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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A.D.
[플래시피터]sound of silence 본문
진단메이커 키워드 : 수십 개의 단어와 한 사람을 동시에 떠올리는 일 나는 아직도 이런 일을 생각한다
플래시는 무겁고 뜨거운 헬멧을 벗어던졌다. 동시에 땀냄새가 훅 끼쳐올랐다. 그는 허리춤의 수통을 더듬어 꺼냈다. 혀끝에 닿는 물은 미지근했다. 군화의 끈 사이로 자꾸 모래가 들어와 발밑에 배겼다. 그는 이미 장갑도 벗고 소매도 있는대로 걷어올린 참이었다. 뜨겁다. 그는 모래처럼 까끌까끌해진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더운 게 아니라 뜨겁다, 라고. 플래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험비라도 앞에 지나가면 좋았으련만, 그의 앞에 펼쳐진 건 그저 사람들이 놓고 간 텅빈 집뿐이었다. 사막의 열풍에 천천히 스러져 갈 운명인 낮은 흙집을 보며 플래시는 발걸음을 옮겼다. 등에 멘 군장과 총기의 무게가 자꾸 어깨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래도 부상은 안 당해서 다행이지. 이렇게 혼자 낙오되었는데 부상까지 당했어봐. 그냥 죽는 걸 기다리는 거 말고 별 수 있겠어? 플래시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걸어갔다. 난 그래도 대충 지도도 있고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은 알고 있으니까.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가늠했다. 저 먼 언덕에서부터 이어졌을 그의 발자국은 어느새 바람에 쓸려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느리게 다시금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혼자인 건 싫은데. 플래시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혼자 있으면 자꾸 온갖 생각들이 떠오른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결코 떠오르지 않는 것들. 피곤하니까, 다른 일을 해야하니까, 하고 머릿속에서 치워놓은 것들. 이를테면, 수십 개의 단어와 한 사람을 동시에 떠올리는 것.
플래시는 낡은 토담 아래에 주저 앉았다. 한움큼의 그늘이 그의 몸 위로 드리웠다. 오로지 군화의 코만이 삐쭉 그늘 밖으로 튀어나와 새하얀 햇빛을 반사시켰다. 플래시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은 땅끝에서 땅끝까지 똑같은 푸른색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온전히 햇살을 가득 끌어담는, 사막과 하늘. 이 하늘이 이어지는 곳에 피터, 네가 있겠지. 그건 정말로 쓸쓸한 일이다. 사막은 여전히 고요했다.
우주에선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고, 로켓이 말했을 때만해도 플래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냐는 질문에 라쿤은 소리는 진동이고 진동은 매개체가 있어야 하지만 우주엔 매개체가 될 대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플래시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멍한 플래시의 표정을 보며 로켓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냥 겪어보면 알거야. 너같은 놈들은 원래 몸으로 배워야하니까, 하고 욕인지 악담인지 모를 소리를 로켓이 덧붙였다. 너구리한테 지능으로 무시당하는 것도 이제는 꽤 익숙한 일이라 플래시는 그냥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라쿤이 말한대로, 우주는 정말로 고요했다. 모든 소리가 일시에 정지한 채 그 모습을 감췄다. 아무 것도 없는 별과 별 사이의 공간. 우주의 틈새로 그는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진다, 라는 것도 어쩌면 그의 착각일지 몰랐다. 이 곳에선 그의 몸을 끌어당길 어떤 별도 없다. 그저, 천천히 맴도는 것일뿐. 그의 동료들이 자신을 엉뚱한 데서 찾는 게 멀리 보였다. 어째서인지 여기 있다고, 발버둥을 치고 외칠 마음조차 나지 않았다. 어차피 들리지 않을 테니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이 아무 것도 아닌 공허 속이라면.
혼자인 것은 싫어. 플래시는 중얼거렸다. 조용한 것도 싫고. 항상 생각했던 것이지만, 그리고 항상 겪는 것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리움은 언제나 낯설게 떠오른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말들은 모두 다 너에 대한 것들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너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테지. 플래시는 새까만 별과 별 사이를, 아무 것도 없는 그 어둠을 바라보았다.
플래시는 그늘에 주저앉았다. 붉은 저녁놀 위로 푸른 그늘이 길게 늘어나 있었다. 아이들이 떠나버린 학교는 고요했다. 그토록 소란스럽던 장소가 삽시간에 침묵하며 가라앉는 순간은 참으로 낯설고 이상하다. 플래시는 대충 주머니에 구겨넣었던 휴지로 코를 닦았다. 붉은 피가 얼룩지며 번지는 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가 미식축구 연습을 하다 다친 것으로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그 착각을 바로잡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가끔은 그가 집에 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기만을 바랐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항상.
고개를 들자 학교 안에서 누군가 나오는 게 보였다. 피터였다. 또 지각 때문에 남아서 벌을 받은 모양이었다. 피터와 플래시의 눈이 마주쳤다. 피터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플래시는 그저 피터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이 순간은, 피터를 괴롭히는 것도 그닥 하고 싶지 않았다. 피터는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에 의아함과 안도를 품으며 그냥 도망가버릴 것이다. 플래시는 쯧,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 이거, 써." 작은, 하지만 또렷한 목소리. 플래시는 고개를 들었다. 피터가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플래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연한 갈색머리는 노을빛에 붉은 색이었다. 흰 얼굴 위로 비친 붉은 그림자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낙엽색 눈동자. 플래시는 손을 뻗어 손수건을 받았다.
"..아직도 손수건을 갖고 다니네." 플래시가 세제 냄새가 나는 손수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피터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깊어졌다.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들이 한때 친구이던 시절. 함께 웃고 떠들고 장난치던 시절. 언제부턴가 어긋나다가 결국엔 지금은 흔적도 없어진 그 시간. 플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터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피터의 작은 몸이 더더욱 작아지는 것을, 그래서 형체가 보이지도 않게 될 때까지 플래시는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네모나게 접힌 손수건을 주머니에 그대로 밀어넣었다.
플래시는 손수건을 돌려주지 않았다. 피터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뒤로도 그들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혹은, 그렇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너를.....
플래시는 혼자 있는 것이 싫다. 고요한 것도 싫다. 그럴 때면 언제나 그리움이, 과거가 그를 집어삼키려 다가온다. 진작에 멀리 도망가버린 주제에 계속 맴돌며 후회만을 떠올리게 만드는 오래된 시간들이, 문득문득 나타난다. 그 모든 후회와 시간을 견디고 나면... 항상 깨닫고 마는 것이다.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너라고.
진단메이커 돌린 키워드로. 저도 이게 뭔지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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