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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피터]너를 향해 본문

글연성/마블

[플래시피터]너를 향해

DayaCat 2014. 8. 14. 17:48

플래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새까만 어둠 가운데 천장에 매달린 불빛만이 홀로 어슴푸레하게 빛을 냈다. 텐트의 뾰족한 천 지붕이 아닌 판판한 콘크리트 천장이 낯설었다. 플래시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근육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한 감촉을 남기며 움직였다. 쇠로 만들어진 침대 손잡이가 보였다. 플래시는 몽롱한 머릿속을 더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여긴 병동이구나.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임무 도중이었다. 그들의 적이 숨어있다는 곳으로 잠입하는 것이었다. 그가 속한 소대는 이라크에선 베테랑이었기에 특별히 이번 임무를 맡게 된 것이라 중위가 떠들던 것이 생각났다. 플래시는 언제나처럼 점잔빼는 젊은 중위의 말투를 가볍게 비웃었고 옆의 동료들은 그의 흉내에 킬킬대며 웃었다. 조금의 두근거림도 긴장도 없었다. 그들이 수십번은 해온 것이었다. 그들은 필요한 군장을 쌌으며 그들을 실어갈 트럭을 기다렸다. 빌어먹을 군용트럭은 언제나처럼 준비되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들은 모래바닥에 주저앉아 하릴없는 잡담을 했다. 무슨 음식이든지간에 전투식량이 되는 순간 맛없어지는 미스테리, 앤디가 새로 공수해온 포르노 잡지, 혹은 브라운 원사가 가진 청결함에 대한 집착 등등.
트럭은 그들을 싣고 한참을 달렸다. 요란하게 덜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의 양쪽으로 부옇게 모래먼지가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플래시는 총을 멘 채 앉아 따가운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 사막의 햇살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대신 어느새 익숙해진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막의 지평선이었다.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달리는 트럭은 쉴 새 없이 덜컹였고 혀를 깨물기 싫은 이들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플래시는 요란한 침묵 속에서 그저 멀리 사막을 바라보았다. 먼지 너머로 보이는 사막은 몽롱했고 멀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가만히 피터를 생각했다.

사막으로 오기 전에 그는 피터를 만났었다. 그들의 공식적인 마지막 만남은 플래시를 위한 환송파티였다. 플래시는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언이랍시고 온갖 말을 늘어놓는 이들 사이에 둘러싸여 피터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피터는 사람들 틈 사이로 흘러들어와 플래시에게 나지막한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했다. 피터의 손은 마르고 따스했다. 잘 가, 플래시. 몸조심하고. 플래시는 피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 순간 플래시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전부 잊어버렸다. 그저 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에서, 그가 자신을 향해 이렇게 웃어준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만이 떠올랐다. 플래시는 우두커니 서서 피터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어질거리는 머리 때문인지, 뭘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른 누군가가 플래시의 어깨를 탁 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플래시가 고개를 돌린 사이 피터는 맞잡았던 손을 풀고 그대로 사라졌다.

파티가 끝나고 며칠 뒤 플래시는 해리의 집에 들렀다. 그는 해리에 몇가지 서류를 부탁했던 참이었다. 해리는 바쁜 모양인지 그의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곤 알아서 가져가라고 말했다. 플래시는 그곳에서 피터와 마주쳤다. 피터는 널찍한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플래시는 해리와 피터가 룸메이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평일의 낮에 피터가 집에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피터는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곤히 자고 있었다. 플래시는 조심스레 피터의 옆에 가까이 갔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희고 곧은 이마가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갈색인 눈썹 옆에는 큼지막한 반창고가 있었다. 플래시는 도대체 피터가 어디서 이렇게 크게 다쳐 온 것인지 궁금했다. 피터는 격렬한 운동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괴롭힘이라도 당하나, 라고 생각했다가 플래시는 스스로에게 쓴웃음을 보냈다. 누구보다도 피터를 열심히 괴롭혔던 건 자신이었으면서. 플래시는 새삼스럽게 피터의 하얀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난 널 괴롭히고 싶었던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플래시는 마치 이끌리듯이 손을 뻗어 피터의 볼을 쓸었다.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손가락에 닿았다. 그는 언제나 피터의 얼굴을 때리곤 했다. 왜였을까? 플래시는 다시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매만졌다. 살갗이 맞닿는 감촉이 플래시의 심장을 간질였다. 꼬옥 감은 피터의 갈색 속눈썹을 다시 한번 플래시는 바라보았다. 피터는 여전히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을 내며 잠들어있었다. 플래시의 손이 피터의 얼굴 윤곽선을 따라 움직이다가, 입술 부근에서 멈췄다. 플래시가 몇번 터뜨린 적이 있는 입술이었다. 지금은 말끔하게 나아있어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플래시는 조심스레 피터의 입술을 만졌다. 손가락 끝으로 유달리 뜨거운 체온이 잡혔다. 플래시는 홀리듯이 고개를 숙였다. 눈 깜박이는 것도 숨쉬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렇게 플래시는 피터에게 입맞추었다.

찰나의, 그러나 강렬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플래시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깨닫고는 튀어오르듯 일어섰다. 피터는 으음...하면서 몸을 뒤척였고 플래시는 더욱 더 당황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아우성을 쳤다. 플래시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

플래시는 나중에 해리의 왜 서류를 가져가지 않았냐는 물음에 그저 그럴 수가 없었노라는 대답만을 했다. 그는 해리에게 그저 미안하다고 거듭 말하면서 다시 한 번 서류를 자신에게 가져다 달라는, 바쁜 건 알지만 제발 시간을 내달라는, 간청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해리는 짜증보다는 의아함이 더 강한 눈치였지만 플래시의 절박한 어조에 알겠다며 통화를 끊었다. 플래시는 낮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는 이제 다시는 피터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난생처음 사막 위를 걸을 때 그는 피터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막은 넓고 끝없이 이어졌다. 나지막한 능선과 부풀어오르는 모래바람을 먼데서 바라보며 플래시는 피터를 생각했다. 그의 갈색 눈동자와, 웃을 때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버릇을 생각했다. 그는 총을 메고 한참을 따가운 햇볕아래서 걸었다. 입안에 들어온 모래알갱이가 까끌거렸다. 그는 언젠가 결국 피터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에게 화를 냈던 순간을 생각했다. 그때도 이렇게 입안이 까끌거렸었다. 행군은 길고 길었다. 턱선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사이로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눈앞이 열기로 조금씩 이지러져갔다. 뜨거운 햇살이 모든 형체의 언저리를 뭉개고 번지게 만들었다. 다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보폭을 맞추어 움직였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플래시는 피터를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플래시는 그 미소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피터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플래시의 소대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느새 사막은 밤이 되었다.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그들은 야간투시경을 쓰고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이 알고 있는 적들의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갖추고 있는 무기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 혹은 상주인원은 얼마나 되는지. 대략적인 추정만이 존재할 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움직여야만 했다. 이토록 작은 요새를 파괴하는 것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들이 누구와 연결되어있는지는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되도록이면 많은 이들을 생포해야만 했다.
플래시의 옆에서 에디 병장이 투덜거렸다. 생포가 제일 어렵다고. 차라리 죽이라고 하면 기꺼이 살인자가 될테니 윗대가리들이 와서 생포해보든가. 그러나 젊은 중위가 눈을 번득이며 뒤를 돌아보았던 탓에 에디는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다시 벙긋거렸다. 내 말이 맞다니까, 라고.
적의 요새는 다 버려진 마을에 있었다. 사막에는 이런 마을이 숱하게 있었다. 전쟁 때문이든 혹은 오아시스가 말라버렸기 때문이든 사람들은 마을을 훌훌 버리고 떠났다. 오직 남은 것은 모래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서 있는 낮은 흙집들 뿐이었다. 간혹 플래시는 사람들이 미련없이 떠나는 이유가 어차피 사막이 언젠가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을 알기 때문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 모든 인간의 흔적은 결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에.

본래는 촌장의 집을 쓰였을,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 적들의 본거지였다. 그 곳에 각종 통신장비며, 중요한 인물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추정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적들도 방비를 하고 있었다. 터번을 얼굴에 두르고 장총을 든 이들이 주위를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젊은 중위의 작전은 간단했다. 소대는 둘로 나뉘어 잠입한다. 동측에서 하나, 서측에서 하나. 가능하면 조용히. 그리고 목적지인 가장 큰 집으로 모일 것. 병사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결국 입바른 소리를 곧잘 하는 루퍼트 하사가 한마디 했다. 아니, 이런 종류의 임무는 그린베레나 레인저 애들한테 시켜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그 잘난 체 하려고 기를 쓰는 해병대 애들 쓰든가. 왜 평범한 육군 소대인 우리가 이런걸 해야하는 겁니까? 중위는 한숨을 낮게 쉬었다. 그건 사정이 있다. 어쨌든 우리가 작전을 맡았으니 하는 것 뿐이다. 반쯤 체념한 듯한 중위의 목소리에서 병사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대충 알아차렸다. 보나마나 또 지휘권 싸움이겠지. 높으신 분들 기싸움에 죽어나는 건 결국 우리뿐이야. 에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군인은 까라면 까는 존재이므로, 그들은 속내야 어떻듯 작전에 임했다. 플래시는 동측을 맡은 곳에 속했다. 다행스럽게도 적들의 무기는 형편없어 몇개의 가스탄과 기관총 몇발이면 대충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조용히 하라던 당부는 휴짓조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차피 그들도 그럴 줄 알고 양동작전을 준비한 것이었으니 상관없었다. 어느새 적들이 몰려왔고 플래시는 토담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쏟아지는 총알세례를 피했다. 고막을 찢어버릴 듯 울리는 총성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플래시는 토담벽에 바짝 붙어 동료들과 함께 이따금 몇번 대응 사격을 했다. 그러나 결국 제일 좋은 방법은 수류탄으로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죽이면 안된다고 했는데. 플래시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의 에디가 수류탄 핀을 빼면서 말했다. 내가 그래서 말했잖아. 안 죽이는 게 제일 어렵다고! 에디가 수류탄을 던지자마자 부대원들 모두 몸을 웅크리고 귀를 막았다. 그럼에도 온몸을 뒤흔들며 진동하는 굉음에 그들은 잠시 숨을 죽였다. 곧 빼꼼 고개를 내밀어 더이상 서있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플래시가 부대원들에게 움직이라는 손짓을 했다.

그들이 목적지에서 맞닥뜨린 것은 예상치 못한 혼전이었다. 플래시는 총알과 폭탄 세례로 구멍이 난 토담 벽 너머로 익숙한 중위의 얼굴을 발견했다. 소리쳐 부르려 했지만 곧 날아오는 총알에 몸을 숙여야만 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플래시는 악을 썼지만 총탄 소리에 모두 묻혀버렸다. 플래시는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아무래도 적들의 마지막 발악인듯, 그들은 본거지를 둘러싸고 서서 기관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베트남전 때보다 나을 것도 없는 무기 수준이라더니, 러시아제 기관총은 도대체 어디서 구했대? 플래시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어떻게든 그 안으로 잠입할 다른 길이 있나 찾아볼 요량으로 몸을 숙여 슬쩍 한발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앤디가 따라오라는 플래시의 손짓을 보고 뒤를 따랐다.

플래시는 몰래 적들의 기지 뒤로 숨어들어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기지라고 해봤자 조금 큰 민가였다. 잠입하는 게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총격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고지를 점하는 것이고, 기지로 침투하기만 한다면 그것쯤은 쉬워보였다. 이제 문제는 그 사이에 그들을 가려줄 엄폐물을 찾는 것이었다. 플래시와 앤디는 이미 포탄으로 반쯤 다 무너진 흙집 뒤로 기어들어갔다. 머리 위로 어둠을 드리운 그늘 속에서 그들은 조용히 움직였다. 그때 어디선가 인기척이 났다. 앞서가던 플래시가 멈춰섰다. 야간 투시경의 초록색 화면 속에서 인간의 형체가 보였다. 터번을 쓰고 헐렁한 전통복을 입은, 그리고 장총을 서툴게 든 이였다. 길쭉한 총신을 보자마자 플래시가 소리질렀다. 앤디, 엎드려!!! 동시에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플래시는 황급히 옆으로 굴렀다. 젠장, 어쩐다? 그는 흙바닥에 엎드린 채 총을 다시 고쳐들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총을 쏘는 것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남자가 반동을 못이기고 비틀거렸다. 그때를 플래시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날려 남자를 덮쳤다.
헝클어진 푸른 터번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의외의 것이었다. 달빛에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그 얼굴을 보며 플래시는 중얼거렸다. ....아이?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이제 열일곱이나 되었을법한 소년이었다. 플래시는 소년 위에 올라타 그의 목에 대검을 들이대고 있는 자신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소년의 눈동자는 갈색이었다. 그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워지지 않을 억울함과 분노가 시선 안에 담겨 있었다.
플래시는 그런 눈을 자주 보았었다.

피터의 멱살을 잡을 때면, 동시에 훅 끼쳐오는 피터의 살냄새와 체온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아득해지는 기분에 플래시는 정신을 차리려고 피터의 멱살을 잡은 손에 다시금 힘을 주곤 했다. 그럴 때면 피터는 가쁘게 숨을 헐떡거렸다. 힘들게 숨을 들이쉬면서도 피터는 플래시를 노려보았다.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한 갈색 눈동자. 플래시는 피터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플래시의 몸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앤디였다. 앤디가 뒤로 다가와 말했다. 일단 이 녀석은 생포할까요. 플래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전히 총부리를 소년에게서 겨누며 천천히 일어섰다. 소년은 잠자코 일어섰다. 플래시는 다시 소년을 노려보며 말했다. 손 들어올려. 하지만 소년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듯 그저 플래시를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플래시는 다시 한번 외쳤다. 손, 들어올리라고! 소년은 플래시를 노려보며 손을 엉거주춤 들었다. 그리고 그 손에는 수류탄이 들려있었다. 플래시는 그 순간 반사적으로 앤디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는 자신이 그 순간 무어라 외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도, 곧 이어진 것은 폭발음과, 아픔, 그리고 어둠.


어두운 병동의 천장을 바라보며 플래시는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하지만 진통제를 엄청나게 맞었는지 머리가 몽롱하고 몸이 무거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헤로인을 실컷 했을 때랑 비슷한 기분인데. 하지만 그는 간신히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팔뚝에 주렁주렁 달린 줄들이 출렁거리는 게 성가셨지만 떼버릴 수도 없었다. 플래시는 잔뜩 붕대가 감긴 자신의 몸을 내려보았다. 그리고 담요로 덮인 하체를 물끄러미 보았다가, 그대로 담요를 걷어냈다.
무릎 밑으로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붕대로 감긴 허벅지가 전부였다. 플래시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토해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발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부터. 하지만 직접 보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플래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요를 다시 들어 덮었다. 플래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었다. 몽롱하게 몸을 잠식하는 약기운 때문인걸까, 아니면 믿고 싶지 않아서인걸까. 플래시는 다시 한 번,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은 그때 그 소년을 바로 죽였어야 했던 걸까. 그랬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플래시는 답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그럴 수가 없었을 뿐이라는걸. 그리고 그는 그 이유도 알았다. 플래시는 나직하게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나는 이의 이름을 불렀다. 피터..

그는 다시는 피터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피터의 눈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그가 줄곧 피해왔던 것들이 그에게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것들, 두려워했던 것들.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 아우성을 치며 잡아먹으려 달려들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더이상 외면하지 못하도록, 그저 직시하고 받아들이도록, 그래서 그는 무서웠다.

아아, 피터. 난 정말 다시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았어.
난 그저 널 잊고..... 그저 모두 없던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

그리고 난 결국 실패한거겠지. 플래시는 중얼거렸다. 잘린 다리에서는 여전히 이상하게도 고통이라곤 없었다. 눈물이라곤 나오지 않는 눈처럼. 플래시는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결국 내가 한 모든 게... 이렇게 돌아올 거라는 걸, 난 알았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나는, 언제나 너를 그리워하고 있었는데.





파병 간 플래시 이야기 세번째... 그렇습니다 연작이 되어버렸어요ㅋㅋㅋㅋ이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ㅋㅋㅋ

군대물은 참 좋아합니다만 보는 것도 쓰는 것도 용어가 너무 어려워서 힘들어요. 그 분위기 자체는 굉장히 좋아하는데 말이죠.

어쨌든 군대 간 플래시 이야기는 이걸로 끝입니다. 하지만 플래시피터는 너무 좋은 커플링이라 계속 쓰게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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