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Y.A.D.
[케인벤]너의 의미 본문
1.
죽음의 냄새가 났다. 감각을 꽉 채우는 진한 구정물 냄새와 피냄새가 뒤섞여 어느새 하나가 되어버린 냄새. 케인은 이 냄새에 아주 익숙했다. 그가 살아있던 대부분의 시간은 죽음을 향해 천천히 기어가는 과정이었으므로. 언젠가 차라리 죽었더라면 편했을 것이라고, 내뱉은 적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자신을 노려보며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지도 못한채 붙들려 기다리기만 하는 것. 발버둥치고 괴로워해도 결국엔 시궁창 속에서 죽어갈 것임을 깨닫는 순간. 살아있는 매 순간순간이 끔찍한 삶. 케인은, 케인은 두 번 다시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엔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케인은 비척거리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진득한 피가 웅덩이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터널 속으로 울렸다. 다시 한 번 걸으려고 다리를 들어올린 순간 크게 휘청였다. 케인은 힘겹게 벽을 붙잡으며 다시 섰다. 어둠이 가득한 시야 한가운데 단 한점의 빛이 보였다. 저 곳에 도착하면... 이 냄새가 나지 않겠지. 케인은 두 번 다시는 이 냄새를 맡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시간을 떠올렸다. 이제 물러선 줄 알았던 죽음은 그렇게 많은 이들을 삼키고도 또다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버려둘 순 없지. 케인은 억지로 다리를 움직였다. 빛은 여전히 멀었다.
2.
벤은 기찻길 위로 쓰러져 있는 피투성이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도 곧잘 피투성이가 되거나 혹은 다른 이를 그렇게 만들어주므로 피에 놀란 것은 안다. 그가 놀라워한 것은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넝마가 되었지만 가슴팍과 등 뒤의 문양은 분명히 거미의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 코스튬의 연원에 대해 설명해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벤은 잠자코 그를 업어들고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찢어진 마스크 아래로 드러난 남자의 머리카락은 익숙한 갈색이었다.
치료를 위해 남자의 마스크를 벗기자 어딘가 익숙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짧은 갈색 머리카락도 짙은 눈썹도, 살짝 끝이 올라간 코도 분명히 어디서 본것 같은데 본것 같지가 않았다. 벤은 남자의 얼굴에 얼룩덜룩하게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깨달았다. 피터 파커를 닮아있었다, 이 남자는. 그의 세계에선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피터 파커를.
남자의 피부는 열에 들떠 뜨거웠다. 일정하지 않은 호흡이 벤을 염려하게 했다. 옆구리에 난 큼지막한 상처는 응급처치를 해놓았지만 벤은 계속 그의 곁에서 이마의 물수건을 대주었다. 물수건은 남자의 열에 금방 뜨거워졌다. 벤은 물수건을 갈아주면서 남자의 이마를 쓸었다. 뜨겁고 젖은 피부가 손에 스쳤다. 남자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벤...." 벤은 놀라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남자가 부른 것은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다. 벤의 심장 박동이 좀전보다 빨라졌다.
3.
케인에게 벤 라일리는 누구인가, 그 질문에 답하려면 지나치게 복잡한 과거와 이미 묻어버린 시간을 들추어내야한다. 그리고, 분명 그와 동시에 밀물처럼 그를 덮칠 오래된 후회와 해묵은 증오의 찌꺼기를 케인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벤 라일리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이 그가 벤 라일리 앞에서도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오랜 시간 후 또다른 벤 라일리와 만났을 때도 그래서 그는 침착할 수 있었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니므로, 그의 앞에서 케인이 무너질 이유같은 것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것도 벤 라일리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케인은 또다시 벤을 잃어버렸으므로, 또다시.
너는 언제나 너다웠다. 케인이 기억하는 벤은, 언제나 그러했다. 케인은 언젠가의 밤을 기억한다. 그는 하수구 위에서 쪼그려 앉아 자신을 집어삼킬 어둠을 기다렸다. 살갗은 갈라져 터지고 몸은 조각조각 떨어지며 망가지고 있었다. 온몸을 기어다니는 고통마저도 너무도 익숙했다. 간헐적으로 헐떡이는 숨결이 흰 빛으로 부서졌다. 가느다란 골목의 틈으로 자동차가 도로 위를 질주하는 소리와 함께 오렌지빛 헤드라이트가 비쳤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오렌지색 빛이 한번, 두번, 세번. 그리고, 밝은 금발머리. "안녕, 케인." 케인은 핏발이 선 눈으로 벤을 올려다보았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밝은 금발머리 위로 쏟아졌다. 인공적으로 만든 빛깔인데도 꼭 진짜같았다. 아니다, 언제나 그랬다. 너는 언제나 진짜도 가짜도 상관없이 아름다웠다. 그저 숨쉬는 실패작일뿐인 자신과는 다른, 그런 존재이므로. 벤은 몸을 숙여 케인과 시선을 맞췄다. 연한 갈색의 눈동자가 케인을 바라보았다. 케인의 것과 똑같은 색깔, 그러나 전혀 다른 시선. 동그란 갈색 눈동자에 다정한 염려가 서렸다. "괜찮아?" 벤이 속삭이자 하얀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흘러나왔다. 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벤이 손을 내밀었다. 온전한 모양과 완벽하게 매끄러운 살결, 인간의 것과 똑같은 체온과 맥박과 움직임으로, 벤은 케인의 손을 잡았다. 케인은 터지고 갈라진 손끝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벤의 손은 강하고 단단하게 케인을 붙잡고 있었다. "너와 난 형제잖아." 다정한 목소리. 케인은 그 눈부신 다정함을 견딜 수 없어 괴물의 눈을 감았다. 너는 모른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
너는 홀로 빛나 이따금 나는 너를 견딜 수 없다. 분명히 너와 나의 시작은 같았을텐데도...
이따금 케인은 그때의 벤을 떠올린다. 너는 언제나 그때처럼 너다웠고, 그래서 죽음마저도 그러했다.
너는 모른다. 나는 이따금 너의 꿈을 꾼다.
4.
케인의 호흡이 문득 가빠졌다. 벤은 급히 케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곧 피와 함께 쿨럭이는 기침이 터졌다. "괜찮아요?" 남자의 귀에 어차피 들리지 않을 것을 아는데도 반사적으로 염려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케인이 가늘게 눈을 떴다. 자신의 것과 똑같은 갈색 눈동자. 벤은 놀라 멈췄다. 케인의 눈은 열기에 흐릿했다. 피부에 달라붙는 피냄새 속으로 케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벤...?" 동시에 벤의 손을 케인이 쥐었다. 손을 감싸는 강한 열기에 벤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을 마주잡아주었다. 벤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응." 그 순간 케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분명히 미소라고 부를만한 것이었다. "항상 내가 죽을 땐 널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와줄줄은..몰랐어." 그러면서 케인은 또다시 기침을 크게 했다. 입안에 고여있던 피가 또다시 함께 터졌다.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벤의 손을 감싸는 힘은 여전했다. "너는, 내가 지금껏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난 항상 네가 되고 싶었어." 케인의 목소리는 드문드문 끊어지고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케인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하나였다. 벤 라일리, 자신의 얼굴. "넌... 항상 너였으니까." 희부연 전등빛이 케인과 벤의 몸 위로 점점이 뿌려졌다. 파삭이는 전등의 불빛소리만이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채웠다. "누구의 클론이고, 누구의 실패작이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너는 너였고,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 케인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손은 벤을 붙잡고 있었다. 케인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는 것을 보며 벤은 생각했다. 이제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다고.
5.
케인은 눈을 떴다. 낯선 천장, 낯선 벽지, 낯선 창문. 케인은 벌떡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옆구리에 찢어지는 통증이 느껴져 내려다 보니 흰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빌런들과 싸웠다는 것과, 그러다 이름모를 낯선세계로 와버렸다는 것, 그 와중에서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살려고 걸어갔던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번엔 틀림없이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죽지 않았다. 그 사실에 케인은 놀라야할지 기뻐해야할지 알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 일어났구나." 낯익은 목소리. 그리고,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얼굴. 벤 라일리가 케인의 앞에 있었다. 벤은 그대로 굳어버린 케인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케인의 몸이 놀라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열은 많이 내렸나봐?" 다정한 눈웃음이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익숙했다. "어제 쓰러져 있길래 여기로 데려왔어. 일단 응급처치는 했는데 밤새도록 열이 나고 끙끙 앓아서 걱정헸지 뭐야. 그래도 넌 다행히..." "내가 혹시 어제 무슨 말 했냐?" 벤의 말허리를 끊고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케인의 얼굴은 험악하다기보다는 당황으로 가득해보였다. 벤은 음, 하고 잠깐 눈동자를 굴렸다가 대답했다. "응. 사실은... 좀 많이." 그 순간 벤은 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기, 내가 어제 한 말들은 모두..." "나한테 한 말 아니잖아, 알아." 이번에 말을 끊은 것은 벤이었다. 그의 눈매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너는 다른 세계에서 온 거잖아, 그치? 그리고 아마도 너희 세계의 벤에게 하는 말일테고." "....맞아." 케인이 짧게 대답했다. 벤은 케인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제 자신을 간절하게 붙잡던 그 열기와 압력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어서 기뻤어. 다른 세계의 벤도 분명 들었으면 기뻐했을 거야." 너의 말이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너는 모를 것이라고. 벤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의 대체품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게 얼마나 소중한 말인지. 벤은 다시 한번 케인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노란 금발머리 아래로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하얗게 웃는 너의 모습. 케인은 다시 한번 온 시선을 뺏기면서 생각했다. 너는, 여기서도 결국 너구나. 항상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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