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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슨]아이스크림 본문

글연성/DC

[뱃슨]아이스크림

DayaCat 2013. 10. 16. 13:55

오늘따라 하늘은 유달리 높고 맑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본래는 어둡고 거무죽죽한 색깔인 고층건물마저 하얗게 햇빛을 반사했고, 공기에 뒤섞인 매연마저도 상쾌한 바람에 어느새 날아가버렸다. 고담에서는 보기 드문 깨끗하고 청명한 날씨에 너도나도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로 공원은 붐볐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무 사이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잔디 위에 앉아 있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연인들이 나란히 앉아 가볍게 키스하고, 새파란 하늘 위로 아이들의 빨간 풍선이 떠오른다. 제이슨은 벤치에 앉아 멍하니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제이슨의 생활리듬은 야행성이었고, 그러니 이런 오전 시간대에 나와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당장 나와서 바람 좀 쐬고 사람답게 살라고 강요하는 듯한 햇빛에, 지나치도록 환한 햇빛에 잠이 깨버렸던 것이었다. 햇빛에 형체가 있다면 짜증을 내면서 총알을 그 이마에 박아주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슈퍼맨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제이슨은 하릴없이 밖에 나와 이렇게 벤치에 앉아있게 되었던 거였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 행복해보였다. 특히나 아이들이. 제이슨의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 눈 앞의 광경과 겹쳐졌다가 흐려졌다. 제이슨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굳이 지금 구질구질한 과거를 떠올릴 필요는 없는데. 그때 제이슨의 눈에 익숙한 모습이 들어왔다.  

브루스였다. 깔끔한 검은 정장에 단정하게 머리를 뒤로 넘긴 모습이었다. 낮에 그를 보는 것은, 특히나 배트맨 카울 없이 그를 보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맨 얼굴을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만큼. 제이슨은 인상을 찌푸렸다. 구질구질한 과거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바로 좀 전에 생각하자마자 여기 앞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다니.   

브루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바로 옆에는 늘씬한 여성이 서 있었다. 브루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여인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오호라, 간만에 바람둥이 모드이신건가. 제이슨은 입술을 비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때 브루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브루스의 파란 눈동자가 놀람으로 살짝 커지는 것을 보고 제이슨은 다시금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모르는 척 하고 지나가긴 틀렸군. 제이슨은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나 얼른 하고 지나가라는 무언의 메세지가 담겨 있는 몸짓이었지만 브루스는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여성에게 무어라 미안한 듯 말하더니 곧 그녀와 헤어져 제이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 진짜 그냥 지나가라니까."

제이슨이 짜증을 내며 뒷머리를 긁었다. 브루스는 제이슨이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제이슨 옆에 앉았다. 둘 다 환한 낮에, 카울이나 마스크 없이 서로를 보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브루스도 일단 옆에 앉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둘 사이에 흘렀다. 결국 그 답답함을 못 이기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제이슨이었다.  

"데이트 중간에 내가 훼방놓은 것 같은데요."

"데이트라니. 그녀는 이번에 협력하기로 한 회사의 중역이고 우린 사업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브루스의 답변에 제이슨이 기가 차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멀리서 본 여자의 표정은 조금도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 참나. 분명 나중에 애프터 신청 올걸요. 나중에 둘이서 사적으로 만날 수 있겠냐는 둥,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둥 어쩌고 저쩌고. 저기 앞에 있는 아이스크림 트럭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제이슨이 말하기가 무섭게 브루스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브루스가 핸드폰을 꺼내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 참."  

제이슨은 곁눈질로 브루스의 핸드폰 액정을 슬쩍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사심이 잔뜩 들어간 다음 약속에 대한 문자였다. 다음 번에 자기가 잘 아는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으니 거기서 보고 싶다며 대놓고 관심을 표출하는 내용에 제이슨은 거보라는 듯 다시 한번 하, 하고 비웃음 비슷한 소리를 흘렸다. 브루스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무시해버리려는 듯 핸드폰을 도로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려다가 결국 다시 꺼내서 예의바르게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걸 보며 제이슨이 이죽거렸다.  

"사회인은 거참 할 것도 많네요, 그쵸? 회사 일에다가 추근대는 여자 퇴치까지. 바쁘기도 하셔라."  

"다 결국 해야하는 일이니까."

담담하게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브루스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걸려있었다. 그는 곧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평화로운 공원의 모습과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쨌든 네 말이 맞긴 했구나. 음, 아이스크림 트럭은 못 사주겠지만, 아이스크림 정도는 지금 사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예상치 못한 제안에 제이슨이 눈을 크게 뜨고 브루스를 쳐다보았다. 브루스도 조금 민망한 듯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제이슨은 잠시 고민하다가, 툭 내뱉듯이 대답했다.

"까짓 거 그러죠, 뭐."  

 

 

 

분명 처음 만남은 공원이었으나 그들은 이제 빌딩의 옥상에 와 있었다. 그들은 한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든 채 옥상 난간에 앉아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로 고담의 스카이라인이 그대로 보였다. 제이슨은 하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으면서 투덜거렸다. 이래서 유명인이랑 있으면 불편하단 말이야. 분명 그들은 그냥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으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그런데 브루스랑 같이 아이스크림 차 앞에 서 있는 내내 주위의 시선이 '어머, 저기 브루스 웨인이다'같은 수군거림과 함께 달라붙는 것을 제이슨은 견디지 못했다. 브루스는 이런 것에는 익숙한 모양이었지만-물론 그는 '그' 브루스 웨인이니까-제이슨은 자기가 구경거리라도 된 듯한 느낌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는 브루스에게 짜증을 내며 제발 어디 당신을 원숭이처럼 보는 사람이 없는 데로 가자고 말했고 그래서 그들이 결국 도달한 곳은 웨인 그룹 빌딩의 옥상이었다.

"뭐, 일단 정말 사람이 없긴 하네요."

이 시간에 옥상에 올라와 있을 사람이 있을리가 없으니 말이죠. 제이슨은 만족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어조로 덧붙였다. 브루스는 아주 희미하게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제이슨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까 설마 잠깐 같이 있던 것 때문에 신문에 제 얼굴이 실리는 건 아니겠죠. '브루스 웨인 이번에는 남자와 스캔들?'따위의 헤드라인이랑 같이."

"그러면 뭐 어때서."

브루스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제이슨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브루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인간 오늘 왜 이래. 지나치게 친절하고... 또 지나치게 애인같았다. 제이슨은 경악에 가득차 브루스를 쳐다보느라 어느새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이 바람을 타고 브루스의 바지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아, 이런..."

고급스런 검은 정장 바지 위로 떨어진 하얀 자국은 유달리 크고, 눈에 띄었다. 제이슨은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문질렀다. 당연하게도 하얀 자국은 지워지기는 커녕 더 커지기 시작했다. 제이슨은 더 당황해서 이젠 아예 땅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는 좀더 문지르기 시작했다. 당연한거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다 못해 복구 불가능한 수준으로 이르렀다. 아, 망했다. 제이슨은 울상을 지은 채 끈적끈적하게 설탕물이 묻은 손가락을 빨면서 고개를 들었다. 브루스의 얼굴이 어쩐지 굳어 있었다.  

"제이슨."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건 아닌데..."

"아니, 좀... 일어나 달라고."

브루스의 말에 제이슨은 화들짝 놀라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는 브루스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끈적끈적해진 브루스의 허벅지와, 역시나 마찬가지로 끈적끈적해진 자신의 손가락과 입까지. 브루스는 차마 자신한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제이슨도 얼굴이 새빨개져서 후다닥 일어났다.  

"그, 그럼 이만 가볼게요."

제이슨은 차마 고개를 브루스에게 돌리지도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브루스도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면서 제이슨은 속으로 마구 소리를 질렀다. 아 도대체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거야!!!! 제이슨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내가 한번만 더 브루스랑 같이 노나 봐라.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벌을 받는 거야.  

 

 

옥상에는 브루스만 홀로 남았다. 그는 제이슨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그 역시 당황하는 바람에 제대로 인사조차 해주지 못했다-제이슨이 당황하는 바람에 채 다 먹지도 못하고 난간 위에 놓고 간 아이스크림의 흔적을 발견했다. 하얗고 시원하던 아이스크림은 어느새 다 녹아 물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브루스는 다시 한번,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의 바지를 내려보았다. 달콤하고 끈적한 냄새가 났다. 제이슨이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빨던 것이 생각이 났다. 당황한 눈동자도, 허벅지를 문지르던 손길도. 브루스는 다시 한번 시선을 들어 이미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나 더 사줄 걸 그랬나..." 



리퀘받아서 쓴 글. 본래 리퀘 내용은 뱃슨으로 둘이 내기했다가 슨이 진 바람에 같이 아이스크림 먹게 되어서 인적 없는 옥상 같은데 올라가서 아이스크림 먹다가 바람땜에 슨이 아이스크림이 뱃 허벅지에 뚝 떨어져서 슨이가 그거 핥아먹는거... 였는데 쓰다보니 내용이 달라짐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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