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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A.D.
여름밤의 전화는 낯익은 번호로부터 온것이었다. 피터는 전화를 받으면서 액정의 숫자를 쳐다보았다. 새벽 세시 이십칠분, 전화하기에 썩 좋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뉴욕은 연일 며칠째 유례없는 폭염으로 밤이고 낮이고 할것없이 도시 전체가 뜨겁게 달아오른 채였고, 한낮 내내 달궈진 공기는 밤이 되어도 식질 않았다. 그 덕분에 사람들의 외출도 감소하고, 심지어 빌런들과 범죄마저도 감소한 덕분에 피터 역시 요 근래 밤이 되어도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잠을 자자니, 너무 더웠다. 그래서 피터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헤이, 피터~!" 비틀거리다 못해 끝이 꼬부라진 목소리였다. 목소리에 한껏 묻어있는 취기에 피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플래시, 너 술 끊는다고 하지 않..
단어 : 영원 문장 : 눈이 내리는 밤에 너를 생각해. 분위기 : 위태롭게 외줄타기 하듯 밤은 길었다. 지평선 위로 어둠과 함께 눈이 내렸다. 맷은 아주 오랫동안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흰 눈송이 위로 침묵이 덧씌워지며 천천히 침몰하는 소리를, 맷은 들었다. 밤은 길었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눈이 오면 돌아오겠노라고 해놓고선,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늦었다. 사람들은 그가 자기 장례식에도 늦게 나타날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니까, 맷은 기다릴 수 있었다. 밤은 길다. 맷은 기다릴 수 있다. 영원처럼 이어지는 밤과,그 속에서 홀로 걸어올 너를. 자꾸 다리가 눈에 잠겼다. 걸음을 뗄 때마다 푹푹, 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발 밑의 눈이..
헤어지자고, 피터는 말했다. 그가 그 말을 한것은 이번이 열한번째였다. 항상 그랬다. 높은 목소리가 한참이나 오가고 자존심과 오기 그 어디의 무엇인가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할 때쯤이면, 피터는 언제나 그랬다. 지금처럼, 물기에 흠뻑 젖은 속눈썹을 깜박이며. 손등 위로 투둑투둑 떨어지는 물방울과 함께..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헤어져요, 라고. 싸움의 시작은 사소했다. 언제나처럼, 별것 아닌 것들이 일으킨 작은 마찰이 자존심이라는 연료를 만나 불꽃으로 타올랐을 뿐이었다. 한참동안 서로에게 모진 소리를 했다. 그때쯤 되면, 처음 계기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지기 마련이다. 피터가 분을 못 이겨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졌을 때, 맷은 그것에 화를 내면서도 본인도 비슷하게 행동했다. 그러고나면 ..
피터는 언제나 토니의 곁으로 되돌아오고는 했다. 그것은 떠남의 개념을 몸에 익혀 늘 바람 냄새를 묻히고 다니는 철새의 움직임과도 비슷했다. 토니는 익숙한 바람이 불때쯤이면 생각하곤 했다. 피터를 이제 볼 수 있겠구나, 라고. 피터가 언제나 되돌아온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언제나 떠난다는 것이기도 했다. 토니는 피터가 못 견뎌하는 것이 자신의 끝없는 바람기인지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술버릇인지, 아니면 나이라곤 먹지 않는 성격 때문인 것인지 궁금해했다. 어쩌면, 그 셋 모두일지도. 피터가 떠날 때는 언제나 비슷했다. 나지막한 한숨을 바람에 흘리며 피터는 그 길고 투명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갈색 눈동자 위로 마찬가지로 갈색인 눈썹이 가볍게 떨리다가, 피터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안녕, 토니. 언젠가 또 다음에..
바람이 계속, 계속 불었다. 갈대밭 한가운데서 플래시는 눈썹을 한껏 찡그리며 걸어갔다. 갈대를 짓이기는 군화의 감촉은 오늘따라 딱딱하고 무거웠다. 헬멧의 끈이 턱에 단단히 고정되지 못하고 자꾸 바람따라 피부에 부딪쳤으나, 그의 두 손은 이미 무거운 장총을 들고있었으므로, 헬멧을 고쳐쓸 여유는 없었다. 사막에도 강이 있어 그 옆으로 갈대가 잔뜩 자랐다. 노란 지평선 위로 강과 네모낳고 조그만 사람의 집, 갈대밭말곤 없었다. 그의 상관은 이 주위를 순찰해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본래 이곳은 공터나 마찬가지였던 듯, 사람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거기다 이미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다. 그것은 플래시의 나라가 사막의 도시와 마을에 폭탄을 쏟아붓고 난 뒤의 일이었다. 플래시는 계속해서 걸었다. 허..
맨처음 그의 노래를 들었던 것은 어두운 저택 안, 열려진 방문 틈 사이로였다. 혼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앳된 소년의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설었다. 딕은 슬그머니 열려진 문 틈새로 머리를 내밀었다. 제이슨이 교과서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숙제라도 있는 걸까, 오래된 동요를 부르는 제이슨의 목소리는 맑고 청량했다. 평소 거칠었던 그의 언행을 생각해보면 놀라우리만치 단정하고 깔끔해서 딕은 놀라면서도, 어쩐지 제이슨이 새삼 귀여워보여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었다. 그리고 제이슨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문에 머리를 기대고 제이슨의 노래를 한참동안 듣고는 했다. 그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은 항상 좋았다. 낮은, 그러면서도 의외로 소년의 ..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여느때처럼 에스페란자는 누구인지 확인한 다음 마이런은 현재 부재중이니 할 말은 여기 남기라는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에스페란자는 방문자의 얼굴을 본 순간 전혀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대신 에스페란자는 입술에 미소를 살짝 올리며 인사했다. 마이런은 여기 없어요, 윈. 의례적인 말이라고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윈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알고 있어. 그리고 여기에 15분 뒤에 도착할 것이라는 것도 알지. 윈의 말에 에스페란자는 못 당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겠죠, 당신이야 마이런에 대한 건 뭐든 다 알고 있으니. 윈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
오랜만이야, 피터. 잘 지내? 뭐, 너야 항상 뉴욕을 지키느라 바쁠 것 같지만. 메리제인은 어떻고? 그 매력적인 미소는 여전한가? 나는 아직도 너희 둘이 깨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하지만 너야 이상하게도 항상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니까, 아마 또 다른 여자를 금방 사귈 수 있겠지. 나는 지금 우주야. 지구에선 3억 광년 정도 떨어진 곳이라고 하더라. 어마어마한 거리지? 빛이 3억년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도 와닿지가 않는 단위야. 마치 km를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데, 사실은 엄청난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잖아. 로켓이 설명해주기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별의 빛을 지구의 사람들이 보게 되는 건 3억년 뒤라는 뜻이라더라. 너는 결코 그..
플래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새까만 어둠 가운데 천장에 매달린 불빛만이 홀로 어슴푸레하게 빛을 냈다. 텐트의 뾰족한 천 지붕이 아닌 판판한 콘크리트 천장이 낯설었다. 플래시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근육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한 감촉을 남기며 움직였다. 쇠로 만들어진 침대 손잡이가 보였다. 플래시는 몽롱한 머릿속을 더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여긴 병동이구나.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임무 도중이었다. 그들의 적이 숨어있다는 곳으로 잠입하는 것이었다. 그가 속한 소대는 이라크에선 베테랑이었기에 특별히 이번 임무를 맡게 된 것이라 중위가 떠들던 것이 생각났다. 플래시는 언제나처럼 점잔빼는 젊은 중위의 말투를 가볍게 비웃었고 옆의 동료들은 그의 흉내에 킬킬대며 웃었다..
내 첫사랑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너희들 무슨 여자애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냐? 아, 그래. 뭐 나야 여자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누구보다 많은 사람이지. 내 첫 여자친구는 금발 치어리더였어. 알잖아? 태닝한 피부에, 자연산 금발, 웃으면 보조개가 들어가는 얼굴. 가슴도 컸지. 잘 아네, 그게 사실 포인트지.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미식 축구부의 주전 쿼터백이었으니까. 사실은 이렇다 할 이유가 있어서 사귄 건 아니야. 그냥 치어리더와 미식축구 선수는 사귀는 게 당연한 거잖아. 너희들도 고등학교 나와봐서 알겠지만 그건 그 나이대 애들한텐 해가 지면 밤이 온다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한 거라고. 그리고 나는 우리학교 치어리더 중에서 제일 예쁜 애랑 사귄 거고. 그런데 여자를 사귄다는 건 확실히 귀찮더라고. 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