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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슨딕]유리컵 본문

글연성/DC

[딕슨딕]유리컵

DayaCat 2013. 11. 18. 15:39

#연성 키워드 - 나를 안아줄래? 이미지는 깨진 유리컵. 부드러운 느낌.  

 

푸른 밤이었다. 요 며칠 내내 살을 에일 듯 불던 삭풍도 멎어든, 고요하고 서늘한 밤이었다. 샛노란 달무리가 골목 위로 쏟아졌다. 고담의 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한 날이었다. 제이슨은 자신이 고담을 떠난 사이 모든 고담의 빌런들이 개과천선이라도 했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건 커다란 소동 이후 찾아오는 짧고 급박한 침묵일지도 몰랐다. 고담을 떠나있었어도, 언제나 그의 고향의 소식은 건너건너 그를 찾아오고는 했기에 그 역시 최근에 이 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였기에 이렇게 돌아온 것이고. 고담 역시, 그의 고향답게, 마찬가지로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정한 걸지도 모른다. 이내 찾아올 또다른 소동을 기다리며.   

안전가옥의 문 앞에는 전단지와 우편이 이리저리 쌓여있었다. 피자가게, 새로 오픈한 중국음식점, 홈쇼핑 광고 카탈로그들. 제이슨은 그 모든 것들을 발로 대충 밀어버리고는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냈다. 곧 딸깍,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제이슨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집 안에는 엷은 달빛만이 어둠을 어슴푸레하게 밝히고 있었다. 제이슨은 굳이 전등을 켜지 않았다. 물체의 윤곽만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제이슨은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제이슨.

-누구야?!

급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제이슨이 벌떡 일어섰다. 자동적으로 그의 손은 홀더의 총을 빼들었다. 하지만 곧 제이슨은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하고는 맥이 탁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너였냐.  

-그럼 누구라고 생각했어, 제이슨?

딕 그레이슨은 싱긋 웃으면서 제이슨의 옆에 다가갔다. 제이슨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딕 역시 제이슨 옆에 앉았다. 그러자 제이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이 냄새... 술 마셨냐?

-응, 좀.

코끝을 강하게 찌르는 지독한 알코올 냄새에는 '좀'이라는 형용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제이슨은 어둠 속에서도 발갛게 달아오른게 보이는 딕의 얼굴을 보며 도대체 얼마나 마신건지 궁금해했다.  

-술 잘 마시지도 못하는게 뭘 이렇게 퍼마신거야?

-그냥, 좀. 그럴 일이 있었거든.

딕은 노래부르듯 대답하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아, 근데 조금 어지럽긴 하다. 딕은 머리를 제이슨의 어깨에 기댔다. 제이슨은 인상을 쓰면서도 딕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딕은 기분이 좋은지 짧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I'm just little bit cut in the middle. life is a maze, and love is a riddle. I don't know where to go...

정말 단단히 취했구나. 제이슨은 그러면서 점점 더 자신의 몸에 기대다 못해 쓰러지려는 딕의 어깨를 붙잡았다. 딕이 제이슨의 손길을 느끼고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아, 역시 우리 동생은 다정하다니까. 하는 짓은 험해도 속은 착하지.  

-뭐라는 거야, 술 취해가지곤. 잠이나 자. 오늘은 여기서 재워줄테니까. 

아냐, 아냐. 그건 안될 말이지. 너한테 미안하잖아. 딕은 고개를 저었다. 남이 집을 비운 사이 몰래 들어와서 술 깐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제이슨은 기가 찼지만 딕이 일어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딕은 일어나서는 휘청휘청 식탁 쪽으로 향했다. 자꾸 꼬이는 걸음걸이가 어째 불안해 제이슨도 덩달아 일어나 딕의 옆으로 다가갔다. 딕은 제이슨을 보면서 다시 한번 히죽 웃어보였다. 나 목말라서. 그 말에 제이슨은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고 유리컵에 한잔 따라서 건네주었다. 친절하기도 해라. 딕은 두 손으로 컵을 공손히 받았다.  그 순간 그의 손에서 유리컵이 미끄러졌다. 

-아.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났다. 딕의 손에서 유리컵이 땅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하얗게 빛을 반사하며 튀어오르는 유리조각. 딕은 그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먼저 움직인 것은 제이슨이었다. 제이슨은 낮게 한숨을 쉬며 몸을 숙여 유리조각을 집어들었다. 움직이지 마. 제이슨은 일단 파편들 중에서 커다란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다른 손에 올렸다. 딕은 가만히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유리조각을 줍는, 제이슨의 동그란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유리파편이 꼭 모래사장의 조개껍질 같았다. 아, 아닌가, 별빛인가? 딕은 아주 오래전의 조그맣던 소년을 떠올렸다. 잘 웃고, 잘 울고, 지금처럼 감정을 숨기는데는 여전히 재주가 없던 그 소년을. 그 소년은 지금 자신의 발밑에서 빛을 주워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이 부숴버린 흔적들을, 하나하나. 그렇게.        

-예쁘다.

-뭐라고?

제이슨이 고개를 들어올리며 반문했다. 딕이 약하게 웃었다. 아니, 그냥 고마워서. 제이슨은 투덜거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하여간 술 취했으면 곱게 잠이나 잘 것이지. 제이슨은 손에 든 유리조각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다시 한번 딕에게 말했다. 그 쪽으로는 움직이지 마. 아직 파편이 남아있으니까. 제이슨은 그러면서 딕의 몸을 조심스럽게 끌어안고는 뒤로 움직이게 끌어당겼다. 실수로라도 넘어지면 큰일나니까. 제이슨은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딕은 고개를 제이슨 쪽으로 돌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딕은 가만히 제이슨의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뭐하는 거야.

-그냥, 장난.  

딕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제이슨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이슨의 손이 딕의 등을 두드리려다, 잠깐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나 그랬었다. 조금만 더 걸어나간다면, 차라리 그렇게 명백하게 보여줬더라면, 차라리 우리의 관계는 훨씬 더 단순했을까. 딕은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나 자신을 따라다니던 그의 파란 눈동자를 깨달은 건, 그리고 그의 마음을 이용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딕은 얼굴을 제이슨의 어깨에 묻은 채 중얼거렸다.

-있잖아, 나 차였어. 알고보니 그 여자는 나를 사랑한게 아니더라고. 정확히는 날 이용한 거였어. 왜 이용했는지는 복잡한 사정이 있지만.. 어쨌든, 그랬다는 거야. 결국엔 그랬다고, 응, 그치. 

제이슨은 딕의 등에 살짝 걸치고만 있던 손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래려는 듯, 느릿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에, 딕은 제이슨의 목을 좀 더 끌어안았다.

-화낼 수는 없었어. 미워할 수도 없었어. 이해해버렸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별반 다를 거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아니까.

내가 이기심에 너의 마음을 알면서도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랬던 것뿐이라고. 딕은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켰다. 다만 그는 서글프게 웃었다.

-그러니까, 안아줄래?

내가 수없이 너의 마음을 부숴버려도, 너는 결국 끝끝내 그 파편들을 주워든 채 나를 여전히 보고 있을 거라고. 그래서 내가 언제나 너에게 기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해줘.  

제이슨의 손이 딕의 등을 감쌌다. 그의 따뜻하고 단단한 품 속에서, 딕은 살짝 울었던 것도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진단메이커 돌려서 나온 연성키워드로. 시점은 리런치 이후 나이트윙 vol.1 끝났을 때예요. 라야한테 차이고 난 직후. 물론 이때 제이슨은 아웃로즈 일 한다고 바빴을 것 같지만. 그런데 분명 시점은 리런치 이후인데 캐릭터는 리런치 이전인것같다..? 어쨌든 제이슨의 짝사랑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는 딕을 쓰고 싶었어요. 어째 망한 것 같지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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