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Y.A.D.
[플래시피터]여름밤 본문
여름밤의 전화는 낯익은 번호로부터 온것이었다. 피터는 전화를 받으면서 액정의 숫자를 쳐다보았다. 새벽 세시 이십칠분, 전화하기에 썩
좋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뉴욕은 연일 며칠째 유례없는 폭염으로 밤이고 낮이고 할것없이 도시 전체가 뜨겁게 달아오른 채였고,
한낮 내내 달궈진 공기는 밤이 되어도 식질 않았다. 그 덕분에 사람들의 외출도 감소하고, 심지어 빌런들과 범죄마저도 감소한
덕분에 피터 역시 요 근래 밤이 되어도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잠을 자자니, 너무 더웠다. 그래서 피터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헤이, 피터~!" 비틀거리다 못해 끝이 꼬부라진 목소리였다. 목소리에 한껏 묻어있는 취기에 피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플래시, 너 술 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수화기 너머로 플래시가 잠시 움찔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그는 넉살좋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내가 오늘 술을 마신건 그럴만한 일이 있어서야. 물론 나도 네가 날
걱정하는 건 알지. 하지만 오늘 딱 한번뿐이고... 그리고, 피터, 난 지금 네가 진짜 진짜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그건 그냥 잠시
놔두면 안될까?" 한참동안 주절거리던 플래시의 어조가 마치 애원하는 것처럼 달라지자 피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짧게
웃어버렸다. "참나,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플래시의 목소리가 한톤 낮아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속살거리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 휠체어가 망가졌어."
플래시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조각으로만 남은 하늘은
검푸른 빛깔이었다. 밤에도 가득한 도시의 불빛 때문인지, 하늘의 별빛은 그저 몇개의 흔적으로만 보였다. 플래시는 넓게 펼쳐진
사막의 밤하늘을 생각했다. 건드리면 모래언덕 위로 별빛이 흘러 넘칠것만 같던 그 하늘을. "이렇게도 다르면서 어떻게 더위는
똑같은지." 플래시는 낮게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입가엔 술취한 미소가 여전히 어려 있었다. 플래시는 몸을 뒤로 기댔다. 휠체어의
등받이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나가던 행인이 그 소리에 플래시를 쳐다보자 플래시는 손을 들며 씨익 웃어주었다. "걱정
말아요. 친구가 오기로 했거든요." 묻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는 플래시의 목소리에 행인은 주춤거리더니 곧 달아나버렸다. 가버리라지.
붙잡지 않아. 누굴 향해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속으로 플래시는 중얼거렸다. 멀리서 차가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이라
질주라도 하는 모양인지 빠르고 세찬 소리였다. 저 차가 여기 온다면 난 그대로 치여 죽겠군.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떨어지면서
시멘트 바닥에 머리가 깨져서 죽겠지. 플래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깨진 보도블럭에 끼여버린 휠체어를 한두번 두드렸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임마." 휠체어는 대답이 없었다.
플래시는 곧 지루해진 듯 고개를 들어올렸다. 검은 하늘과, 한층 더 검은
건물의 실루엣 속으로 흐릿한 불빛들이 하나둘씩 꺼지는 게 보였다. 어둠이 선선한 공기 위로 먹먹하게 내렸다. 귓가에 내내 맴돌던
도시의 소음도 어느 순간 멎어있었다. 오래 전 머나먼 사막, 시야의 끝과 끝까지 뻗은 지평선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플래시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기다리는 것은 힘든 일이야.
알 수 있는 게 이렇게 막연한 희망밖에 없을 때는, 더더욱.
피터의 흰 이마에는 땀방울이 살짝 맺혀 있었다. 그는 곧 손으로 헝클어진 앞머리와 이마를 쓸어올렸다. 플래시는 피터의 그림자가 길의
끝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올 때부터 그인 것을 알아보았다. 흐릿한 귤빛 가로등빛을 뒤로 한 피터의 몸이 자신을 향해 내딛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플래시는 말하는 대신 그저 웃으며 말했다. "와줬구나, 피터." 피터는 급한 손길로 플래시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휠체어가 어떻게 고장난거야?" 플래시는 말없이 아래를 가리켰다. 부서져서 움푹 들어간 보도블럭의 틈새로
옴짝달싹할 수 없이 끼어버린 휠체어의 바퀴가 보였다. "여기서 억지로 빼내려고 낑낑대고 있는데 뭐가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더이상 움직이질 않더라고." 그렇게 말할 때마다 플래시의 입에선 진한 술냄새가 풍겼다. 피터는 몸을 숙여서 휠체어 바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얇은 옷 아래로 둥글게 구부린 어깨와 등의 선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거, 바퀴살이 부러졌네.. 고칠수 있을지
모르겠어. 일단 한번 해볼게." 중얼거리는 피터의 목소리가 여름밤의 바람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플래시는 들었다. 세상은 여전히
한없이 고요하고 어두운데, 피터가 여기 있었다. 모든 소리와 색과 움직임을 만들어내며, 한없는 상냥함으로.
"피터, 너는 왜 내 친구인거야?"
플래시의 물음은 텅빈 공기 속에서 뚜렷하게 울렸다. 아무런 예고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피터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을 때 처럼 동그란 모양이었다. 플래시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놀라지 마. 이상한 말
아니니까. 그냥, 난 널 많이 괴롭혔었는데도... 왜 네가 나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 내가 만일 너였다면
나같은 놈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모르는 체 했을걸." 곧 피터의 갈색 눈썹이 부드러운 모양을 그렸다. 피터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었지. 안 그랬다면 거짓말일걸?" 피터의 말에 플래시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피터도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는 여전히 손으로 휠체어 바퀴를 만지고 있었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 위로 갈색 앞머리가 흐르듯이 쏟아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너도 모르는 거겠지만, 사실 고등학교 때 네가 날 도와줬던 적이 있었거든." 피터는 그렇게 말하면서 휠체어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제 좀 괜찮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일단 임시방편이야. 자, 기다려봐." 피터는 플래시의 등 뒤로
가 힘을 주어 휠체어를 밀었다. 바퀴살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보도블럭의 틈새에서 빠져나왔다. "역시 너다, 피터.
고마워." 플래시가 큰 손으로 피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피터는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별거 아닌데 뭐." 술기운 때문인지,
그렇게 말하는 피터의 미소에 심장이 아팠다. 곧 피터는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밀기 시작했다. 잠든 도시 위로 보도블럭과
휠체어 바퀴가 덜덜거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잔상처럼 따라오는 소리와 함께 가로수의 진한 이파리 냄새가 공기 한가득
밀려들어왔다.
"저기, 피터. 그런데 내가 널 도와줬다는 게 무슨 소리야? 난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는데." 플래시의 말에
피터가 약하게 웃었다. "너는 모를거야. 그냥, 누구도 날 믿지 않을 때 너만은 날 믿어줬다는 것만 말할게." 피터의 말에
플래시가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며 볼멘 듯이 내뱉었다. 하지만 여전히 피터는 대답 대신 의문같은 미소만 띠며 계속해서 플래시의
휠체어를 밀었다. 덜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밝은 여름밤의 어둠 속으로 그들은 그렇게 계속 계속 걸어갔다.
내가 쓰는 플래시피터는 거기에서 거기인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한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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