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Y.A.D.
[연반뎀딕]감기 본문
문은 소리없이 열렸다. 어두운 방안에는 탁자 위의 주황빛 작은 등만이 엷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발그스름한 빛 아래에서 보이는 딕의 얼굴은 한층 더 붉었다. 자그맣게 콜록이는 기침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데미안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소리에 딕은 얼굴을 들었다가 데미안을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딕은 침대 위에서 무릎을 세워 앉은 채 이불을 끌어안고 있었다. 동그랗게 구부러진 등은 유달리 작은 느낌이었다. 딕은 다시 한번 약한 기침을 내뱉고는 가늘게 쉰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왜 온거야?
-뭐긴 뭐야, 네 기침 소리가 복도까지 다 들리니까 그렇지.
데미안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딕의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딕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크고 두꺼운 데미안의 손은 어린 딕의 얼굴을 다 덮을 것만 같았다. 딕은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데미안의 손은 의외로 서늘하고 기분좋은 감촉이었다. 데미안이 손을 떼자 딕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데미안은 다시 한번 혀를 차면서, 완전 불덩이구만, 하고 중얼거렸다.
-알프레드가 너한테 약 줬잖아. 그거 먹고 자는 줄 알았는데.
-자다가, 목이 아파서 깼어.
마치 무어라도 목에 걸린 듯,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딕은 말을 하고 나서도 기침을 한참동안 했다. 기침을 할 때마다 동그랗게 말린 몸이 작게 흔들렸다. 데미안은 잠시 말없이 딕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이렇게 심한 감기가 들린 건지, 폴짝폴짝 잘도 뛰어다니던 작은 소년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데미안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딕은 예상치 못한 데미안의 손길에 살짝 몸을 떨었지만 그 손길은 부드러웠다.
딕은 조금은 의아한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사실 그다지 살갑지는 않은 성격이었다. 그는 이미 브루스를 대신해서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았고, 이미 반쯤은 웨인 가의 가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딕은 팀이나 제이슨에게는 거리낌없었지만 데미안은 언제나 조금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의 데미안은 아픈 동생을 보고 난감해하는 평범한 형처럼 보였다.
곧 데미안은 딕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렇긴 하지만 내밀어진 이 손을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 그대로 그는 일어섰다. 딕의 시선도 덩달아 올라갔다.
-뭐야?
-빨리 자라, 얼른 낫게. 난 이제 갈거니까.
-에게, 그게 뭐야.
딕은 아픈 것도 잊고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 반응에 데미안이 눈썹을 잠시 꿈틀거렸다. 평소 딕이 이렇게 굴 때면 데미안은 난폭한 눈빛으로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곤 했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어쨌든 아픈 애를 윽박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물론 딕은 그 와중에도 평소의 눈빛이 아주 짧은 순간 스쳐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결국 데미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냥한 대답을 해주었다.
-왜, 그럼 뭘 바라냐?
-목이 아파서, 잠이 안 온단 말야.
-그런데?
딕은 발그스름한 얼굴로 배시시 미소지었다. 데미안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그러니까, 자게 좀 도와줘.
-토끼는 당근을 들고 깡총깡총 뛰어갔습니다. 새앙쥐는 그런 토끼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토끼야, 토끼야,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니?
-새앙쥐가 말하는 게 무서워.... 토끼 때려잡을 것 같아....
딕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목도 잔뜩 쉰 주제에 쫑알쫑알 잘도 말하는게 짜증이 나서 데미안은 딕을 노려보았다. 딕은 마치 거북이처럼 몸을 움츠리며 얼굴을 이불 아래로 숨겼다. 하지만 빼꼼 드러난 파란 눈은 재밌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데미안은 조금 전까지 느꼈던 동정이 놀라울리만치 빠른 속도로 증발되는 것을 느꼈다. 딕이 읽어달라고 부탁한 책은 아무리 딕이 어리다해도 이런 걸 읽을거라 여겨지지 않는 책이었다. 화사한 삽화에 큼직큼직한 글씨, 빳빳하게 코팅된 종이와 커다란 크기의 책은 암만 봐도 5,6세의 유아들이나 읽을 법한 책이었다. 데미안은 책을 받아들때부터 이상한 기분을 느꼈지만 한줄한줄 책을 읽어나갈 수록 더 기분이 오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거 아무리 봐도 놀려먹는 것 같은데. 게다가 분명히 아프다는 놈이 어느새 쌩쌩해져서-여전히 콜록대고는 있지만-꽁알꽁알 잘도 지껄이고 있는 게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수상했다. 거기다 동화책을 읽어줄 수록 잠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점점 더 똘망똘망해지는게 잠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결국 데미안은 동화책을 그대로 덮어버렸다. 딕이 실망스러운 듯 어어, 하고 낮게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런 딕의 반응을 무시했다.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성큼성큼 딕의 방을 나갔다. 곧 그는 두꺼운 책을 하나 손에 들고 돌아왔다.
딕은 눈을 동그랗게 굴리며 데미안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데미안은 그가 언제나 짓는 오만하고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딕을 내려다보았다.
-이거면 분명 5분 안에 잠들테지.
-무슨 책인데?
데미안이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이번에 불길한 기운을 느낀 것은 딕이었다.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2012년도 연간 사업보고서 모음.
딕은 잠시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 나 열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잘 됐네. 얼른 자라는 계시야. 데미안은 여전히 미소를 입가에 띤 채 그대로 앉았다. 실수로라도 남의 발등 위에 떨어트리기라도 한다면 상해죄로 고소당해도 할말이 없을 듯한 책의 두께에 딕은 입을 살짝 벌렸다. 데미안은 웨인 가의 자선 무도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혹은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빌딩에서 회의를 소집할 때 처럼 당당하고 오만하며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책을 펼쳤다.
-어디 보자, 그럼 신규사업 부문부터 시작할까.
딕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데미안은 너무나도 즐거워졌다.
-금번에 개발한 새로운 제조공법을 도입시 얻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금액은 약 4억 5천5백만 달러에 달하며 특히나 그 공정의 단순화로 인한 이익은 단순 추산만 해도 약 3억 달러가 넘는.....
한참을 깨알처럼 작은 글씨를 읽어가던 데미안은 문득 아까부터 기침소리가 들려오질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대신 새근대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데미안은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눈을 꼭 감고 입을 살짝 벌린 채 잠이 든 딕의 모습은 무척이나 평온해보였다. 얼굴에는 여전히 발그스름한 기운이 남아있었지만,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다 낫겠지. 데미안은 다시 한번 딕에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 전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얼른 나아라.
얼른 나아서, 평소처럼 고담 시 위를 신나게 날아다녀야지.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다정한 미소를 눈에 머금으며 깃털처럼 부드러운 딕의 머리카락을 다시 한번 쓰다듬었다.
리퀘 받아서 쓴 글인데.. 정작 리퀘한 사람이 안 찾아감ㅋㅋㅋㅋㅋㅋㅋ 연반 뎀딕으로. 받은 시츄에이션은 감기걸린 딕 옆에서 책 읽어주고 잠들때까지 지켜주는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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