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Y.A.D.
[플래시피터]별의 기억 본문
오랜만이야, 피터. 잘 지내? 뭐, 너야 항상 뉴욕을 지키느라 바쁠 것 같지만. 메리제인은 어떻고? 그 매력적인 미소는 여전한가? 나는 아직도 너희 둘이 깨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하지만 너야 이상하게도 항상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니까, 아마 또 다른 여자를 금방 사귈 수 있겠지.
나는 지금 우주야. 지구에선 3억 광년 정도 떨어진 곳이라고 하더라. 어마어마한 거리지?
빛이 3억년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도 와닿지가 않는 단위야. 마치 km를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데, 사실은 엄청난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잖아. 로켓이 설명해주기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별의 빛을 지구의 사람들이 보게 되는 건 3억년 뒤라는 뜻이라더라. 너는 결코 그때까지 살 수 없을테니, 내가 서 있던 별의 빛을
볼 수도 없겠지. 조금은 아쉬워.
어제는 잠시 낯선 행성에 불시착했어. 엔진이 고장났거든. 피터는 왜 엔진은 꼭 아무 것도
없는 데서 고장이 나냐고 투덜거리... 아, 그래. 이것부터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지금 내 동료들 중에서도 이름이 피터인 사람이
있어. 지구 출신이야. 피터 퀼. 너와는 비슷하면서도 달라. 그 사람은 키도 크고 금발에 나이도 나보다 많거든. 하지만 소중한
장소와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것 같아. 그래서 가끔 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널 떠올릴 때가 있어.
아니, 정확히는 항상 떠오른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어제 잠깐 들렀던 행성은, 퀼이 투덜거린 대로 정말 아무 것도
없었어. 생명체라고는 살지 않은, 그저 얼어붙은 하얀 산만이 마찬가지로 하얀 지평선 위로 드문드문 보였어. 그리고 연한 청록색
하늘이 끝없이 이어졌어. 구름조차 떠다니지 않는, 청록색 하늘이라니. 넌 상상할 수 있어? 난 그런 건 태어나서 처음 보았어.
우리는 얼음이 바삭바삭 밟히는 대지 위로 내려앉았지. 그리고 로켓이 수리를 하는 동안 나는 그저 주위를 바라보았어. 땅은 엷은
얼음으로 덮여 온통 흰 색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얼음이 부서지고 녹으면서 노란 땅이 드러났어. 추운 행성이라 바람은 차갑고
싸늘했지만 그럭저럭 견딜만 했어. 뉴욕의 가장 추운 겨울날이랑 비슷한 온도였달까? 가모라가 이런 데는 무인 행성이라고 부른다고
말해주었어. 우주엔 이런 곳이 숱하게 널려있다고. 물론 생명체가 살지 않는다고 다 무인 행성인건 아니고, 생명체가 충분히 살 수
있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살지 않는 행성만 그렇게 부른다는 거야. 처음부터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행성은 아예 그렇게
부르지도 않는다더군. 왜 그런 무인 행성이 생기냐고 물었더니,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 아무도 모른대. 본래는 생명체가
있었다가 무슨 이유로든간에 모두 멸종해 버린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건지...
확률적으로 보면 이런 무인
행성이 생길 일은 매우 적지. 하지만 우주는 정말 넓어서, 지나치게 넓고 넓어서 그런 희박한 확률의 무인 행성조차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거야.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정말 내가 얼마나 넓은 곳에 와 있는지 실감을 해.
사막에 갔을 때조차 그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사실, 사막에 갔을 때는 그저 멍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모래바람은 끝없이 몰아치고, 햇빛은 뜨겁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고. 그저 열기만이 온통 공기 속에 가득해서 숨쉬기조차 힘들었거든. 무거운 군장을 지고 멍하니 발걸음을 옮기기만
했어.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었어. 선명한 파란색의 하늘과, 샛노란 사막이 나란히 수평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모습은.. 그나마 그
길고 긴 이라크 생활에서 제일 좋았던 기억이야.
그 무인 행성도, 그런 기분이었어. 그곳은 추운 겨울 행성이었지만. 아마
지나치게 조용해서 그랬나봐. 정말 모든 것이 너무 지나치게 고요해서, 이따금 귓가에 윙윙대는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을
수가 없었거든. 우리들이 말하는 소리만이 그저 공기 속에 덩그러니 떠다니는 느낌이었어. 이 세상에 정말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더라. 하지만 아름다웠어. 정말이야. 구름조차 떠다니지 않아서, 마치 내가 청록색의 하늘에 귀까지 잠긴 것만
같았어.
그런데 말야, 피터.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두고 온 것들에 대해 떠올리게 돼. 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이건
미련은 아니야. 그렇다고 후회도 아니지. 그저 문득문득 떠오르는 거야. 지금 이 순간, 피터 네가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라든가. 혹은, 뉴욕의 하늘은 지금 무슨 색일까, 그런 것 따위 말야. 왜 그런지 생각을 해봤는데, 글쎄, 나도 확실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여기 있을 거라는 걸, 난 예전엔 결코 몰랐기 때문인 것 같아.
고등학교 때, 나는 내 미래가
명확하게 보였어. 나는 대학교에 선수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뒤 대학 미식축구 팀에서 주전으로 4년간 뛰겠지. 그리고 프로로 입단할
거야. 운이 좋다면 스타 플레이어를 노려볼 수도 있을 거고. 그러다 30대 중후반쯤엔 은퇴해서 아마 코치같은 것이 되겠지.
그때쯤이면 난 캘리포니아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햇빛이 좋은 곳에 집을 사서 정착할 수도 있을 거야. 고등학교 때 내 눈엔 그외의
길은 보이지도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는 거였어. 난 그때 너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평생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
때는 네가 스파이더맨인 것도 전혀 몰랐고 말이야.
그런데, 봐. 지금 나는 우주에 와 있어. 두 다리는 잃었지만 그 대신
다른 것을 얻었지. 그리고 너는 이제 내 친구야. 둘도 없는 친구. 이런 걸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세상 일은 뜻대로
안된다는 뻔한 이야기?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누구에게나 예정과 다른 삶을 살 기회가 찾아오는데 난 그걸 잡아챈 거야. 내
경우엔 스파이더맨이겠지. 내게 정말로 영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그래서 날 입대하게 만들었던 스파이더맨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 네가 쑥스러우려나? 그런데 뭐, 사실이니까. 안 그래?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인 거야. 날 이라크에 보내서 사막을
보게 하고, 두 다리를 잃게 하고, 베놈이 되게 하고, 마침내 우주에 서게 만든 그 모든 것. 그 모든 것의 시작이 지구, 뉴욕에
있는 너인거야. 그래서인가, 자꾸 네가 생각나는 거야. 네가 생각나면 메리제인도 생각나고 해리도 생각나고 베티도 생각나고,
그리고 그웬도 생각나지. 그러면 자꾸 내가 두고 온 것들이 생각 나. 내가 떠나온 것들, 내가 포기했던 것들, 혹은 영영 잃어버린
것들.
너는 언제나 뉴욕에 있겠지. 넌 정말 그곳을 사랑하니까. 나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사실, 어떻게 거길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뉴욕인데. 하지만 가끔은 그저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 내겐 뉴욕이
그런 거야. 그리고 사실 난 조금도 그 곳을 걱정하지 않아. 네가 있잖아. 우리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 네가 언제나 그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 내가 모든 것을 놓고 떠나도, 넌 언제나 그곳에서 그 모든 것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아, 음성 메세지 제한 시간 다 되어간다. 더 이상 하면 용량이 너무 커져서 빨리 보낼 수가 없대. 여기서 끝내야겠다.
어쨌든, 잘 지내, 피터. 히어로 활동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다가 나처럼 다치지는 말고.
플래시는 스크린의 버튼을 눌렀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음성녹음이 멈췄다. 플래시는 초록색으로 빛나는 화면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뻗어 음성 메세지 삭제 버튼을 눌렀다. 플래시는 파일이 완전히 삭제되었다는 메세지가 뜰 때까지
화면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동시에 그는 낮은 한숨을 토해냈다. 어쩐지 울고만 싶었다.
아아, 피터. 네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너는 정말 평생 모를거야.
플래시는 다시 한번, 마른 눈을 비볐다. 마찬가지로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제가 며칠전에 플래시피터 당분간은 안 쓸것 같다고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그 말 취소하겠다고 합니다.
으으 플래시피터 너무 좋아요 엉엉어엉ㅠㅠㅠㅠㅠㅠ 이 농약 같은 커플링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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