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Y.A.D.

[딕슨딕]Skinny Love 본문

글연성/DC

[딕슨딕]Skinny Love

DayaCat 2014. 3. 26. 02:41

딕슨딕의 소재 멘트는 '날 믿어줄래?', 키워드는 손톱자국. 미묘한 느낌으로



봄이었다. 제이슨은 몽롱해지는 의식의 한 구석에서도, 따스한 밤공기에서 봄의 냄새를 맡으며 안도했다.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 점점이 피어나는 새순과 향기를 흩뿌리는 꽃송이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콘크리트의 도시에도, 봄은 찾아온다는 사실에 제이슨은 안도했다. 그러니, 이런 건 아무래도 괜찮을 것이다. 아픔에 저도 모르게 간헐적으로 헐떡이는 숨결도, 붉게 물든 옆구리와, 마찬가지로 붉게 물든 손도. 힘없이 시멘트 바닥 위로 늘어진 두 다리도. 죽음은 이미 그에게 한번 키스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는 멍한 머리로, 자신이 예전에 한번 죽었을 때, 마지막을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떠올렸다. 그토록 강렬한 순간이었는데도, 정작 기억해내려니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제이슨!

밤의 정적 너머로, 흐릿한 메아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 제이슨은 그게 누구의 것인지를 떠올렸다. 알 것도 같은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가, 너무도 졸렸다. 제이슨!!!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아까보다 한결 또렷해진 소리에 제이슨은 자꾸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흐릿하게, 끝이 번지는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딕...
-괜찮아?

괜찮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진 않았겠지. 제이슨은 그와중에도 신랄하게 중얼거렸지만 그 목소리는 입술 밖으로 채 새어나오지 못했다. 딕도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 듯, 급히 제이슨의 몸을 들어올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일단 응급처치부터 해야겠다. 딕의 중얼거림에 제이슨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단정한 딕의 옆얼굴이 보였다. 아, 그래. 제이슨은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를.


*
이제 독립했다고, 브루스 앞에서 당당하게 선언했었던 주제에, 딕은 여전히 고담에 자주 찾아왔다. 제이슨이 블뤼드헤이븐은 누구한테 맡기고 놀러온거냐고 쏘아붙이면, 딕은 갱단들도 휴가를 갔다고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휴가철이잖니, 꼬마야. 노골적으로 어린애 취급하는 말투였다. 브루스는 별말하지 않았지만 딕이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어린 제이슨도 알 수 있었다.

브루스 옆에서 딕은 온갖 지도와 데이터를 보면서 이런저런 말참견을 했다. 어라, 이놈은 그때 우리가 잡았던 그놈이잖아요. 얘 또 탈옥했어요? 기억나요? 그때 우리가 시청 지붕 위에서 멋지게 잡았었던 거. 딕의 수다에 브루스는 일일이 응대하지 않았지만 수다를 말리지도 않았다. 제이슨은 딕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브루스에겐 침묵이 가장 긍정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알만큼은 오래 그의 옆에 있었다. 그러니, 사실 브루스도 딕의 방문과, 수다를 내심 반기고 있는 것이리라고, 제이슨은 생각했다.

딕이 풀어내는 추억과 과거의 실꾸러미를 제이슨은 그저 옆에서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는 딕과 브루스가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다만, 그가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말하는 딕의 눈동자가 이따금 제이슨을 향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그의 눈에서 묘한 자부심이 반짝였다는 것도. 제이슨은 그 의미를 알았다.

네가 아무리 지금 그의 곁에 있어도, 너는 결코 나한테 이기지 못해.

그럴 때면, 제이슨은 그 사실이 맞다는 사실을 서글프게 인정하면서도 분한 마음에 애꿎은 바닥만 발로 찼다. 그러면서도, 쾌활한 어조로 쉬지 않고 떠드는 딕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안 들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제이슨은 그 모든, 딕의 목소리와 말버릇과 속삭임을 말없이 기억했다.


*
제이슨은 눈을 떴다. 옅은 오렌지빛 전등이 달린 천장이 보였다. 온몸에 아릿한 통증이 밀려들어왔다. 제이슨은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몸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마냥 묵직했다. 그때 침대 위로, 불쑥 딕의 얼굴이 나타났다.

-깼구나.
-뭘한 거야.

방금 전에 죽다 살아난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퉁명스러운 질문에도 딕은 쓴웃음만을 슬쩍 보였을 뿐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간단하게 대답했다. 응급처치. 그리고는 제이슨의 몸을 가리켰다. 도대체 뭔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했어야지. 칼에 찔린 걸로 모자라서 총까지 맞고 다니고. 그 말에 제이슨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딕한테 잔소리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욱씬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옆구리를 찢는 듯한 통증에 순간 신음이 튀어나올뻔 했지만 간신히 삼켰다.

-움직이지 마, 제이슨. 내가 한건 정말 응급처치뿐이라고.
-살려준 건 고맙지만 이제부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쏘아붙이는 제이슨의 말에, 딕은 잠시 제이슨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 고집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대로 보낼 순 없어. 넌 지금 심하게 다쳤다구. 그 말에 제이슨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딕의 말대로,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다가 옆구리의 붕대엔 붉게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슨은 고개를 저었다.

-내버려둬.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잖아, 제이슨.

딕의 말에 제이슨은 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딕의 것보다 조금 더 탁한 색깔의, 파란 눈동자가 분노인지 조소인지 알지 못할 감정을 담은 채 딕을 향하고 있었다. 제이슨의 입술이 움직이고, 단단하게 비틀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난 이게 어디까지나 네 자기만족인 걸 알지, 딕 그레이슨.

제이슨의 말에, 딕의 얼굴에 미소가 지워졌다. 언제나 생글거리는 미소가 걸려 있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모습은 낯설었다. 하지만 제이슨은 이미 그 얼굴을 예전에 한번 본 적이 있었다.


*
딕과 제이슨이 단둘이 있을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딕은 뱃케이브에 오면 보통 브루스부터 찾았다. 그러면 브루스는 당연한 듯이 딕과 패트롤을 돌았고 함께 빌런을 체포했다. 가끔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브루스와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추는 딕을 제이슨은 경탄과 질투가 뒤섞인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차피 자신은 딕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거야, 잘 알고 있으니, 딕도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을텐데. 제이슨은 문득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런 약한 생각은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딕을 뛰어넘겠다는, 오기에 찬 결의가 그에겐 더 어울린다는 것을 그 자신이 더 잘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브루스를 바라보는 딕의 시선을 볼 때면, 그저, 서글퍼져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날은 브루스가 없었다. 딕은 브루스가 저스티스 리그 일로 다른 곳에 가있다는 말을 듣자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에잇, 간만에 그 무뚝뚝한 아저씨 좀 놀려먹으려고 했더니. 딕의 농담섞인 불평에서 채 감추지 못한 아쉬움이 배어나오는 것을 제이슨은 놓치지 않았다. 딕은 방만하게 의자에 앉아 팔베개를 하고 몸을 쭉 폈다. 브루스와는 또다른 종류의 늘씬하고 근육이 잡힌 어른의 몸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이슨은 아직 어린아이의 것인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고는 딕에게 다가갔다.

-여긴 웬일이야?
-아까 말했었잖아. 브루스 좀 보려고 했던 거였는데, 없다니까 뭐.

건성으로 대답하며 딕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했다. 그러다 그는 문득, 그제야 제이슨의 존재를 눈치챈 듯 시선을 돌렸다. 밝은 파란색 눈동자가 제이슨을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제이슨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러고보니, 너는 브루스랑 잘 지내?
-응... 뭐...

제이슨은 보기드물게 우물쭈물 대답을 얼버무렸다. 며칠 전에도 브루스에게 대들었지만, 그런 걸 딕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딕이 피식, 웃었다. 딕이 손을 제이슨에게로 뻗었다. 제이슨은 놀라 반사적으로 움찔했지만, 딕의 손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이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멋대로 뻗치는 제이슨의 머리카락을 딕의 손가락이 헤집고 매만졌다. 유달리 따스한 딕의 체온에 제이슨의 얼굴도 덩달아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거짓말은 안 해도 돼. 그 아저씨 성질 맞춰주기 어려운 거 내가 제일 잘 알아.

하얗게, 빛이 부서지는 것 같던 그 미소. 제이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네가 던져준 애정의 한 조각만으로도, 나는 행복했었다. 너는 몰랐겠지만. 그리고, 나도 네가 모르길 바랐지만.

*
-안녕, 제이슨.

낯익은 목소리에 제이슨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곧 검은 인영 하나가 제이슨의 앞에 사뿐히 착지했다. 익숙한, 지독하게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제이슨은 그 존재가 상기하는 모든 기억에 밀려 넘어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도망갈 수야 없었다. 제이슨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딕은 슬쩍 웃었다.

-오랜만이야... 브루스한테 이야기는 다 들었어.

제이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딕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쯤은 다 알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하고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딕은 그의 가장 감추고 싶은 부분,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알았다. 그리고, 지금도. 제이슨은 탁한 감정이 뭉클거리며 엉기는 기분에, 숨이 막혔다. 그는 차마 딕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쓸데 없는 소리 할 거면, 난 그냥 가겠어.
-잠깐이라도 반가워해주면 안될까? 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네 형이잖아.

그의 말이 맞았다. 딕은, 제이슨의 형이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딕의 말에 생략된, 그 모든 사건과 감정과 관계의 끝에서도, 그는 그저 제이슨의 형이었다. 아니다, 더 최악이었다. 그는 제이슨을 동정하는 형이었다. 제이슨은 간신히 모든 자제력을 끌어모아,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난 널 반가워할 이유가 없어.
-거짓말.

딕의 단호한 말에 제이슨의 심장이 찔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아, 그래서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거였는데. 제이슨은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고 믿었던 어린 소년이 심장 속에서 고개를 치켜드는 것을 느꼈다. 그저, 작고 어리고 서툴던, 그래서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었던 한 소년. 동경도 질투도, 그리고 애정도.

제이슨은 고개를 들어 딕의 눈을 바라보았다. 연한, 언제나 웃음기를 띠고 있던 하늘빛 눈동자. 그 속에서, 제이슨은 다정한 죄책감과 동정을 알아차렸다. 제이슨은 이를 악물었다.

-과거에 너와 내가 무슨 관계였는지는, 이젠 의미없어, 딕. 그러니까, 제발 부탁인데, 꺼져버려.

그 한마디, 한마디에 분노가 몸을 드러낸 채 딕을 노려보고 있었다. 딕은 얼굴에 모든 웃음기를 없앤 채 제이슨을 응시했다. 우울하게, 가라앉은 엷은 파란색 눈동자. 딕은 곧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빠른, 체념. 그것 보라고, 제이슨은 쏘아붙이고 싶어졌다. 나는 이토록 쉽게 포기하면서, 물러나면서, 왜 브루스에겐 그러지 못했던 거냐고. 결국 너의 호의라는 것도 구걸하는 거지에게 뿌려주는 동전같은 그 정도의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고.


*
제이슨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딕은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소파 옆 테이블엔 바닥을 드러낸 찻잔과 과자 부스러기가 흩어진 접시, 그리고 크로스워드 퍼즐이 실린 잡지가 무방비하게 놓여있었다. 누굴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제이슨은 알프레드에게서 브루스는 회사 일로 저녁시간 전까지는 돌아오기 힘들 것임을 확인 받았다. 하지만 딕도 그렇지, 그 사이 어디 밖에 나갔다 와도 괜찮을텐데, 미련하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기는. 제이슨은 딕의 단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보상받지 못할 짝사랑이란 이런 걸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가, 제이슨은 자기가 한 생각에 되려 자기가 놀랐다. 딕이 브루스를 바라보는 시선에 명확한 이름을 붙인 것은 처음이었다. 은연중에 깨닫고 말았던 것을, 처음으로 의식한 탓일까, 왠지 고요하고 평온한 딕의 얼굴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딕은 언제나 브루스를 향해 웃었다. 딕의 시선과, 목소리는 언제나 브루스를 향해 있었다. 새삼스레, 알고 있었지만 다시금 깨닫는 것들. 제이슨은 문득 생각했다. 그게 만일 자신을 향한다면. 제이슨은 가만히 딕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을 규칙적인 숨결이 간지럽혔다. 느린 손놀림으로, 제이슨은 딕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까만, 밤의 깃털같은 머리카락이 제이슨의 어린아이같은 손 아래로 흔들렸다.

그 순간, 딕이 눈을 떴다. 고요한, 여름하늘같은 눈동자가 제이슨의 눈과 마주쳤다. 제이슨의 심장이 잠시 멈췄다. 잠이 덜 깨 아직 몽롱한 기색이 가시지 않은 딕의 눈동자가 곧 제이슨의 얼굴과, 주변을 훑었다. 제이슨은 모든 사고가 정지한 채, 심지어 호흡마저도 정지해버린 것처럼, 그저 굳어있었다. 딕의 입술이 움직였다.

-제이슨?

약간의 당혹이 담겨, 대답을 요구하는 목소리. 그 순간 제이슨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하얗게 변한 머릿속에서, 필사적으로 변명할 말을 짜내려 들었지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그가 할 수 있던 일은, 엉거주춤 일어나, 아무 말없이 도망가는 것, 그 정도였다. 딕이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들켰다. 들켜버렸다. 제이슨은 무엇을 들킨 건지, 자신이 감추고 있던 게 무엇이었는지 자신도 모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딕을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제이슨은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같이 패트롤을 돌아야 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브루스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수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딕은 평소처럼 제이슨에게는 적당한 정도의 관심만을 내보이고 여전히 브루스를 향해 모든 시선과 주의를 쏟았으나, 이따금 제이슨을 향한 시선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했다.

마침내 단둘이 남았을 때, 거북하고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표정이었고, 제이슨은 딕이 무슨 말을 할지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딕이었다.

-제이슨.
-...뭐.

제이슨은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퉁명스러운 대답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런 반응이 되려 딕의 확신을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제이슨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그렇게 대답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딕은, 잠시 엷은 파란색 눈동자를 잠시 제이슨에게로 향하더니, 살풋 눈매를 가늘게 뜨며 웃었다.

-아니, 그냥 생각해보니 따지고보면 넌 내 동생이구나, 싶어서.
-...뭘 새삼스레.
-새삼스럽다니. 난 네가 처음 생긴 동생인걸.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 제이슨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딕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쯤은. 제이슨은 금방이라도 헛된 희망을 품을 것 같은 자신을 꾸짖으며, 다시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서?
-아니, 그냥, 난 네 형이고, 넌 내 동생이고... 그러니까, 응, 그냥, 앞으로 그렇게 지내자고. 사이좋은 형제로.

그 순간 제이슨은 딕이 완곡하게 거절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딕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챘고,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와 나는 형제니까, 그런 건 안 된다고. 그리고 딕이 미안해한다는 것도, 제이슨은 알았다. 어차피 알고 있었고, 그럴거라고 생각했는데도, 왠지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대신 제이슨은 주먹을 꾹 쥐고, 내뱉었다.

-맞아, 우리 둘다 브루스가 아버지니까.

그러니까, 너도 결국엔 브루스를 가질 수 없다고. 아무리 원하고 원해봤자, 소용없다고. 제이슨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내 딕의 미소가, 생기를 잃고 공허하게 반짝였다. 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응, 맞아, 브루스는 아버지지… 말 안 듣고, 무뚝뚝한, 아버지지, 그래, 맞아.
그게, 제이슨이 로빈이었을 때 마지막으로 딕과 나눈 대화였다.


*
-어찌됐든, 넌 환자야.

딕의 목소리는 좀 전보다 낮은 톤으로 가라앉아있었다. 넌 지금 제대로 걷는 것도 힘들어. 나갈 거면 나를 쓰러트리고 가든지. 어차피 불가능할테지만. 딕의 말에는 약간의 가시마저 돋아나 있었다. 제이슨은 놀란 눈으로 딕을 바라보았다. 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처음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딕은 자신도 그렇게 날카롭게 말한 것을 후회하는 지, 곧 고개를 저으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제이슨, 미안해.
-됐어.

딕의 눈동자가, 다시금 제이슨을 향했다. 푸른, 여름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제이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타까움, 그리고 미안함. 제이슨이 딕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찾아낼 수 있었던 감정의 흔적이 보였다.

-그래도, 난 널 돕고 싶은 거야. 동기야 무엇이든. 그러니까 제이슨… 날, 믿어줄래?


제이슨은 말없이 시선을 떨구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시트의 끝자락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는 딕의 손가락이 보였다. 고개를 들면, 딕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제이슨은 일부러 여전히 시선을 아래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딱딱하게 대답했다.

-넌 단 한번도 날 위해 있어주지 않았어.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도….  제이슨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고통이 몰려오는 느낌에 눈을 감았다.  아아, 그래. 죽어가던, 그 순간에, 떠올렸던 것은. 딕의 옆얼굴이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향하던 그 얼굴. 마지막으로 그 얼굴이 자신을 향했더라면, 하고 바랐었다.

모두 다 옛날 이야기일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걸 바란다면. 넌 또다시 상냥하게 거절하겠지.

제이슨은 그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젠 모든 걸 없는 걸로, 그냥 그렇게 만들고 싶을 뿐이야, 딕. 제이슨의 마지막 말은, 언젠가 작은 소년이, 그 짧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스스로에게 속삭였던 말과 비슷했다.

 



키워드 연성을 하면 키워드와는 전혀 상관없는 결과물이 튀어나온다고 합니다... 왜죠 어째서죠;;;;아무래도 내 머리가 빠가사리라서 연성하다가 키워드를 까먹어버리기 때문인것같기도 하고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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