은 가만히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한 바다색의 눈동자가 제이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딕은 천천히 손을 뻗어 제이슨을 안았다. 맞닿은 피부 사이로 퍼지는 온기가, 전해지는 심장고동이 간질간질해서 제이슨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딕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수 없는, 투명한 눈동자로 그는 제이슨을 응시하다가 키스했다.

그날 그들은 처음으로 몸을 섞었다. 딕은 제이슨의 입술 말고도 다른 몇 군데에 키스했고 제이슨은 딕의 등에 손톱자국을 남겼다. 끝나자마자 제이슨은 질척하게 젖은 뒤를 처리하지도 않은 채 담배를 피러 일어섰다. 곧 주르륵 다리를 타고 흐르는 하얀 액체를 보며 딕은 낮게 웃었다. 제이슨, 일단 닦기는 하지 그래. 카페트에 다 떨어져. 상관없어. 어차피 버릴 거니까. 제이슨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꺼내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딕은 그렇다면야, 하고 어깨를 으쓱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맞다, 오늘 콘돔 안 썼으니까 너 분명 내일 배탈나겠다.

제이슨이 눈썹을 찌푸리고 딕에게 고개를 돌렸다.

-뭔 소리야.

-말 그대로야. 콘돔없이 했잖아. 정액 안 빼내면 너 내일 배 아플걸.

-....왜 미리 말 안했어?

-깜박하고.

-죽여버린다.

제이슨은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딕은 그것마저 유쾌한 농담인양 낄낄거렸다. 마치 평소의 그처럼, 즐겁고 상쾌한 웃음소리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곧 일상의 이름에 편입되어 흐릿한 기억의 어느 순간에 묻혔다. 마치 처음부터 모든 것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당연하게.


3.

딕이 찾아오지 않은지 세 달이 지났다. 그가 이토록 오랫동안 방문하지 않은 것은 그와 제이슨이 관계를 맺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일부러 피하지 않더라도 몇가지 소문이야 언제나 흘러흘러 들려오기 마련이건만, 이번엔 그런 것조차 없었다. 나쁜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으니, 안 좋은 일이 생긴 것도 아니겠지. 제이슨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이 관계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걸지도 몰랐다. 상관없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가족놀이든, 애인놀이든, 하나만 하는 게 맞았다. 둘 다 될 수는 없었다. 제이슨은 그렇게 생각하며 딕이 두고간 시계를 탁자에서 들어올렸다. 손대지 않아 먼지가 보얗게 쌓인 유리 밑으로 초침이 째깍, 째깍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이제, 버려야 할 때였다. 그 모든 시간들이 없었던 것처럼.


4.

최근에 한 카르텔이 신종 마약을 거래한다는 소문이 슬럼가에 뒤숭숭하게 돌았다. 최근에 급부상한 세력이라고 했다. 새로이 자리를 잡아야 하는 입장답게 공격적으로 제 구역을 넓혀가는 모양이었다. 레드후드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었다. 어차피 그들도 고담의 뒷골목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고 자경단과 마주치는 것은 그들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레드후드라는 것도, 마약장사를 하게 된 이상 예상했을 거라고. 제이슨은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며, 화기를 챙겼다. 오랜만에 몸을 풀 때였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총성이 요란하게 울렸다. 탕탕탕탕!! 고막을 찢어버릴 것처럼 시끄럽게 울리는 총성 속으로 제이슨은 뛰어들었다. 빗발치는 총알이야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가볍게 한손을 들어 총을 쏘아 자꾸 자기 발을 노리는 짜증나는 놈의 머리를 쏴버렸다. 어차피 이 놈들은 송사리들이니 이렇게 하나하나 응대하는 건 시간낭비였다. 제이슨은 창고 안에 가득 쌓인 컨테이너 위로 훌쩍 올라섰다. 제이슨은 유틸리티 벨트에서 수류탄을 꺼내 이로 안전핀을 풀었다. 제이슨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놈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제서야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어. 제이슨은 씨익 웃으면서 수류탄을 던지고는 컨테이너용 도르래를 낚아채 매달렸다.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부풀어 오른 연기 속으로, 흩어진 시체들이 보였다. 깨끗하게 처리되었군. 제이슨은 휘파람을 불며 도르래의 로프에서 뛰어내렸다. 여기는 그저 창고일 뿐, 조직의 사무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조무래기들이 이렇게 당했으니, 알아서 머리들이 튀어나올 것이다. 제이슨은 그저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제이슨은 양팔을 쭉 펴며,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창고로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뛰어들어왔다. 고급 양복을 입은 게 간부쯤으로 보이는 놈들도 여럿 보였다. 제이슨은 씨익 웃었다. 모였으니, 처리만 하면 된다. 제이슨은 도르래에 매달려서 천장을 가볍게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들의 위로 뛰어내렸다.

깜짝 놀라 총을 난사하는 녀석들을 제이슨은 가볍게 쓸어버렸다. 운동감도 안되는 놈들. 이에는 이, 총알에는 총알이라는 격언을 몸소 실천하며 제이슨은 그들의 이마와 가슴팍에 멋진 탄흔을 남겨주었다. 한 놈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뒤를 노리는 놈을 주먹으로 코를 깨준 다음 총을 쏘아대는 놈의 팔을 나이프로 그었다. 거칠 것이라고는 없는 동작 속에서, 사내들은 나동그라졌고 우왕좌왕하며 도망갔다. 그때, 제이슨은 누군가가 제 팔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놀라기도 전에 그대로 제이슨의 몸이 공중으로 부웅 떠올랐다가 내쳐졌다. 간신히 낙법으로 땅에 착지하긴 했지만, 제이슨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이 체술은 익숙한 것이었다. 제이슨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이름을, 스스로도 부인하면서도 내뱉었다.

-...딕?

하지만 제이슨이 그의 얼굴을 채 들여다보기도 전에 누군가가 제이슨의 배에 주먹을 날렸다. 큭... 의외의 일격에 제이슨은 잠시 휘청거렸지만 곧 자신의 배를 때린 사람의 이마를 주먹으로 짓이겼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바로 앞에 지긋지긋하리만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딕.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딕은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검은 정장에 놈들 사이에 섞여있는 폼이 아무리 봐도 한패거리인 것 같았다. 제이슨은 순식간에 무슨 일인건지 알아차렸다. 제이슨은 잇사이로 욕을 내뱉었다.

-젠장, 어쩐지 안보이더라니...

딕은 다시 한번 난처하게 웃었다. 그 역시 계획이 틀어져서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제이슨과 딕은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딕, 넌 어쩔거야? -어쩌긴, 계획은 망했으니 정면돌파뿐이지. 딕과 제이슨은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5.

의도하지 않았던 팀업이었지만, 덕분에 일은 어쨌든 그럭저럭 해결되었다. 하지만 딕은 마피아 두목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그 순간에도 짧게 불평을 내뱉었다. 아, 그래도 내가 이놈들 잡으려고 몇달을 잠복해 있었는데. 제이슨은 담배를 꺼내물면서 대꾸했다. 어쨌든 너도 결론적으로는 이러려고 했던 것 아냐? 딕은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모양이었다. 내가 성격에도 안 맞는 마피아 짓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물론 결론적으로 잘되긴 했지만 시간을 시궁창에 버린 것 같아서 아쉽다고. 이때쯤이면 제이슨은 피식, 한번 비웃어 줄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담배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범인들을 실은 경찰차도 떠나버리고, 어느새 그토록 요란했던 소란은 마치 거품이 꺼지듯 사라지고 남은 것은 스산한 밤바람이 부는 골목길에 서 있는 두 사람뿐이었다. 딕은 이제 마피아들 사이에서 잠복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놈들의 고약한 버릇,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 하마터면 들킬 뻔했던 순간. 마치 침묵이 두려운 것처럼, 쉴새없이 말을 잇는 딕을 제이슨은 가만히 보았다.

-난 이제 간다.

-벌써? 우리 오랜만에 보는 건데, 좀 더 있다 가자. 아니면 네 집으로 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제이슨을 붙잡는 딕을 제이슨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답 대신, 빨아들였던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담배연기가 숨결과 뒤섞여서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그대로 담배꽁초를 떨어트리고는 발로 비벼껐다.

-그냥 돌아가.

딕의 눈이 더더욱 동그래졌다. 왜 그래, 제이? 아, 잠깐... 딕이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제이슨의 팔을 껴안다시피 붙잡았다. 내가 일부러 안 찾아간 거 아니잖아. 어쩔 수 없었어. 응? 제이슨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딕의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짙은,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 제이슨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시덥잖은 놀이는 끝낼 때야.

-제이슨, 무슨...

-넌 내가 너의 가족이길 원해?

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유달리 파랗던 제이슨의 눈동자는 오늘따라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딕은 입을 벌린 채 제이슨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이슨이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난 그런 적 없어, 단 한번도.

아주 오래 전, 하얗게 웃으면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청년의 손길을 느꼈던 그 순간부터. 한때 그것이 형제애라고 착각했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곧 깨닫고 말았다. 형에게 두근거리는 동생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았다. 잃어버릴까봐, 어두운 밤 자신을 잡아먹으려 다가오는 외로움에 혼자 남아있게 될까봐. 제이슨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토록 힘들여 가둬두었던 말을 내뱉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마 들어서는 안될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딕의 얼굴을 보는데도.

딕은 한참 뒤에야 시선을 떨구고는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구나.

무슨 말을 해야할지, 한참을 고르는 사람처럼 딕은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여전히 제이슨의 팔을 붙잡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제이슨은 굳이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널 괴롭히려는 생각은 없었어. 다만, 나는.... 딕은 입술을 살짝 핥았다. 제이슨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그냥 외로웠어.

웃고 떠들고 농담을 던져도 조금만 방심하면 몸을 덮쳐 짓누르는 외로움이, 그냥 나는 괴로웠을 뿐이야. 나는 온기가 필요했을 뿐이야. 길고 외로운 밤에 함께 있을, 체온이 필요했을 뿐이야. 형제라든가, 애인이라든가, 단 한번도 나는 그런걸 생각한 적 없었어. 그냥 혼자 있고 싶지 않았어. 난 그저.. 그저....

딕은 마치 토해내듯이, 중얼거렸다.

-그냥 네가 필요했을 뿐이야.

제이슨은 한참동안 딕을 내려다보았다. 고요가 그들 사이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들이 함께 보냈던 수많은 밤과 마찬가지로,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 그저 껴안기만 한 침묵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단어와 감정과 생각. 제이슨은 마침내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냈다.

-나도 그랬어.

나도, 네가 필요했어. 어떤 형태로든, 어떤 관계로든. 낮은 한숨과 함께 제이슨을 붙잡은 손이 스르르 풀렸다. 딕은 이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딕은 제이슨을 보았고 제이슨도 딕을 보았다. 다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고칠 곳이 많이 보이는데 그냥 귀찮아서 올려버림. 그나저나 진짜 애프터 쓰는데 환장한다는게 보이는 연성이네요 이거...;;;ㅋㅋㅋㅋㅋㅋ 물론 씬 자체보다는 그 직전의 아슬아슬한 분위기랑 애프터의 나른하고 풀어진 분위기를 더 좋아하는 취향입니다만, 이 연성에는 지나치게 애프터에만 힘을 줘서 쓴게 보여서 민망할 정도인듯ㅋㅋㅋ쓰고 싶었던 씬 쓰고나닌 마무리도 대충 한게 보이네요ㅋㅋㅋㅋㅋ어휴ㅋㅋㅋㅋ

아참 그리고 초기의 (내안의) 딕슨딕은 딕이 슨이를 많이 좋아하는 구도였는데 이제는 반대가 되어버림. 슨이가 딕을 많이 좋아하고 딕은 슨이를 어디까지나 동생으로만 대하는.. 그런 어긋난 감정이 요즘은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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