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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피터]Pictures of You 본문

글연성/마블

[스팁피터]Pictures of You

DayaCat 2015. 12. 14. 00:05

나는 이 생에서 하늘을 보았고 그것은 다만 너로 인해서였다.

-오귀스트 로댕이 카미유 클로델에게 보낸 편지 中-

 


 "-예술가에게 뮤즈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숱한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피카소의 경우 숱한 여인들과의 염문을 뿌렸죠. 그러면서 그의 창작욕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되었습니다. 또한 대표적인 사례는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이 있지요. 로댕은 카미유 클로델과 사랑에 빠지면서 이전보다 훨씬 관능적이고 대담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입맞춤>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생각하는 사람>과 더불어 로댕의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인 이것은...."


 강의실의 벽면 가득 남녀가 농밀하게 키스하고 있는 조각상의 사진이 나타났다. "...신곡의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조각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그의 조수이자 연인이었던 카미유 클로델의 사랑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교수는 이제 로댕의 작품세계와 그의 <지옥의 문> 연작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아직도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로댕의 조각상을 보았다. 연인은 흰 대리석의 손으로 서로를 간절하게 붙잡고 있었다. 한데 포개진 허벅지와 감은 눈. 그리고 연결된 입술과 입술. 그 순간 누군가 스티브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스티브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옆을 돌아보았다. 샘 윌슨이었다. 샘은 손가락으로 스티브의 노트를 가리켰다. 샘이 쓴 쪽지가 놓인 게 보였다.


 '너 졸작 준비는 다 돼가?'


 스티브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곧 대답을 쪽지에 써서 돌려주었다. '아니, 시작도 못했어.' '뭐? 네가 아직도? 이번 학기가 벌써 반이나 지났는데? 이제 슬슬 시작해야되지 않아? 난 너라면 진작에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긴 하지.' 그들의 필담은 거기서 끊겼다. 어느새 수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우르르 일어나 제각기 흩어지는 학생들 틈으로 스티브와 샘도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근데 이번에 핌 교수님이 최소한 이번 달 지나기 전에 뭘 만들지 정도는 보고하라고 했잖아, 스티브. 그건 정했어?" 샘의 말에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도 아직." 샘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아직도? 너 진짜 어쩔려고 그래?" 스티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겨울은 지나고 날카롭던 바람에도 흰 꽃잎이 한데 섞여 불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옷은 나날이 얇아졌고 캠퍼스의 나무는 연두색 이파리로 흉한 가지를 감춘지 오래였다. 잔디밭에는 학생들이 햇살 아래 게으른 고양이처럼 누워있었다. 봄이었다. "...그리고 싶은 게 없는걸." 미술대학 쪽으로 향하는 길을 한참동안이나 걷고 나서야 스티브가 대답한 말이었다. 샘이 어이가 없어 하, 하고 짧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다야? 너도 참, 졸작이라 예민한 건 이해하겠지만 너도 핌 교수님 성질 알잖아. 이번에도 늦으면 진짜 깨질걸." "핌 교수님 성질 모르면 이 학교 미대생이 아니지." 스티브가 농담처럼 웃으면서 대답하자 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어차피 스티브의 졸작은 스티브가 알아서 할 일인 것이다. 스티브는 이제 드로잉 수업에, 샘은 도서관에 가야 했다.

 그들은 미술대학 바로 앞에서 헤어졌다.


 멍하니 그늘진 계단을 올라가며 스티브는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리고 싶은게 없는걸. 그때 누군가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 스티브는 고개를 돌렸다. 한 소년-또는 청년?-이 달려오고 있었다. 잔뜩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 땀으로 젖은 희고 곧은 이마. 동그랗게 뜬 갈색 눈동자와 발그스름한 빛깔인 콧등과 볼, 그리고 살짝 벌린 입술.

 꽃잎같다.

 순간 스티브의 머릿속으로 떠올랐다가 가라앉은 단 한마디. 곧 그 소년은 그대로 스티브를 지나쳐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푸른 티셔츠 자락이 물결처럼 흩날리는 게 보였다. 소년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릴 때까지, 그리고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의 메아리가 사라질 때까지 스티브는 한참을 서있었다.



 스티브는 자리를 잡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리고 연필을 꺼내려는데 아, 이런. 심이 모두 부러져 있었다. 그는 급히 고개 숙여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곧 교수와 함께 모델이 걸어 들어왔다. 모델이 강의실 가운데에서 가운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스티브는 다듬은 연필을 오른손에 쥐고 고개를 들었다.


 하얀, 꽃잎같은 얼굴.


 그가 앞에 있었다. 소년은 의자에 앉아 몸을 살짝 비틀어 다리와 반대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조금 전보다는 정돈된 갈색머리카락 아래로 반듯한 이마가 보였다. 긴 속눈썹에 둘러싸인 연한 커피색의 눈동자가 잠시 스티브의 얼굴에 머물렀다 떠났다. "자, 이제부터 드로잉을 해보죠. 항상 말했지만 너무 지나치게 디테일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형태와 느낌을 살리면서, 알겠죠?" 교수가 말을 끝맺자 학생들이 제각기 연필을 들고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며 연필과 종이가 스치는 소리만이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스티브는 여전히 연필을 손에 든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소년을 보고만 있었다. 소년은 조금 전보다는 열기가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볼과 코끝은 여전히 발그스름한 색이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항상 그런 모양인듯 자연스러워보였다. 느슨하게 의자에 기댄 어깨에는 도드라진 뼈와 그 사이로 패인 그림자가 보였다. 소년의 길게 뻗은 목이 가느다랗게 움직이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미세한 떨림. 그 자그마한 가슴의 움직임과 그때마다 피부 위로 그 색을 달리해 쏟아지는 햇빛. 꼰 다리 사이로 보이는 섬세한 근육의 결. 스티브는 그저 멈춰있었다. 여전히 그의 손에는 길게 깎은 연필이 쥐어져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각자 자신의 스케치북과 짐을 챙기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소년도 일어나 푸른 가운을 벗은 몸 위로 걸쳤다. 스티브는 급하게 스케치북을 옆구리에 끼고 필통을 가방에 쑤셔박았다. 가방을 어깨에 반만 걸치고는 급하게 소년에게 달려갔다. "저, 저기요!" 스티브가 외치자 소년이 얼굴을 돌렸다. "어, 저... 혹시 괜찮다면 핸드폰 번호 알려줄 수 있어요?" 아, 이런. 스티브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제멋대로 움직여 문장을 종결시켜버렸다. 소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명히 당혹감이었다. 스티브는 급하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 아니 이상한 의미가 아니예요. 저는 지금 졸작을 해야하는데 모델을 구해야하거든요. 혹시나 모델이 되어줄 수 있나 싶어서..." 변명하듯 급히 주워삼기는 말을 멈춘 것은 소년의 웃음이었다. 갈색 속눈썹이 포개지며 깨끗한 호선을 그렸다. 동시에 터져나오는 청량한 웃음소리. "아하하.. 뭐야, 전 또 저한테 관심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랬네요." 소년의 목소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맑았다. "좋아요." 소년의 시원스럽 대답에 더 놀란 것은 스티브였다.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는데. 피터는 스티브의 핸드폰에 자기 전화번호를 찍어서 돌려주며 말했다. "저 근데 아직 고등학생이라서매일은 못해요. 일주일에 두세번 정도? 그것도 학교 끝나야 되구요. 그러니까 미리 연락해요, 아참, 모델비는 줄 거죠?" 그러면서 씨익 웃는 피터의 얼굴에 스티브도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강의실에는 그들 둘만 남아있었다. 이제는 정말 떠나려는 듯 몸을 돌리던 소년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참, 제 이름은 피터 파커예요. 그쪽은..?" 피터, 파커. 단순하고 외우기 쉬운 이름이었다. "내 이름은... 스티브 로저스." 소년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스티브. 다음에 연락해요, 알겠죠?" 그러면서 소년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처음에 보았던 그때처럼, 푸른 잔상만을 남기며.

 


 초인종 소리에 스티브는 용수철처럼 소파에서 튀어올랐다. 급히 달려가 문을 열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 나타났다. "오랜만이에요." 피터는 환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스티브가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바로 연락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됐네요." 그들이 번호를 교환한지 삼일이나 지나고 나서야 스티브는 피터에게 연락을 했다. 피터는 전화를 받으면서 잊어버린 줄 알았다고 농담을 했다. 스티브는 뭐라고 말해야할지 고민이 되어서 그랬노라는 말 대신 그저 짧은 웃음만을 흘렸다. 연락을 하고도 시간이 맞질 않아서 일정을 조금 조정해야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이렇게 피터는 스티브의 집으로 온 것이다. 스티브는 피터를 집안으로 안내하면서 점심은 먹었는지, 뭘 마시겠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피터는 등에 메고 있는 백팩을 톡톡 치며 말했다. "학교에서 다 먹고 왔어요. 걱정 마세요." 피터는 오늘 붉은 색 헐렁한 티셔츠에 얇은 후드집업, 그리고 낡은 청바지를 걸치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의 모습. 그러나 스티브는 저 옷 아래로 무엇이 있는지 이미 저번에 보았었다. 스티브는 다락방으로 피터를 데려갔다. 다락방의 비스듬한 지붕에는 넓은 창문이 달려있었다. 큼직한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흰 캔버스 위로 쏟아졌다. 정갈하게 정리된 팔레트와 붓, 물통 그리고 연필. "우와..." 피터는 나지막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기서 그림 그리는 거예요? 완전 멋있다! 말 그대로 '예술가의 다락방'이네요?" 피터는 성큼성큼 그 안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둘러보기 시작했다. 피터는 자기 이마에 닿을 듯 말듯한 천장을 건드리며 스티브를 돌아보았다. "나한테 여긴 딱 맞는데 당신한테는 좀 작겠어요, 그쵸? 당신은 키가 크잖아요." 오후의 햇살이 소년의 미소 위로 비쳤다. 소년의 주위로 떠다니는 먼지가 햇빛에 눈부시게 부서졌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스티브는 생각했다. 왜 난 이 소년만 보면 말을 할 수가 없을까.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라고.


 피터는 익숙한 태도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피터가 팔을 들어올리고 티셔츠를 들어올리자 스티브가 황급히 외쳤다. "아, 아니 옷은 안 벗어도 돼요!" 티셔츠에 반쯤 파묻힌 얼굴이 스티브를 향했다. "하지만 전 누드모델이고... 당신도 누드 그리려고 나 부른거 아니예요?" "아니... 아니예요. 딱히 누드를 그리려고 부른 건 아니예요." 스티브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미대를 다니면서 누드를 한두 번 본것도 아니고, 분명히 소년을 처음 만난 것도 누드인 상태였는데도. 스티브는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소년에게 말했다. "그냥, 그냥 아무거나.. 편하다고 생각하는 포즈를 해봐요. 옷은 벗을 필요 없고." 그러자 피터가 벗으려던 티셔츠를 도로 입었다. 동시에 갈색 머리카락이 풀썩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는게 보였다. 피터는 캔버스 앞에 놓인 나무의자를 돌리더니 등받이 위로 턱과 팔을 괴었다. 그는 이제 의자 등받이 위에 얼굴을 올린 채 스티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어때요?" 갈색 나무 등받이 사이로 소년의 헐렁한 티셔츠와 한껏 벌린 다리가 보였다. 되는대로 접어올린 청바지의 밑단 아래로 소년의 가는 발목과 도드라진 복숭아뼈, 그리고 까딱거리는 발가락. 스티브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그는 캔버스가 사이에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게 편하다면..." 스티브는 연필을 집어들었다. 이제 미술 시간이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 다락방에서 만났다. 피터는 아직 고등학생이고 스티브는 졸작 말고도 온갖 학교 행사에 불려다니거나 혹은 다른 과제를 하느라 바빴다. 일주일에 한번, 다섯 시간동안 그들은 다락방에서 마주보았다. 소년은 필요할 때면 침묵할 줄 알았다. 오후의 햇살은 언제나 약간 붉은 귤빛이었다. 희게 빛나는 먼지가 소년의 매끄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손가락 위로 내려앉는 것을 스티브는 보았다. 가만히 있는 것도, 가만히 있는 것을 그리는 것도 서로에게 고된 작업이므로 그들은 중간에 휴식시간을 갖곤 했다. 그때면 가벼운 간식거리와 함께 잡담을 했다. 보통은 피터가 떠들고 스티브는 듣는 식이었다. 피터는 재잘거리는 걸 좋아한다. 피터가 스티브의 집에 드나든지 하루도 안되어 스티브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쿠키와 우유를 내주었더니 자기가 고등학생이라고, 그러는 스티브도 기껏해야 자기보다 몇살밖에 안 많은 주제에 애 취급하면 곤란하다고, 한참을 떠들어대면서도 입가에 쿠키 부스러기를 잔뜩 묻히고 있었다. 덕분에 스티브는 물어보지도 않고도 피터가 어떤 사람인지, 피터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피터는 숙모와 단둘이 산다고 했다. 부모님은 기억도 안나는 시절 돌아가시고 삼촌도 돌아가신 지 몇년 되었다고 했다. 취미는 사진찍기, 누드모델 일도 사진을 찍다가 어쩌다 얻은 거라고 했다. 사진 때문에 아는 사람이 제의를 했다나. "그러는 스티브는, 어쩌다 미대에 왔어요?" 스티브는 피터의 질문에 한참동안 생각했다. "....그냥 그림이 좋아서지 뭐." 스티브가 생각하기에도 맥빠지는 대답이었다. "우와, 멋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저도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스티브는 고등학교 때 운동 안 했어요? 키도 크고 체격도 크니까 분명히 미식축구팀이 엄청 꼬셨을 것 같은데." 피터는 소파 위에 얼굴을 얹고-이 소년은 어딘가에 자기 얼굴을 얹는 걸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스티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년의 손가락이 스티브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 순간 근육이 움찔하며 긴장한 것을 소년이 느끼질 못했기를, 스티브는 마음 속으로 빌었다. "봐봐요, 어깨가 내 두배 정도 되잖아. 부러워요. 나도 이정도만 됐어도 플래시 같은 애들이 괴롭히진 않았을텐데." 그렇게 속삭이는 피터의 얼굴이 너무도 가까웠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 아래로 동그란 커피색의 눈동자가 보인다. 살짝 들린 코끝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발그스름한 빛깔. 그리고 입술은 도톰하고.... 스티브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문득 소스라치게 놀라 시선을 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피터는 여전히 재잘대고 있었다. 그마저도, 듣기 좋다고 하면 너는 믿을까. 스티브는 다시 한번 새삼스레 피터를 바라보았다. 피터가 스티브의 시선을 느꼈는지 얼굴을 들었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계속해서 바라보던 얼굴인데도 이상하게 자꾸 보고 싶다. 눈을 떼고 싶지 않다. 이상한 힘에 이끌리는 것처럼.... 스티브의 금빛 속눈썹과 피터의 갈색 속눈썹이 맞닿았다. 피부 위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과 긴장한 숨결, 그리고 입술과 입술이 연결되는 감촉. 피터의 몸이 잠시 뻣뻣하게 굳었지만 다만 그뿐, 피터는 밀어내지 않았다. 스티브의 손이 피터의 티셔츠 안으로 파고들었다. 피터의 손이 스티브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소파 위로, 천천히 두 사람의 몸이 함께 무너졌다. 여전히 오후의 햇살은 밝은 귤빛이었다.



 "그래서, 그림은 언제 완성되는 거예요?" 피터가 스티브의 금색 머리카락을 건드리면서 물었다. 소년은 처음에 봤던 그때처럼, 알몸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스티브도 마찬가지로 알몸이라는 것 정도였다. "음... 글쎄? 이번 학기 내로 완성해야하니까 이제 한달 남았나." 스티브의 말에 피터가 흐음-하면서 베개를 껴안았다. "그림 완성되면 보여줄 거죠?" 스티브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아- 치사해. 날 이렇게 부려먹었으면서 그림도 안보여준단 말이에요? 지금도 어떻게 되어가는지 하나도 안 보여주고 있잖아요! 치사해치사해-" 스티브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피터의 말대로, 그는 지금껏 아무리 피터가 졸라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창피하다고만 하고. 치. 나랑 하는 건 안 창피한가? 나는 지금 여기저기 자국 남아서 당분간 모델일도 못하게 생겼는데." 피터의 투덜거림에 스티브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이제 피터는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티브는 말없이 피터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올리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결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매끄럽게 감겼다. 스티브는 가만히 그의 이마와 입술에 입맞추며 속삭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봐." 피터의 피부 위로, 스티브의 목소리가 닿은 부분부터 조금씩 발갛게 물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 순간 스티브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또다시 피터의 어깨와 그 체온을 몸 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정력도 좋아, 하고 피터가 놀리듯이 속삭였지만 스티브가 잡아먹을 듯이 키스하는 바람에 말을 더 잇지는 못했다.



 피터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여름이 훌쩍 다가온 캠퍼스는 온통 푸르렀다. 따가워진 햇살에 잔디밭에서 뒹굴던 대학생들의 모습도 한결 줄었다. 그대신 건물과 나무 그늘만을 골라다니며 바삐 걸어가는 모습은 많이 보였다. 그 가운데 스티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피터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주위를 살펴본 다음, 미술 대학 안으로 발을 내밀었다. 스티브는 아직도 피터에게 완성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아직 제대로 마음에 들게 그려지지 않았다는 핑계를 계속해서 댔다. 하지만 스티브는 하나 간과한 게 있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스티브의 대학교였고, 그 말은 피터는 스티브의 대학교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피터는 미대 졸작 제출 기한이 언제인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피터가 알기로 그건 이미 일주일도 전에 끝나버렸다. 그러니까, 스티브는 진작에 졸작을 제출했음에도 자신한테 보여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럴 거라면 나도 생각이 있어. 피터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냥 내가 가서 보면 될 거 아냐. 피터는 복도에 줄지어 늘어선 미술 작품을 노려보았다. 그가 찾을 것은 하나였다. 제출자 명 '스티브 로저스'.



 스티브는 커다란 스케치북을 고쳐 들면서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특히 피곤했다. 이제 학기말이 다 되어가니까 기말고사에다 레포트에다 정신이 없었다. 거기다 다들 성실하고 올바르며 누구에게나 착한 스티브 로저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이것저것 부탁하기 바빴으므로, 그것을 들어주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지독하게 피곤했다. 하지만 내일은 피터를 만나는 날이다. 그걸 생각하자 스티브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스티브의 걸음이 빨라지고 이제 그의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집 현관에 웅크린 누군가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피터였다.


 "왜 날 그리지 않았어요?" 급하게 뛰어온 스티브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피터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오늘, 너무 궁금해서 훔쳐보러 갔었어요. 사실 제출기한이 저번 주였던 거, 저 다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자꾸 안 보여주고 감추려고 하니까... 뭘 어떻게 그렸길래 저러나, 싶어서 몰래 구경하러 갔었죠. 그런데..." 피터의 갈색 눈동자가 스티브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향했다. "왜 날 그리지 않았어요?" 스티브는 대답하지 못했다.


 복도에 걸려있는 그림은 분명히 피터가 아니었다. 만일 그게 정말로 피터라면 피터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피터는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한번 그 그림을 보았다가 밑에 걸린 이름을 보았다. 분명히 그곳에 적힌 이름은 스티브 로저스였다. 피터는 다시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스티브 로저스에게 묻고 있었다. "그냥, 나한테 접근하려고 그런 거예요? 그런 거라고 해도 상관없으니까 솔직히 말해줘요. 왜 날 그리지 않았어요?" 피터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단호했다. 스티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한건 아냐. 졸작을 다른 그림으로 제출한 건...." 스티브는 잠시 망설였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이리 와봐. 완성되기 전까지는 정말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스티브는 열쇠로 문을 열고는 불이 꺼져 어두운 집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피터가 조심스레 그 뒤를 따랐다.


 스티브가 도달한 곳은 언제나 그들이 마주보던 다락방이었다. 스티브는 불을 켜고 한쪽으로 치워진 이젤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위에 놓인 캔버스를 들어서 피터에게 보여주었다. "이거야."


 캔버스 안에는 피터가 있었다. 캔버스 안의 피터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캔버스 밖의 피터를 향해 시선을 맞추었다. 몸 위로 흐르는 햇빛이, 따스하게 정지된 시간이, 색색의 물감 위로 고인 정적이, 보였다. 그 위로 하얗게 피어나는 꽃잎과, 꽃잎... 스티브는 한숨을 쉬었다. "이걸 누군가에게 과제처럼 제출하기는 싫었어. 그래서 졸작에는 엉뚱한 걸 낸거야. 그리고 미완성이라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야. 완성되면 너에게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네." 스티브는 어깨를 으쓱했다. 피터는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뚫어지듯이 그림을 바라보던 시선이, 스티브를 향해 움직였다. "이거였군요." "응, 아직 미완성이지만..." "고마워요." 피터의 목소리에는 아주 옅은 물기가 배어났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 스티브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곧 피터는 스티브의 앞에 서서, 다시 한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스티브도 그를 향해 손은 뻗었다. 겹치는 체온이 아득하리만치 뜨거웠다. "날 그려줘서 고마워요," 작은 다락방에서 흐르는 시간, 그 한가운데서 피터가 속삭였다. 스티브도 피터를 껴안으면서 대답했다. "나도 그래, 피터." 널 그릴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10,000명 이벤트로 받은 무료 커미션 글입니다. 소원님의 리퀘였어요. 쓰면서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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