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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마이런]어느날 윈과 에스페란자의 대화

DayaCat 2014. 9. 7. 21:59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여느때처럼 에스페란자는 누구인지 확인한 다음 마이런은 현재 부재중이니 할 말은 여기 남기라는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에스페란자는 방문자의 얼굴을 본 순간 전혀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대신 에스페란자는 입술에 미소를 살짝 올리며 인사했다. 


마이런은 여기 없어요, 윈. 


의례적인 말이라고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윈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알고 있어. 그리고 여기에 15분 뒤에 도착할 것이라는 것도 알지. 윈의 말에 에스페란자는 못 당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겠죠, 당신이야 마이런에 대한 건 뭐든 다 알고 있으니. 윈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쭉 뻗은 긴 다리 아래로 윙팁 구두의 끝이 반질거렸다. 윈은 검은 코트를 벗으며 손님 접대용 소파에 풀썩 앉았다. 윈의 성격답게, 혹은 수백번은 여기를 드나든 사람답게 거침없는 태도였다. 윈은 나른하게 다리를 꼬며 팔을 목 뒤로 두르고 소파에 기댔다. 잘 정리된 금발 머리카락 위로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졌다. 에스페란자는 그런 윈을 잠시 쳐다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윈, 향수 바꿨어요? 에스페란자의 말에 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이렇게 요란한 향은 안 써. 그러자 에스페란자가 살짝 검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이 향기는 도대체... 아. 에스페란자는 중얼거리다 말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물었다.


이번엔 남자였어요?


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들고 나지막한 오후의 햇살이 비쳐드는 사무실 안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먼지가 떠다니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윈의 금빛 속눈썹 위에도 그 빛의 조각들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하지만 침묵만으로 충분했다. 에스페란자는 입술에 살짝 쓴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윈,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당신처럼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 하나를 가지지 못해서 끊임없이 대신할 것을 갈구해야한다는 것 말이에요.
그런가?


대답하는 윈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엷은 햇살이 공기 중에서 부서지고 흔들려서 윈의 얼굴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햇빛에 하얗게 물든 공기 너머의 윈을 바라보며, 에스페란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결국 모두 당신의 선택이니 저야 딱히 무어라 말하고 싶진 않아요.. 다만 이해가 잘 안될 뿐이에요. 그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데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기분이죠?
글쎄. 난 마이런을 옆에서 지켜보는 걸 아주 좋아하거든.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내 제일 친한 친구잖아. 더 이상 바랄 게 없지.
제가 말하는게 뭔지 알잖아요, 윈. 친구 말고, 그 이상의 것. 당신은 마이런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게 아닌가요?
그렇게 된다면야 좋겠지....


윈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쭉 뻗은 콧날과 단정한 옆선이 드러났다. 그의 금빛 속눈썹이 파란 눈동자 위로 낮게 드리웠다. 윈의 얼굴은 조금도 변화도 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좋지 않아.
글쎄요, 전 어떻게 그게 지나친 게 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윈. 솔직히 말해봐요. 당신은 정말로 마이런을 만지고 싶었던 적이 한번도 없어요? 그를 안고, 키스하고, 자고 싶지 않았냐구요. 정말로 그의 그 멋진 엉덩이를 만지고 싶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냔 말이에요. 


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신 가만히 어디론가 시선을 고정했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오후의 햇빛에 세상이 몽롱한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먼지가 반짝이며 떠돌고 공기는 나직하고 고요했다. 윈은 손가락으로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톡, 톡, 톡. 일정한 리듬이 공기 중에 동그랗게 파문을 일으키며 울렸다. 톡, 톡. 윈은 다섯 번 정도 더 소리를 만들어냈다가, 멈췄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톡. 그가 다시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의 긴 속눈썹이 다시 한번 깜박이며 햇빛을 부서뜨렸다. 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의 시선은 에스페란자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냐.
그러면요?
정말 중요한 건... 그의 존재지. 마이런이 그저 내 옆에 무사하게 있어주는 것 말이야. 내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그냥 그것 하나뿐이야. 관계의 진전이나 육체적 접촉도 물론 좋겠지. 근데 그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야. 난 그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할 수 있어. 마이런이 그저 내 옆에, 무사하게 있어주기만 한다면 말야.


에스페란자는 잠시 윈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윈의 하얗고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녹아있지 않았다. 그저 그는 푸른 눈동자를 내려깐 채 가만히 햇살 속에 파묻혀 있었다. 에스페란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이런은 제가 제시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이유가 그녀가 마이런을 상처준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사실은 그게 아닌데. 제시카는 결코 당신처럼 마이런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인데.
그거 영광인걸. 하지만 제시카는 내가 절대 줄 수 없는 걸 마이런에게 줄 수 있지. 부드러운 여인의 살결 말야.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마이런은 많은 것을 놓치고 있죠. 


에스페란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윈을 바라보았다. 


그는 알까요, 자신이 이토록 대단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윈도 마찬가지로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편이 더 행복할 거야.



페이드어웨이를 읽고 간단하게. 마이런 볼리타 시리즈는 더 읽어볼 생각입니다. 윈과 마이런의 관계가 너무 좋아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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