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ㄷ혼놀판에서 풀던 거 완결하고 가져옴. happily never after 라는 노래를 브금으로 깔고 싶었으나 저작권 의심 어쩌고 저쩌고가 떠서 걍 포기. 진단메이커 돌렸더니 악연/진수성찬/장난 이라는 키워드가 나와서 쓰기 시작했는데 어째선지 마구마구 길어진데다 쓰다보니 키워드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진 것이다..ㅋㅋ
비가 내렸다. 어둡고 타락한 도시 위로 내리는 비는 거무죽죽한 빛깔을 띄었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는 음산한 빌딩 사이를
꿈틀거리며 기어다녔다.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색깔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를 딕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보아왔던 것처럼 익숙했다. 몇 년만에 돌아왔는데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도시를, 딕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은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변하기를, 변하지 않기를? 스스로도 알 수 없었기에 그는 고개를 들어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아래로 누군가가 커다랗고 검은 날개를 펼치고 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그가 기다려왔던 것이었다. 딕의 입가에 약한
미소가 걸렸다.
당신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요.
딕의 말에 브루스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듯도 보였다. 하지만 카울 뒤에 가려진 눈은 감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딕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나를 용서할 거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왔으면 뭐라고 말은 해주세요. 딕의 웃음기 섞인 말에도 배트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와 딕은 한참을 비를 맞고 서 있었다. 흐르는 빗방울이 턱끝에 매달렸다 가슴팍으로 똑, 똑 떨어졌다. 브루스가
입을 열었다.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역시도요.
딕이 미소지었다. 배트맨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이었다. 그는 말없이 망토를 휘두르더니 로프와 함께 빌딩 사이로 사라졌다. 하지만 딕은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자신을 어디로 초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딕 도련님.
정중하게 말하며 허리를 숙이는 알프레드의 모습도,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다만 거의 없는 머리카락 중에서도 흰
머리카락이 늘어난 것이 유일한 변화랄까. 딕은 마치 오늘 아침 떠났다 돌아온 사람처럼 익숙하게 인사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알프레드.
딕이 안내된 곳은 다이닝 룸이었다. 딕과 브루스, 팀과 데미안, 그리고 제이슨이 곧잘 앉아서 식사하곤 하던 길고 새하얀 식탁
위로 김이 오르는 따스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딕은 알프레드가 빼준 의자에 앉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식기와 잔을 살펴보았다.
고풍스러운 골동품 식기들도 여전했지만 어쩐지 색이 조금 바랜듯도 싶었다.
이야, 진수성찬인데요. 알프레드.
딕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을 했다. 정말 이런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된 곳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본 적이
무척이나 드물었던 것이다. 알프레도는 가볍게 고개를 숙임으로써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때 알프레드의 뒤에 누군가가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검은 머리에 훤칠하니 큰 키. 탄탄하게 균형이 잡힌 몸. 딕은 눈을 크게 떴다. 자기도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이슨...?
너 왜 여기 있어.
딕을 보자마자 찌푸려지는 푸른 눈매는 분명히 제이슨을 닮아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딕은 한참 후에서야 그의 이목구비에서 오래 전에 헤어졌던 어린 동생을 읽어낼 수 있었다.
데미안?
너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온 거야.
데미안은 한때 제이슨이 그랬듯이 낮게 으르렁거리면서 딕을 노려보았다. 못본 새에 그는 어느새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있었다.
브루스만큼이나 훤칠하게 큰 키, 단단한 근육이 잡힌 몸과 자기 아버지를 닮은 남자다운 턱선이 사뭇 낯설었다. 하지만 제이슨과는
피도 섞인 형제도 아니건만 왜 착각한 걸까. 딕은 쓰게 웃었다. 데미안은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당장이라도 딕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그의 앞에 섰다. 하지만 알프레드의 앞에서 차마 그러진 못하겠는지 쯧, 하고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알프레드에게 불퉁하게 투덜거렸다.
도대체 누가 이 자식을 데려온 겁니까?
브루스 주인님입니다.
알프레드의 대답에 데미안은 다시 한번 혀를 차며 아무 말없이 식탁에 앉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딕을
외면하고 있었다. 딕은 웃어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더 데미안을 자극할까봐 시선을 식탁으로 돌렸다. 그때 또다른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호리호리하지만 단단한 몸과 뒷덜미를 덮는 검은 머리. 딕은 반가움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팀!
팀은 움찔하며 딕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단정한 눈썹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 마치 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냉랭한 태도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어차피 모두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도망가듯이 이 도시를
떠났던 그 순간부터.
브루스는 맨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언제나 그대로일 것 같았던 그의 무뚝뚝한 얼굴도 조금씩 세월의 흔적이 슬쩍슬쩍 나타났다
사라졌다. 물론 그것이 그의 실력이 퇴보했다는 걸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딕은 잘 알고 있었다. 브루스는 말없이 식탁의 중앙에
앉았다. 딕의 맞은편이었다. 딕은 고개를 들고 브루스와 데미안, 팀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함께 앉아 있었다. 브루스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프레드가 널 위해 준비했다.
고마워요, 브루스.
데미안의 표정이 다시 한번 찡그려졌다. 그는 이 상황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딱딱하고
차가웠다. 불편하고 차가운 침묵이 그들을 짓눌렀다. 데미안이 결국 참지 못하고 포크를 세차게 내려놓았다. 쨍그랑! 하고 날카롭게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도대체 저 놈을 왜 여기 데려와서 같이 식사 따위나 하고 있어야 하죠?!
데미안, 그만 해라.
브루스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그 음색에서는 위압적이라기보다는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다. 데미안은 브루스의 말을 무시하며 고개를 딕에게로 돌렸다. 그의 시선에서 딕은 오래된 분노를 읽었다. 데미안은 이를 갈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뇨, 뭘 그만 하라는 거죠? 어떻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나요?
데미안.
저 자식은 제이슨을 죽였다구요!
데미안은 벌떡 일어서며 딕을 가리켰다. 분노로 손가락 끝이 조금씩 떨리는 게 보였다. 딕은 포크와 나이프를 정리하고 냅킨을 접어 잘 먹었다는 표시를 만들고 일어섰다. 딕의 얼굴에는 서글픈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맞아, 그랬지.
마치 스스로에게 되뇌이듯, 딕은 중얼거렸다. 미안해, 데미안, 팀. 그리고 브루스도. 알프레드도, 미안해요. 딕은 그렇게 그들을 내버려 두고 자리를 떴다.
딕. 오늘은 웬일로 여자 만나러 안 가냐?
제이슨이 소파에 드러누워있는 딕에게 마치 비웃듯이 말을 걸었다. 딕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게임기를 흔들었다. 나 지금
바빠. 그러시겠죠. 제이슨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오렌지 주스를 유리컵에 따라 들고 딕의 옆에 앉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제이슨도 어느새 시선이 게임기 화면을 향하고 있었다. 단순한 슈팅게임이었지만 제법 난이도가 높은 스테이지인지 쉴새없이 적
비행기들이 몰려들었고 딕의 손과 눈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해도 전직 로빈이며 현직 나이트윙인 딕의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은
이 정도 스테이지는 쉽게 클리어한다는 것도 제이슨은 알고 있었다. 제이슨이 오렌지주스를 홀짝이며 지나가듯 말했다.
저번에 보니 데미안이 이거 열심히 하던데.
말도 마. 팀이랑 이상한 경쟁이 붙어가지고. 지금 이거 최고기록 누가 했는지 가지고 경쟁한다니까. 하여간에 어린 놈들. 일주일 전만 해도 데미안이 1위였는데 팀이 그저께 다시 탈환했어.
그런데 너는 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냐?
제이슨의 질문에도 딕은 여전히 게임기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거? 내 게임기로 지들이 1등 먹으려고 아둥바둥하는게 꼴뵈기 싫어서! 이건 뭐래도 내꺼라고. 1등엔 내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니가 지금 데미안이랑 팀 보고 어린애라고 할 처지인 것 같지는 않은데.
제이슨이 황망한 듯 중얼거리자 딕이 씨익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어때. 제이슨도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뭐 어때.
한참동안 열심히 하다가 결국 중간에 죽어버리자 딕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으악!!! 이게 다 제이 너 때문이야! 괜히 말
걸어서 정신 사납게 해서!! 제이슨은 헛소리 하지 말라며 딕의 말을 일축해버리고는 게임기로 손을 뻗었다. 나도 해볼래. 딕은
입술을 삐죽이며 넘겨주었다. 제이슨 역시 전직 로빈답게 금방 게임에 익숙해졌다. 그는 순식간에 딕이 좀 전에 죽었던 스테이지까지
도달했다. 제이슨이 게임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딕은 갑자기 제이슨의 볼에 쪽하고 키스했다.
으악, 뭐야!
뭐긴 뭐야. 그냥 애정의 표시지.
아오 빌어먹을 디키버드 너 때문에 방금 죽었잖아!! 너 솔직히 말해! 일부러 그런거지!
제이슨이 짜증을 벌컥 내며 소리질렀다. 조금만 하면 깰 수 있었는데!! 제이슨은 게임기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딕이 키스한
부분을 마구 문질렀다. 딕은 킥킥대며 웃었다. 네가 날 추월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리틀윙. 제이슨은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듯
딕을 노려보았다. 딕은 다시 한번 제이슨의 목을 껴안고 입술에 키스했다.
..이건 뭐야?
그냥, 장난.
형제끼리 이런 장난도 하던가?
뭐 어때.
딕은 다시 한번 제이슨에게 입맞추었다. 결국 제이슨도 웃어버렸다. 그래, 뭐 어때.
희뿌연 햇살에 딕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희끄무레한 햇살이 어두운 실내에 힘없이 빛을 뿌렸다. 그 주위의 모든 것들은
낡았고 오래된 세월과 먼지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딕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들이 한없이 낯설기라도 한듯. 그는
한참 후 말없이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너무 오래된 꿈을 꾸었구나. 딕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메마르게 주위를
훑다가 서랍 위에 멈췄다. 낡고 오래된 손목시계였다. 본래는 반짝였을 은색 금속은 세월의 더께에 그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먼지낀 유리 아래에는 여전히 초침과 분침, 시침만이 지나간 시간을 모르는 듯 그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멸망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반복된 작업을 수행하고 있을 로봇들처럼, 그렇게. 제이슨에게 사줄 때, 무척이나 튼튼하고 오래가는 시계니까 너한테 꼭 맞을 거라고
했었지. 결국엔 이렇게 시계만 남아버릴 줄 알았다면... 딕은 중얼거렸다. 선물하지 않았더라면, 너를 떠올리지도 않았을텐데.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딕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를 잊을 리가 없었다. 그의 피가 자신에게 묻어있다는
것을 그는 단 한순간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심지어 지금도-
네 집은 그대로구나, 제이슨.
딕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 곳 구석구석에 제이슨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곳은 제이슨이 처음으로 마련한 세이프하우스였다.
이전에 딕이 그랬던 것처럼, 제이슨이 브루스와의 마찰로 결국 로빈을 그만두기로 했을 때 만들었던 것이었다. 제이슨은 가족
누구에게도 그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지만 딕만은 알고 있었다. 이따금 딕은 예고없이 이 곳으로 쳐들어와서 제이슨과 함께 오래된
코미디 영화를 보곤 했다. 모두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다.
딕은 말없이 얼굴을 침대 시트에 묻었다. 빛바랜 시트에서는 오래된 먼지 냄새와, 낡은 나무의 냄새가 났다. 제이슨에게서 곧잘
나던 담배 냄새와 땀 냄새는 마치 환상인 듯 사라져버렸다. 햇살에 창백하게 반짝이는 먼지들이 천천히 딕의 어깨에 내려앉으며
그에게도 세월의 더께를 덧입혔다. 그는 마치 태아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그렇게, 한참을 침대 위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제이슨의 무덤은 교외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얗고 깨끗한 대리석 묘비는 말갛게 햇빛을 반사했다. 그 아래에는 이미
누군가가 가져놓은 새하얀 꽃이 놓여 있었다. 딕은 말없이 허리를 굽혀 가져온 꽃을 그 옆에 놓았다. 붉은 꽃이 서늘한 바람에 몸을
떨며 버석이는 소리를 냈다. 딕은 중얼거렸다. 이제야 돌아왔어, 제이슨. 딕은 손을 뻗어 묘지에 적힌 글자를 더듬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자, 형제, 친구였던 제이슨 피터 토드 웨인. 브루스가 적었을 그 묘비명을 손끝으로 느끼며, 딕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내 유일한... 마지막 말은 바람에 삼켜져서 들리지 않았다.
고담의 밤은 언제나 그랬듯이 타락하고 어두웠으며 위험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음습하고 험악한 크라임 앨리를 맨몸으로
걷는 청년이 있었다. 그의 몸놀림은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듯 가벼웠다. 보통 이 거리를 무기를 품은 채 웅숭그리며 걷는 여느
불량배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어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번득이는 칼과 화약 냄새가 나는 총을 든 괴한들이 벌써 여러번 덮쳤을 법도
하건만, 청년의 옷차림은 깨끗했다. 아무도 그가 이미 서너명의 건달들을 기절 상태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청년의 새파란 눈동자는 어둠이 드리운 골목을 응시했다. 그는 비스듬히 서서 어둠을 향해 중얼거렸다.
나 보고 있는 거 다 알아, 팀.
그림자 속에서 붉은 옷을 입은 팀이 나타났다. 그는 말없이 두건을 벗었다. 그는 푸른 눈으로 자신 앞의 청년, 딕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냉막하게 가라앉은 팀의 눈은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딕 역시 언제나처럼 미소를 어렴풋하게 지었을 뿐이었다.
브루스와 데미안은?
다른 지역에서 패트롤을 돌고 있어.
그래, 그렇구나.
어색한 대화가 끊겼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할 말이 많아서, 둘 다 숨을 고르듯 단어를 골라내고
있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그러나 충분히 얼굴이 보일 만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있었다. 둘 중 누구도 그 거리를 좁히거나
넓히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팀이었다.
왜 이제와서야 돌아온거지?
제이슨의 기일이잖아.
다시 한번 대화가 끊겼다. 팀은 복잡한 눈빛으로 딕을 보고 있었다. 딕은 팀이 무엇을 생각하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팀은 다시 한번 날카롭게 물었다.
제이슨의 기일은 매년 돌아왔었어. 내 말은 왜 굳이, 지금 고담으로 돌아온 거냐고. 이제야...
잊어버리려고 하는데. 마지막 말은 팀의 목울대를 넘지 못하고 속으로 삼켜졌다. 잊어버리다니, 그건 무리였다. 그 사건이
가족에게 남겨놓은 상처는 평생 아물지 못할, 아문다 해도 커다란 흉터가 되어 따라다닐 종류의 것이었다. 그저 잊어버리고 싶은 것
뿐이라는 걸, 팀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잊고 싶지 않아서야.
딕이 대답했다. 팀의 눈이 의아함에 크게 떠졌다. 딕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딕은 씁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팀. 5년 전 그때도 똑같은 목소리로 딕은 그렇게 말했었다. 팀은 그 광경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때, 팀이 문을 열었을 때, 딕은 제이슨의 위에 올라타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제이슨의 몸이 버둥거리다 힘없이
무너져내리던 그 순간, 딕은 고개를 들었고 팀과 눈이 마주쳤다. 팀은 딕의 눈에 어린 물기를 보았지만, 동시에 빛을 잃은 제이슨의
눈동자도 보았다. 팀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딕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해, 팀.
팀은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는 그저 주춤거리며 도망치듯이 문을 닫고 나왔다. 어째서인지
보아서는 안될 장면을 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비틀거리다 결국 벽에 기대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내며 터져나오는 울음소리를 애써 몸 안에 가뒀다.
브루스와 데미안은 팀보다 조금 더 늦게 도착했다. 그들이 본 것은 축 늘어진 제이슨의 시체와 그 옆에 멍하니 앉아 있는
딕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광경을 믿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딕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제이슨을 죽였노라고 말했다. 그들은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지만, 딕은 말없이 눈이 새빨갛게 부은 팀을 가리켰다. 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은 거짓말 하지
말라며, 이런 장난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며 제이슨을 흔들었다. 제이슨의 몸은 힘없이 흔들렸다. 데미안의 손길이 점점 거세짐과
함께 그의 말도 울부짖음으로 바뀌어갔다. 이러지 마, 토드. 이러지 마... 이것도 그냥, 장난인 거지? 그렇지? 아무도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응답하는 이도 없었다. 딕은 메마른 눈길로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브루스가 경직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런 거지.
말할 수 없어요.
딕의 대답은 단호했다. 브루스는 차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 잠시 침묵했다. 데미안은 제이슨의 몸에 얼굴을 묻은 채
울었다. 데미안의 몸이 움직임에 따라 제이슨의 몸도 힘없이 흔들렸다. 낮게 히끅거리며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그들 사이를 메웠다.
딕은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해요.
누구에게? 팀은 속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그는 그 대답을 얻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때처럼, 여전히 팀은 딕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딕은 고개를 들어올린 채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조커는 여전히 여기 있지? 팀은 왜 지금 거기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대답했다. 응, 여전히
있어. 여전히 브루스는 그 자를 죽이지 않는구나. 딕의 말에 팀은 위화감을 느꼈다. 딕 역시 브루스 만큼이나 살인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어투는 마치 브루스가 그를 죽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딕은 마치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5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겠지.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어. 딕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팀은 딕의 말을 이해했다. 그에게도,
5년은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딕이 자신의 앞에 선 것만으로도 그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 자신을 덮치는 느낌이었으니까. 딕은
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팀, 네가 날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날 도와줄 수 있어?
딕의 눈은 5년 전 그때 팀이 보았던 그 눈과 비슷했다. 팀은 다시 한번 밀려오는 그때의 감정에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할 수 있는 가장 냉정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왜?
제이슨을 위해서.
네가 죽였잖아. 팀은 차마 그 말만은 내뱉을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 그저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 번, 그 때 그 장면은 자신이 보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저 빌어먹을 드레이크가 다 망쳤다고!! 데미안이 짜증난다는 듯 소리질렀다. 팀도 질세라 데미안을 노려보았다. 네가 그렇게
날뛰지만 않았어도 다 잡은 물고기였거든? 데미안은 웃기지 말라며 팀의 멱살을 잡았다. 데미안의 손은 작았지만 팀의 몸은 쉽게
끌려왔다. 팀과 데미안은 서로를 노려보며 험악한 말들을 당장이라도 퍼부을 기세였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자자, 그만해. 팀도, 데미안도.
딕이었다. 푸른 나이트윙의 옷을 입은 딕이 팀과 데미안 사이를 손으로 멀찍이 떨어트렸다. 데미안은 그 와중에도 못내 억울한
듯이 중얼거렸다. 드레이크 저 새끼가 꾸물대지만 않았어도 조커는 다 잡았을 거라고. 팀이 그 말에 발끈해서 소리질렀다. 얼씨구,
네가 발정난 개새끼처럼 뛰어나가지만 않았어도 조커는 내가 잡았어! 딕은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언제쯤이면 사이가
좋아질런지. 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둘다 그걸로 싸울 필요 없어. 조커는 브루스가 잡았으니까.
데미안과 팀이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딕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귀엽고 또 서로 닮아 있어서 딕은 실소했다. 이렇게
보면 둘 다 어린애라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자기는 어린애가 아니라고 날뛸 누군가와 내가 쟤보다 나이가 얼마나 많은데
어린애냐고 화낼 누군가 때문에 딕은 그냥 미소만 지었다. 딕은 익숙한 몸짓으로 그들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그만 싸워. 일은 잘 해결됐잖아?
팀과 데미안은 불퉁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딕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제이슨은?
딕의 말에 팀과 데미안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딕이 불길한 반응에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제이슨은? 데미안과
팀은 둘다 우물쭈물하며 서로를 미루듯이 쳐다보았다. 둘다 싸우느라 제이슨의 존재를 잊어버렸다고 대답하긴 싫은 모양이었다. 결국
팀이 입을 열었다.
제이슨은 폭탄 제거한다고 통제실로 혼자 갔는데...
딕의 표정이 급변했다. 딕은 아무 말 없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데미안과 팀도 서둘러 딕을 따라갔다.
제이슨!!
딕이 제이슨의 이름을 외치며 통제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쓰러진 남자들과 여기저기 부서진 기물들이 여기서 격렬한 격투가
있었음을 짐작케 했다. 그리고 어두운 구석진 곳에 기대 앉아 있는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딕은 제이슨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갔다.
팀과 데미안도 그 뒤를 따라 갔다. 제이슨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을 감은 채였다. 딕과 데미안, 팀이 그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동도 없었다. 설마, 설마.... 데미안은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제이슨에게 손을 뻗었다. 피에 흠뻑 젖은
가죽자켓의 감촉이 차가웠다. 데미안은 울 것만 같았다.
뭐야, 꼬맹이.
머리 위로 들려온 목소리에 데미안이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를 머금은 새파란 눈동자가 가늘게 데미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슨은 마치 찡그리듯이 미소짓고 있었다. 딕과 팀이 안도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하지만 데미안은 왠지 놀아난 기분에 화가
나 성질을 벌컥 냈다.
망할 토드! 나 놀라는 거 보려고 일부러 그런거지!!
내가 그런 것도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겠냐.
제이슨은 킬킬거리면서 손을 뻗어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다랗고 두꺼운 제이슨의 손은 언제나 따뜻했다. 데미안은 입을
삐죽거리며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자기 머리를 만지작 거렸다. 제이슨은 딕과 팀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일어섰다. 생명에 지장은
없는 모양이었지만 상처가 제법 컸다. 옆구리에 길게 베인 상처에서 자꾸 피가 나고 있었다. 다행히도 지혈은 했지만 가서 얼른
치료를 해야할 것 같았다. 제이슨은 딕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천천히 걸었다. 데미안은 팀과 나란히 하고 걷다가 문득 고개를
뒤돌아보았다.
제이슨이 딕의 귀에 뭐라 속삭이자 딕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곧 딕은 심각한 얼굴로 제이슨에게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제이슨이 고개를 저었다. 딕의 표정은 어두워졌지만 그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대신 그는 계속 걱정스러운 눈길로 제이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미안은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들이 대답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마치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듯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데미안은 어두운 방 천장을 누워서 응시하고 있었다. 보통 패트롤을 돌고 나면 몸을 많이 움직인 탓에 금방 잠들곤 했는데,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데미안은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이토록 잠이 오지 않는 건, 역시 그레이슨 때문인가.
어제 딕에게 모진 말을 내뱉었던 자신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이 잘못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자꾸 침잠해있던 오랜
기억들이 떠올라 자신의 몸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데미안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왜 돌아온거냐고,
빌어먹을 그레이슨. 데미안은 딕이 아무 말 없이 고담을 떠났을 때, 딕을 평생 용서하지 않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제이슨을 왜
죽였는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말해줘도 용서할까 말까인데, 저런 식으로 아무 말 없이 도망치는 것이 용납될 리 없었다.
데미안은 딕의 도주를 그가 죄를 저질렀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로 받아들였다. 딕은 가족을 죽인 살인자였고 그 판단에 재고의 여지는
없었다. 다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제이슨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같이 했던 임무가 자꾸 떠올라 그를
방해했다.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걸까. 언제부턴가 그 의문은 데미안의 마음 속에서 단단히 박혀버린 작은
가시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그때 똑똑, 하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데미안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박명이 퍼지기 시작하는 새벽하늘 아래로
팀이 로프에 매달린 채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도대체 멀쩡한 문 냅두고 왜 거기 있는 거야. 데미안은 불퉁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창문을 열자 팀이 몸을 날려 가볍게 방 안으로 착지했다. 붉고 검은 레드로빈의 망토가 잠시 부풀어올랐다
가라앉았다. 데미안은 앉으라는 권유도 없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채 팔짱을 꼈다. 팀도 어차피 살가운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알아서 의자를 빼서 앉았다.
도대체 무슨 비밀스러운 용건이 있길래 도둑놈처럼 온거야?
그냥, 브루스한테 알려지면 안된다고 그랬거든.
누가?
딕이.
딕의 이름을 들은 데미안의 눈에서 불티가 튀었다. 너 지금 그레이슨 놈하고 만나고 온거야? 그 살인자 놈을? 데미안을 보는
팀의 눈은 놀랄 만큼 냉정했다. 그는 잠시 데미안이 화를 가라앉히길 기다린 다음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나도 그 사실에는 동의하는 바야. 넌 내가 그 장면을 목격한 첫번째 사람이라는 걸 잊었어?
데미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팀이 그 사실을 자기 입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딕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이 그 모든 것들을 집어 삼키고 흔적도 남지 않게 소화해버리길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도중에 탈이 나 도로 토해버리질 않기를. 그러나 지금 그들이 마주한 것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거대한
감정의 응어리였다.
다만.. 딕이 이 모든 건 제이슨을 위해서라고, 그랬어.
그레이슨이?
데미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넌 지금 그 말이 가당키나 한다고 생각해? 그 자식이 죽였잖아. 토드를 죽인 건
그놈이라고. 그런데 누가 누구를 위해? 지금 살인자가 자기 희생자를 추모한다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드레이크, 넌 지금 그 말을
믿는 거야? 그런 거냐고? 데미안이 팀의 어깨를 붙잡으며 거칠게 외쳤다. 어느새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진 동생의 얼굴을 팀은
바라보았다. 데미안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하듯이. 그때 제이슨의 시체를 보았던 그 때
그 어린아이가 여전히 그의 얼굴에 자리잡고 있었다. 팀은 한숨을 쉬었다.
네 도움이 필요해, 데미안.
꺼져.
데미안은 거칠게 팀을 밀었다. 하지만 팀은 여전히 꼿꼿이 서 있었다. 팀은 데미안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지금 필요한 건 아캄 수용소의 보안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야. 모든 게 필요해. 간수들은 몇 교대인지, 소등은 언제하는지, 통제 시스템은 어떤지. 브루스라면 알고 있겠지.
너도 알아낼 수 있을텐데. 해킹 같은 거 너 잘하잖아.
해킹은 어쨌든 흔적이 남아. 브루스라면 금방 알아볼걸. 거기다...
로빈은 너잖아. 팀의 마지막 말에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팀은 지금 언제나 그들 사이에 존재해왔던 해묵은 상처들을 헤집어
내고 있었다. 그래, 로빈은 나지. 데미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팀이 죽어도 입밖에 꺼내기 싫어했던 말이었다. 넌 더이상 배트맨의
로빈이 아니라고, 언제나 그렇게 말했던 건 데미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말하고 있었다. 데미안이 로빈임을, 이제서야.
왜 이렇게까지?
데미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제 분노보다는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팀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 딕이 그랬던 것처럼, 오래된 피로를 공기 속에 흘려보내듯이.
그건 두 사람만의 순간이었는데, 내가 방해해버렸거든.
팀의 마지막 말은 마치 연기처럼 공기 속에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데미안은 아무 말 없이, 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낯선 이를 보는 듯한 생경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팀은 더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What is it, Major Lawrence, that attracts you personally to the desert?로렌스 소령, 당신을 사막에 붙들어 놓는 것은 무엇입니까?
-It's clean.때묻지 않은 청결함이지.
It's clean. 제이슨은 입속으로 대사를 따라 중얼거렸다. 제이슨과 딕은 침대에 누워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있었다. 옛날 영화 특유의 밝고 쨍한 색감의 화면 속에서 주인공 로렌스를 연기하는 피터 오툴이 대사를 말하고 있었다. 딕은
제이슨의 옆에 나란히 배를 깔고 누운 채 리모콘을 들었다. 좀 더 볼륨을 올릴까? 괜찮아. 제이슨의 목소리는 다른 생각에 잠긴 듯
낮았다. 딕은 제이슨을 흘긋 쳐다보았다. TV 화면 속에서 새파란 하늘 아래로 노란 지평선이 한없이 이어졌다. 딕은 가만히
제이슨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툭 질문을 던졌다.
제이슨, 혹시 사막에 가고 싶어?
넌 가본 적 있어?
딕은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브루스에게 입양되기 전에 그는 서커스를 따라 온갖 도시를 떠돌았었다. 물론 이제는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 희미한 잔재들로만 남아있었지만. 딕은 한참을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라스베가스와 뉴멕시코는 가본 적 있지. 하지만 우리가 지금 보는 아라비아의 사막은 아니야.
거긴 어떨까?
제이슨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아, 그렇군. 딕은 제이슨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딕은 빙긋 웃었다.
넌 단 한번도 고담을 벗어난 적이 없었지?
뭐, 어쩌다보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제이슨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화면 속의 사막에 못박힌 듯 멈춰서 움직일 줄 몰랐다. 샛노란 사막
위의 새파랗고 먼지 하나 없는 하늘은 눈부시도록 깨끗했다. 파란색과 노란색. 오로지 두 가지 색깔만 존재하는 세계. 고담의
어둡고 음습하며 냄새나는 뒷골목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딕은 제이슨이 무엇에 끌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제이슨을 보며
미소지었다.
같이 갈래?
딕의 말에 제이슨이 고개를 돌렸다. 사막의 하늘을 닮은 새파란 눈동자가 동그랬다.
사막말야. 언젠가 우리 둘이, 같이 가자.
딕이 다시 한 번, 천천히 말을 되풀이했다. 제이슨은 잠시 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함께.
책장에서 파일을 꺼내자 오랜 시간 동안 쌓여 있던 먼지가 공기중으로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딕은 먼지 구름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낡은 파일 위에는 제이슨의 이름 말고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언듯 봐서는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딕은 이 파일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다. 그는 이 파일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는 말없이 빛바랜 파란 표지를
넘겼다. 안에는 누렇게 변색된 종이들이 누워있었다. 각종 복잡한 수식과 어려운 전문 용어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서류들을 딕은 한장
한장 조심스럽게 읽어갔다. 이미 오래 전에 자기가 수집한, 그렇기에 수없이 읽었던 정보들이었는데도 오랜만에 보니 조금은 생경한
기분도 들었다. 딕은 재빨리 눈으로 그 모든 것을 훑어갔다.
불명확, 분석불가, 원인미상.... 자꾸 반복되며 나타나는 단어들의 존재에 딕은 입술을 깨물었다. 5년 전 그 때 느꼈던
똑같은 기분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짓눌러 당장이라도 주저앉힐 듯한 지독한 무력감과 분노. 하지만 그에게는
지금 다른 목적이 있었다. 딕의 눈이 한 단어 위에 멈췄다. 조커. 그는 그 밑의 문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또다른 익숙한
단어가 있었다. 스케어크로우. 딕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캄.
고담의 밤하늘에는 별이 없었다. 스모그같은 짙은 먹구름이 언제나 떠다니는 이 도시에서 별을 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제이슨도 별을 본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딕은 자신이 보았던, 톡 치면 쏟아질 것 같았던 별들을 제이슨에게
더이상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긴, 그렇게 치면 지금 아쉽지 않은 것이 없겠지. 딕은 상념을 뒤로 하고 맞은편
빌딩을 바라보았다. 붉고 검은 옷의 팀이 그를 향해 오고 있었다.
좋은 밤이야, 팀.
딕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팀은 대꾸하지 않은 채 가벼운 몸놀림으로 딕이 서 있는 빌딩의 옥상으로 착지했다. 팀은 다가오는 딕을 훑어보곤 약간 놀란 눈이 되었다.
나이트윙은 5년 전에 그만둔 줄 알았는데.
그만뒀었지. 근데 다시 일하려니 이것보다 편한 게 없더라.
금방이라도 어둠 속에 녹아들 듯 새까만 옷 위로 파란 줄무늬가 선명했다. 딕이 저 옷을 입고 자신의 앞에서 움직이던 그
순간들이 팀의 머릿속에 해일처럼 밀려들어왔다가 흩어졌다. 어쩐지 5년 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 동안의 모든 일들이, 마치
한때의 백일몽이었고 사실 현실엔 제이슨이 살아있고, 모두가 함께였던 그 순간이 여전히 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부탁한 건?
하지만 진짜 현실은 이거겠지. 팀은 쓴웃음을 지으며 딕에게 작은 usb를 건네주었다. 여기 안에 다 들어있어. 딕은 흐응-하는 소리를 내며 usb를 손가락으로 잡고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팀을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도와줬어?
데미안이.
데미안이?
의외라는 듯 되묻는 딕의 말에 팀은 살짝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데미안이 널 용서했다고 믿지는 마. 널 다시 보게
된다면 죽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일부러 꾸며낸 듯한 딱딱한 목소리로 하는 경고는 서늘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딕은 그저 피식 웃으며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래, 그럴 거야. 하지만 분명 다음에 보게 되겠지.
네가 이대로 다시 사라지면 만나지 않을거야.
팀의 어조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해묵은 원망이 단어들 사이로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널 도와주지만 그게 널 용서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팀은 그 말을 내뱉자 마자 괜히 말했다고 후회했다.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딕은 다 알고 있을텐데. 딕은 미소지으며
침묵했다. 그는 usb를 허공에 손가락으로 튕겨올렸다 다시 도로 잡았다. 그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조금만 기다려줘.
뭘?
그냥.
딕은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팀은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팀의 목울대에서 무엇인가가 울렁거렸다.
넘어올 듯, 넘어오지 않을 듯.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기에 언제부터 그저 마음 속에서만 담아두었는지 모를 비밀. 하지만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팀은 여전히 웃고만 있는 딕에게 왠지 화가 나서, 결국 그를 쏘아보며 말해버렸다.
나 너와 제이슨의 관계 알고 있었어.
두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언제나 그들은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다 함께
있을 때에도 제이슨과 딕의 시선이 얽혔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떨어지곤 했다. 팀이 언제부터 눈치챘는지는 팀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을 뿐. 그러다 확신하게 된 것은, 팀과 제이슨 그리고 딕이 함께였을 때였다.
가벼운 임무였지만 제이슨은 실수로 손을 살짝 베이고 말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딕은 당장 소독하지 않으면 패혈증에 걸릴거라는 둥
죽을지도 모른다는 둥 장난섞인 호들갑을 떨었고 제이슨은 성질을 내며 내가 죽으면 그건 너 때문에 열받아서 일거라고 대꾸하던,
그런 평범한 일상이었다. 팀이 그 장면을 본 건.
팀은 브루스에게 보고를 마치고 이제 가자고 말하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딕이 제이슨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제이슨의 손목을
잡아 올려 그의 손을 자신의 시선에 맞추었다. 마치 상처를 유심히 관찰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살짝 혀를 내밀어 상처의
피를 핥았다. 붉은 혀가 붉은 상처 위를 매끄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딕의 눈이 살풋 초승달 꼴로 휘어졌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딕의
시선은 명확하게 제이슨의 눈을 향하고 있었다. 제이슨은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그 순간 아주 가늘게 몸을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
모든 것은 일순간에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하지만 동시에 그 순간은 모든 것들의 움직임이 정지한 것처럼 침묵했고 유달리
더뎠다. 제이슨이 입술을 벌렸다. 팀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벌려진 제이슨의
입술에서 이내 짜증이 담긴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아, 진짜 더럽게 뭐하는 짓이야, 디키버드.
아니 왜. 이거 소독하는 거야. 말했잖아, 안 하면 죽는대도? 나한테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화를 내다니 건방진 제이버드같으니.
너 진짜 내가 짜증이 나서 죽는 꼴 보고 싶은 거지, 솔직히 말해!
인간은 짜증만으로는 죽지 않아, 바보 제이.
내가 그 첫번째 케이스가 되어주마! 그리고 다잉메세지엔 이게 다 모두 딕 그레이슨 때문이라고 적을 줄 알아, 이 바이러스 같은 자식아!
딕은 제이슨의 어깨를 두들기며 킬킬대고, 제이슨은 딕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손을 휘둘렀지만 그저 허공을 가를 뿐인, 그런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팀은 어째선지 나지막하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알게 된 진실을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속으로 결심했었던 것이다.
딕은 팀의 말에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곧 하핫, 하고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 역시 그랬구나, 팀. 너라면 다 알
것 같다고, 제이슨이랑 말했었는데. 사실이었구나. 역시 내 동생이야, 그치? 이제 당황한 것은 팀이었다. 딕의 의외의 반응에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팀은 멍청한 눈으로 딕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딕을 5년만에 보았던 그
순간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이 자꾸 팀의 의식 밑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딕은 한참을 허리를 굽혀가며 웃더니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내며 웃음을 멈췄다. 팀, 팀. 그는 마치 팀을 달래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 때문에 날 더이상 도와주지 않으려는 건 아니잖아.
이번에 웃는 것은 팀이었다. 팀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달라, 딕. 나는 그것 때문에 도와주기로 한거야.
딕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바람조차 불지 않는 지독하게 어둡고 습기찬 공기 위로 침묵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팀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박이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낮은 딕의 목소리가 아래로 추락하듯이 울렸다.
데미안은 무작정 커보이던 브루스의 등이 언제부턴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졌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자신의 키가 브루스와 비슷해졌던 그때였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브루스를 올려다볼 필요가 없어지면서, 자신이 아버지에게 갖고 있던
존경심이 아주 조금 깎여 나갔다는 것을 데미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브루스를 존중했고 믿었으며, 무엇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배트맨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브루스 웨인은 존경받을 가치가 충분했으며 따를 만한 사내였다.
그렇기에, 데미안은 차마 5년 전 제이슨이 죽었던 그때도 브루스에게 추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은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때는 브루스도 팀도 데미안도 알프레드도 너무나도 큰 슬픔과 배신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아무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고, 특히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배트맨에게도 차마 도대체 이 모든 게 무엇 때문이냐고, 당신이라면 알지 않냐고 따질
엄두조차 못냈던 것이다. 거기다 슬픔에 빠진 브루스를 괴롭히는 것은 존경하는 아버지를 대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데미안은 모든
궁금증을 그대로 마음속에 묻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거의 성공할 뻔 했다.
딕이 돌아와서 모든 걸 들쑤시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게 된 청년은 마침내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추궁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두운 뱃케이브에서 데미안은
브루스를 기다렸다. 그는 조금 초조한 듯 이리저리 뱃케이브 안을 빙글빙글 제자리걸음을 한참동안 했다. 브루스는 웨인 기업의 일로
잠깐 출타한 참이었다. 알프레드가 왜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질 못하냐며 좀 안정을 찾으라고 따뜻한 코코아를 갖다주었지만 데미안은 한
모금 마시고는 그대로 손도 대지 않았다.
브루스는 뱃케이브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데미안을 발견하고 여상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계단을 내려갔다. 데미안이
브루스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브루스는 살짝 놀라 데미안을 보았다. 그가 이런 기세로 브루스에게 달려왔던 것은 무척 오래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한 굳은 얼굴에 덩달아 브루스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일이냐, 데미안.
토드의 일입니다.
제이슨의 이름에 브루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슬픔과 후회가 섞여 안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한 눈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당신이라면 분명 뭔가 알고 있겠죠.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혼자서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취급 받는 것도. 모두 다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데, 심지어 저 빌어먹을 드레이크도 뭔가 알고 있는데, 나만 몰라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요. 죽은
사람도 죽인 사람도 다 내 가족이었으니, 나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어요.
마치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데미안은 브루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한번, 또렷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나에게 진실을 알려주세요.
넌 모르는 게 나아.
브루스의 목소리는 지하 갱도에서 울리는 목소리처럼 낮고 끝이 흐리게 퍼졌다. 데미안은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새 그의 주먹은 꽉 쥐어져 있었다.
가족이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건가요? 내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이제 나도 곧 성인인데!
브루스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데미안은 숨을 몰아쉬며 그런 브루스를 바라보다가, 불쑥 한 마디를 내던졌다.
그레이슨이 뭔가 꾸미고 있어요.
브루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데미안은 계속해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드레이크는 그걸 도와주고 있고, 나한테도 도움을 요청했어요. 아캄 수용소의 자료를 달라더군요. 그래서 전부 줬죠. 전부, 배트맨의 모든 정보를 말이죠.
브루스는 크게 충격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안하게 빛났다. 아캄이라면. 그는 무언가 짚히는 게
있는지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아캄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는 데미안의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자신이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거라고 데미안은 생각했다.
그러니, 말해주시죠. 내가 한 행동의 무게를 나 자신도 몰랐으니, 이제라도 알려달란 말입니다.
브루스는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깊은 피로의 무게를 지닌 한숨이었다. 그는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의자에 기대 앉았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데미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데미안은 여전히 브루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브루스가 입을 열었다.
그 모든 건, 5년 전 우리가 조커를 잡았을 때였지. 나는 그때 조커를 아캄에 넣었고 아직도 그는 그 안에 있지. 그때 우리가 펼쳤던 작전, 너도 있었으니 기억할게다. 제이슨이 다쳤었지.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데미안이 제이슨이 죽기 전에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순간을, 잊어버릴리가 없었다.
모든 건 그때부터 시작이었지.
브루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한없이 고통스러운, 그러나 과거가 되어버린 순간을 더듬는 사람 특유의 표정으로.
브루스가 돌아오자마자 뱃케이브에서 기다리고 있던 딕이 벌떡 일어섰다. 하루종일 초조하게 기다린 모양인지 브루스에게 마치 달려들듯이 다가와 다짜고짜 물었다.
조커는 뭐라고 했어요?!
자기도 모른다더군.
브루스는 대답하면서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딕이 하, 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딕을 아는 사람이면 깜짝 놀랄만치 차갑고 냉소적인 얼굴 위로 분노가 드리워졌다.
브루스, 설마 그 소리를 믿는 건 아니겠죠? 본인이 바로 그걸로 제이슨을 공격했던 주제에, 모른다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죠?
거칠게 내뱉는 딕의 목소리는 격렬한 흥분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브루스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딕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알아온 사실은 암담한 것이었다.
조커도 모른다더군. 스케어크로우의 가스와 자신의 것을 장난삼아 섞어본 거고 그것도 단 하나 남은 샘플이었다고. 한번 실험해볼 요량으로 제이슨에게 썼던 거라고, 그러더군.
브루스의 말에 딕은 잠시 말을 잃은 채 브루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로 사실이냐고, 묻는 듯한 눈초리에 브루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하지만, 모두 사실이야.
조커의 말이 맞다면 더 이상 제이슨을 치료할 방법은 남아있지 않았다. 조커는 제이슨을 공격한 직후 브루스에게 잡혀서 아캄에
갇혔고 스케어크로우 역시 한달도 전에 아캄에 갇힌 상태였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고문을 해서라도 방법을 알아냈겠지만, 이 상황에선
그럴 수도 없었다. 딕은 조커가 방법이 없다고 말하며 얼마나 즐겁게 낄낄거렸을지 그 광경에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딕은
씹어뱉듯이 내뱉었다.
조커는 아캄에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겠군요. 그러지만 않았어도 내가 당장 그를 죽이고 싶어했을테니까.
딕.
수위를 넘어선 딕의 발언에 브루스가 경고하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딕은 무시했다. 언제나 여유롭던 그였지만, 지금의
그는 초조함에 평정을 잃고 분노에 자제를 잃은 상태였다. 브루스도 비슷한 마음이었지만, 특히나 딕은 더욱 심했다. 브루스는 마음
속으로 짐작만 하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아마도, 그 둘은.
딕은 그대로 의자에 무너져내리듯 주저앉으며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얼굴은 숙여져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일그러져서 비탄을 삼키고 있을 것이다. 딕이 마치 쥐어짜내듯,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이슨이, 환청을 듣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어요. 어젠 낮에도 환각을 봤죠. 발작도, 점점 더 주기가 빨라지고 있어요.
브루스는 침묵했다. 이미 보고받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딕의 입으로 듣는 것은 또 달랐다. 딕은 눈을 감았다.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움켜쥐던 제이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딕의 심장도 욱씬대는 것 같았다. 어느새 눈물도 말라버린
목소리로, 딕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브루스, 제이슨은 죽어가고 있어요.
뭐야, 이젠 오는 거 질릴 때도 안 됐냐.
제이슨은 보던 책을 덮으며 딕에게 가벼운 타박을 주었다. 제이슨의 말대로 딕은 최근 하루에도 몇 번씩 제이슨을 보러 오곤
했다. 딕은 제이슨의 말에 약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제이슨의 눈가 밑은 푸르스름했고 볼은 조금 더 홀쭉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가 어떻게 보면 안쓰럽고 어떻게 보면 미안해져서, 딕은 새삼 서글퍼졌다. 하지만 딕은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활짝 웃으며 제이슨에게 다가갔다.
무슨 책 읽고 있어?
제이슨은 말없이 책을 들어올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어째 제이슨하고 어울리는 듯 하면서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라 딕은 실소했다. 그는 친근하게 제이슨의 옆에 앉으면서 물었다.
무슨 내용이야?
뭐, 대충 책 소개에는 서로의 가벼운 면과 무거운 면에 끌리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는데 속알맹이는 그렇지도 않네.
우리 이야기랑 비슷한 것 같은데?
딕이 키득키득거리며 제이슨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자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여기 나오는 남자주인공이 너랑 꼭 같은 바람둥이거든. 구제할 길이 없는.
아니, 너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야?
생각이고 자시고가 아니라 진실이잖아. 솔직히 말해서 너 지금까지 놀아난 여자 백 명쯤은 되지? 원나잇까지 합해서.
아니거든?! 그 정도까진 아니야!!
그 얘긴 세자리는 아니어도 두자릿수까지는 간단 이야기로군. 잘 알았어, 딕 그레이슨.
제이슨의 말에 딕은 허를 찔린 듯 윽, 하고 소리를 냈다. 제이슨은 피식거리며 웃었고 딕도 그런 제이슨을 보며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순간 제이슨이 숨을 멈춘 채 딕의 어깨너머를 못박힌 듯 바라보았다. 좀전까지 웃던 딕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딕도 제이슨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뒤돌아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왜 그래, 제이슨. 또 환각을 보는 거야?
아니, 아니.. 그냥.
제이슨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불안했고 초점이 흐렸다. 딕은 제이슨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제이슨은 딕의
손길을 밀어내지 않았다. 뭘 보는 거야? 딕의 말에 제이슨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의 시체. 딕은 제이슨이 구하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살아있는 줄 알았었는데, 결국 제이슨이 구하러 가기 직전에 조커에게 살해당했다.
그때부터였다. 제이슨이 브루스와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이 언제부턴가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던
것일게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딕은 자기도 모르게 제이슨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차마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이 곳에 온 진짜 용건을 꺼냈다.
제이슨, 오늘 브루스가 아캄에 갔다왔는데....
그런데?
딕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목이 바싹바싹 타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쥐어짜내듯 내뱉었다.
해독제는 없대.
한번 말을 내뱉고 나니 변명처럼 부연설명을 자기도 모르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조커도, 스케어크로우도 모른대. 우연의
결과물이라 연구도 안 되어있고 그놈들은 지금 아캄이고... 하여간 브루스가 해독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까
너도....
알겠어.
제이슨이 딕의 말을 싹둑 잘랐다. 딕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이슨? 하지만 분명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이슨의 얼굴은 놀랄 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제이슨은 다시 한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 그러니 그렇게
자책할 필요는 없어, 딕.
딕은 멀거니 제이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를 알아온 이래로 그가 이렇게 낯설게 느껴진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는
제이슨의 평온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이슨,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제이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등시간이 지난 아캄수용소 안은 고요했고 어두웠다. 딕은 가볍게 로프에서 몸을 떼고 지상에 착지했다. 간수들이 손전등을 들고
돌아다닐 테지만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시간 여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팀은 그를 지원하기 위해서 아캄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딕은 귀에 낀 무전기에 대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팀, 들려? 팀의 차가운 목소리가 곧 응답했다. 들려. 팀은 여전히
'네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번 한번만 협력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딕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쓰지 않은지 오래였다. 어둡고 좁은 통로는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가 크게 울리는 구조였지만 딕은 능숙하게
소리를 죽이고 움직였다. 5년만의 일인데도 몸은 기억하는 대로 움직여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딕은 생각했다.
그의 목표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그는 창살 안을 들여다 보며 희열에 가득찬 웃음을 지을 것이다. 그의 목표가
늘 짓는 웃음처럼, 광기마저 일순 엿보이는 미소를, 그는 만면 가득 지을 것이다. 딕은 어두운 창살 너머로 조커를 발견하고 한없이
즐거워졌다.
제이슨은 평온했지만 딕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까닭모르게 슬퍼졌다가 화가 났고 초조해졌다. 그는 가끔 유독 가스 속에 1시간
넘게 갇혀 있던 장본인이 바로 자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스스로도 조절하기 어려운 감정에 휘둘려 미칠 것 같았다.
그러므로 그가 아캄까지 찾아간 것은 그런 무절제한 충동과 분노의 합산물이었다.
정육면체의 면회실에서 만난 조커는 여전히 목을 조르고 싶을 만큼 만면에 광기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죄수복을 입고도 거만하게 몸을 의자에 기대 앉았다. 그는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도 그 작은 빨간 새의 일로 온 건가? 이미 배트맨이 한번 왔다갔는데, 뭘 확인하러 온 거지?
난 널 신용할 수 없으니까.
딕은 팔짱을 낀 채로 도미노 마스크 너머로 조커를 뚫어보았다. 조커는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킬킬대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을 배를 잡고 웃어대더니 숨을 헐떡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핫... 이거 참 걸작이야. 너무 즐거운걸. 나한테 박쥐도 푸른 새도 매달리는 꼴이라니. 그런데 어쩌겠어.
나도 모르는 걸. 말했잖아, 나도 모른다고. 그냥 장난삼아 섞어본거였다구. 몰라, 연구도 안 해봤고, 그냥 될대로 되라고 쓴
거였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확인사살 당하니 속이 쓰렸다. 거기다 저렇게 즐거워하는 꼴이라니, 딕은 배알이 뒤틀리다 못해 꼬이는 기분이었다. 조커는 즐거운 듯 숨이 넘어갈듯 낄낄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자꾸 나한테 오는 걸 보니 별 뾰족한 수가 없나 보지? 그런데 어쩐다, 나도 몰라서. 작은 빨간 새를 구하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몰라, 그치? 그전까지 버텨주기는 할까? 나도 모르지, 뭘 알아야 추측을 하지. 어쨌든 빨간 새는 이제 죽은
목숨이라는 것만 알지!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넘어지고 딕은 조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딕의 눈동자 안에는 새파란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딕은 낮은 목소리로 짓씹듯이 말했다.
헛수작 하지 마. 당장 해독제가 있는 곳을 불어.
나도 모른대도. 정말로, 해독제는 없어. 스케어크로우에겐 가봤나? 물론 그 작자도 답을 주진 못했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
조커의 말에 딕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조커는 숨이 찰 텐데도 킬킬거리며 이죽였다.
그리고, 내가 거짓말을 한다 해도 네가 무슨 수로 알아낼 거지? 난 여기 아캄에 있고 너는 절대 나를 손대지 못할 텐데.
기껏해야 이렇게 드잡이하는 게 고작이지. 조커는 이제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어대고 있었다. 딕은 손에 힘을 풀고 조커의
멱살을 놓았다. 안타깝게도, 조커의 말은 모두 맞았다. 스케어크로우도 답을 주지 못했고-그는 조커가 맘대로 합성해버린 뒤라
쟈신은 아는 게 없다고 했다- 조커의 말대로 그는 설사 조커가 거짓말 한다 해도 밝혀낼 수가 없었다. 딕은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력감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딕은 갈라진 목소리로, 한 단어 단어마다 힘을 주어 말했다.
네가 아캄을 나오는 그 순간... 넌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야.
저열한 협박이라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었지만, 할 수 있는게 고작 이 정도 뿐이라는게 딕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제이슨, 미안해. 딕은 마음 속으로 다시 한번 사과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 모양의 형체에 조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곧 누구인지 알아보고 반가운 친우를 만나기라도 한 사람처럼 씨익 웃었다.
오랜만이야, 나이트윙.
그 이름은 버린지 오래되었는데, 불러주다니 고마운걸.
딕도 천연스럽게 대답하며 걸어갔다. 이제 딕은 발소리를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저벅이는 소리가 그가 걸을 때마다 크게 울렸다. 조커는 언제나 그렇듯 광기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즐거운 듯이 입술을 핥으며 속삭였다.
나를 죽이러 왔나?
물론이야.
팀은 무전기를 거의 떨어트릴 뻔했다. 그가 좀전에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인다고? 그는 살해에 동참할
생각은 없었거니와 딕이 누군가를 죽이게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무전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여긴 어때?
-언제나 그렇듯이, 익숙하고 편안하지. 그리고 끔찍하리만치 지루하다고. 그래서 네가 언제 오나 기다렸었어.
-그렇군. 지금까지 탈옥하지 않은 건 나 때문이었다는 건가?
-네가 경고했었잖아? 난 네가 거짓말은 하지 않는 인종이라 믿었는데.
-오긴 왔잖아.
-그렇지만 너무 늦었어. 한 3일만 더 늦었어도 나는 혼자서 탈옥했을 거라고.
-그것 참 다행이군.
딕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팀은 다시 한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딕은 조커와 아주
우호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본래 딕은 누구에게나 유들유들하고 농담을 던지곤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조커를 포함하지는 않았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팀은 더 이상 여기 대기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움직여야 해. 딕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있으면 걷잡을 수 없게 되리라는 예감이 팀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팀은 딕이
잠입했던 통로로 몸을 이동했다.
브루스는 말을 멈추고 잠시 한숨을 쉬었다. 데미안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새파랗게 굳어있었다. 움켜쥔 주먹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있었다. 데미안은 무어라 말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곧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게 딕이 제이슨을 죽일만한 이유는 되지 않아요.
그래, 내 생각도 그렇다.
모든 희망을 포기해버리기엔 너무 일렀어. 브루스는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딕도, 그렇게 생각할거라 믿었는데. 데미안도 침묵으로
긍정했다. 적어도 그와 브루스가 알고 있던 딕 그레이슨은, 지금의 그가 아닌 5년 전의 그는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몸을 떨며 파리한 빛을 뿌리던 그믐달조차 구름 뒤로 숨어버린 밤이었다. 자욱한
안개마저 끼어 사위는 온통 어두웠다. 거리의 가로등은 힘겹게 오렌지색으로 깜박였다. 간신히 주위를 분간할 수준의 빛밖에 없는
이런 밤은, 누구나 진저리를 치며 싫어할만 했지만 이런 밤을 간절히 기다린 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배트맨은 그런 자들을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어딜 가는 거냐, 딕.
묵직한 브루스의 목소리가 딕의 귓전에 닿았다. 딕은 몸을 돌렸다. 청바지에 후드 점퍼라는 평범한 옷차림에 가벼운 배낭 하나만을 멘 모양새가 묘하게도 브루스의 눈에는 낯설었다. 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최대한 조용히 떠나려고 했는데 말이죠.
정말 그렇게 할수가 없게 만드네요, 당신은. 딕은 쓰게 웃었다. 브루스는 딕의 말을 무시했다. 그는 다시 한번 질문했다.
어딜 가려는 거지.
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금 웃는 딕의 미소는 텅빈 듯 공허했다. 브루스는 더이상의 대답을 듣기를 포기했다. 그대신 그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왜 제이슨을 죽인거지?
말할 수 없어요.
되풀이 되는 문답에 브루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도대체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인지. 브루스는 다시 한번 딕을 채근했다.
도대체, 왜 그런거지? 제이슨은 아직 절망적인 단계까진 아니었어. 그렇게 섣불리 포기해버리기엔 너무 일렀다고.
제 생각에도 그래요, 브루스.
브루스가 딕의 멱살을 낚아챘다. 카울 뒤의 눈이 분노로 일렁이는 게 보였다. 딕은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아내면서도 다시 한번 웃었다.
정말이에요, 브루스. 딕의 파란 눈동자는 모든 살덩이라고는 구더기에 파먹힌 시체의 눈처럼 생기가 없었다. 순간 브루스의 머리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말하지 않는 이유는, 제이슨 때문인가?
어쩌면요.
딕은 이미
입가에 굳어버린 힘없는 미소를 여전히 띤 채 브루스를 올려다보았다. 브루스는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딕은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목을 쓰다듬었다. 그 모든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브루스는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뭘요?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수 있냐는거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딕은 다시 한번 텅빈 미소를 지었다.
왜 이렇게 늦은거지?
조커의 질문에 딕은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겨우 5년이었지.
마치 도망치듯이 고담을 떠났다. 괴로운 기억을 외면하기 위해서였을까?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떠나고 싶었다. 그는 낯선
나라와 이름 모를 땅을 떠돌았다. 하지만 어딜 가도 그는 도망칠 수 없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제이슨의 기억이 그를 따라
다녔다.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잠긴, 숨막히리만치 기나긴 밤이 올 때면 그는 언제나 제이슨의 꿈을 꿨다. 그런 날 아침이면 망설임 없이 그 도시를 떠났다. 그렇게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는 채 떠돌다 도착한 곳은, 넓은 사막이었다.
너무나도 새파래서 물감을 풀어놓은 물 같은
하늘 아래로, 샛노란 사막이 잠겨 있었다. 공기는 열기로 일렁여서 마치 모든 것이 환상처럼 멀어졌다가 다가왔다. 딕은 따가운
햇살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언젠가 제이슨과 함께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겹쳐졌다.
-사막말야. 언젠가 우리 둘이, 같이 가자.
-그래, 함께.
눈앞이 흐려졌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던, 그리하여 기억의 한 구석으로 치워졌던
약속이 이렇게 다가올 줄은 제이슨도, 딕도 차마 몰랐다. 딕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눈에서 흐르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제이슨, 제이슨.... 아주 오랫동안 입안에서 맴돌기만 했던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나한테 왜 그랬던 거야,
제이슨. 이렇게 약속해 놓고서.
딕은 그렇게 한참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아주 오랫동안 참았던 눈물들이 터져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결국에 헤매다 얻은 답은, 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야. 그리고 내게 남은 건 복수하는 거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어.
-대단한걸. 아주 인상적이야.
-그래, 그러니 오늘 나는 너를 죽일거야.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두번째는 쉽게 할 수 있으리라 믿어.
팀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최대한 빨리 달려가고 있었다. 침착하게 조커와 이야기를 나누는
딕이라니. 거기다가, 누굴 죽인다고? 팀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될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팀은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딕을 만날 때마다 들곤 했던 그 위화감이 다시금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팀은 도저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결론에 도달하려는 자신의 사고회로를 수없이 탓했지만, 그런 노력도 헛것이었다. 정말로, 아닐거라고 믿고 싶지만-
딕은 망가졌다.
미친 놈과 침착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놈은 똑같이 미친 놈뿐이지. 팀은 씁쓸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제이슨을 제 손으로 죽이고도 그가 제정신일거라 믿었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어째서 그런 일을 겪고도 그의 성격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는지도, 이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발, 최악의 상황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팀은 속으로 간절히 빌며
빠르게 달렸다.
딕은 권총을 장전했다. 제이슨이 쓰던 묵직한 권총이었다. 그의 세이프
하우스에 버려져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었다. 조커는 기묘하게 웃었다. 딕은 총구를 조커의 미간에 겨냥했다. 그의 눈동자는 언제나
그랬듯이 한곳에 고정되지 않고 데룩데룩 구르고 있었다. 조커는 입술을 핥았다. 내가 순순히 당해줄거라고 믿어? 딕은 웃었다.
아니.
탕!!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팀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딕!! 딕의 손에서
권총이 힘없이 떨어졌다. 딕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총소리는, 누구의 것이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은 이내 답을 찾았다.
쇠창살 사이로 작은 권총이 빛을 발했다. 팀은 이를 갈았다.
조커!
조커는 킬킬대며 연극적인 몸짓으로 두 팔을 들었다. 품에 쏙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반짝이는 작은 권총이 어둠 속에서 빛의 호선을 그렸다.
이거, 레드로빈도 출두이신가.
너...!!!
팀은 당장이라도 조커의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치고 싶었지만, 딕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딕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출혈량으로 보아 금방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팀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피를 막아보려 했지만 막아질리가 만무했다. 팀은
창살 너머의 조커를 노려보았다. 조커는 킬킬거렸다.
이거, 정말 지독한 악연이지 않나? 빨간 새도 파란 새도 전부 다 내가 죽이게 되다니 말이야. 배트맨에게는 아주 즐거운 소식이 되겠군.
빨간 새...?
팀의 머릿속에 순간 스쳐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팀은 그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석연치 않았던 모든 일들의
인과관계가 갑자기 제대로 정렬되었다. 조커, 그 키워드 하나의 존재만으로. 팀은 이를 갈았다. 조커는 마치 멀리 내다보듯 한 손을
이마 위로 올렸다.
어이쿠, 그럼 이제 이 몸은 퇴장할 때가 된 것 같군.
팀도 조커가 보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두운 복도 끝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뭐지? 팀이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천장에서 굉음이 들렸다.
쾅!!
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귀를 막았다. 먼지와 시멘트 파편들이 마구 떨어졌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올려보니 조커가 갇힌 감옥의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있었다. 그 구멍으로 누군가 밧줄사다리를 던졌다. 아마도 조커의 부하겠지. 팀은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아캄 수용소의 작은 감시의 틈을 타서, 조커의 부하들이 잠입한 것이다. 팀은 조커를 노려보았다.
조커는 한 눈을 찡긋하며 두 손가락을 모아 던지며 가볍게 인사했다.
덕분에 탈출까지 하게 되어서 아주 고맙다고 파란 새한테 전해줘. 아디오스.
팀은 거칠게 쇠창살을 붙잡으며 외쳤다. 거기 서!!! 조커는 낄낄거리며 누가 죄수인지 모르겠다고 이죽이며 유유히 그렇게 사라졌다.
팀은 분노에 입술을 짓씹으며 품의 딕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과다출혈로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팀은 급히 망토를 찢어 딕의
상처를 감싼 다음 그의 몸을 낑낑대며 들어올렸다. 브루스에게 가자. 얼른 치료부터 해야해. 그때 딕이 자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버려 둬.
딕, 뭐라고 했어?
내버려 두라고.
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이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팀은 딕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한듯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그의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때 딕이 팀의 손을 뿌리쳤다.
딕!
딕은 비틀거리면서 팀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는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털썩 벽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했다.
내버려 둬.
팀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하니 딕을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는 거야? 딕은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목적은 모두 달성했어.
...무슨 소리야?
도와줘서 고마워. 이제야 모든 게 끝난 거야.
팀의 입술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떨리기 시작했다. 팀은 딕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딕이 지금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해하기 싫었다. 물기섞인 목소리가 팀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팀은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딕은 더 이상 설명할 마음은 없었다. 그대신 그는 손을 뻗어 팀의 눈물이 맺힌 눈가를 닦아냈다.
형이라고 이제야 불러주는구나.
딕이 희미하게 웃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처럼, 힘없는 미소였다. 팀의 눈에서 눈물이 자꾸 흘렀다.
브루스랑 데미안한테도 미안하다고 해줘. 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허공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하얗게 멀어졌다. 이제 한계로구나. 딕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언제나 그려왔던 이름을 불렀다.
제이슨.
딕, 날 죽여줘.
제이슨의 얼굴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침착했다. 흥분한 쪽은 딕이었다. 그의 파란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딕은 떨리는 목소리로, 제이슨에게 물었다.
왜 하필.. 나야?
내가 널 사랑하니까.
딕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한 채 한참을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제이슨도 딕을 마주보았다. 딕의 눈동자에서
말없이 눈물 한방울이 굴러 툭, 떨어졌다. 딕은 그 눈물을 닦아내지도 않은 채, 웃었다. 마치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넌 정말 잔인하구나, 제이슨.
내가 가장 듣고 싶어했던 말을 이제서야 해주다니. 그러면 거부할 수도 없잖아. 딕은 떨리는 입술을 애써 끌어모아 다시 한번 웃는 표정을 만들었다. 제이슨은 가만히 딕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날 미워해도 돼.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잖아.
그렇게 해야 해.
제이슨이 손을 뻗었다. 딕의 두 손을 붙잡고, 자신의 목을 향해 당겼다. 딕은 무엇인가에라도 홀린 듯 가만히 있었다. 딕의 두 손은
어느새 제이슨의 목을 감싼 형태가 되었다. 제이슨이 말할 때마다 목이 울리는 것이 손 끝으로 느껴졌다.
날 위해서.
딕은 다시 한번 웃었다. 불가능한 걸 요구하지 마, 제이. 지금 이 순간도... 넌 내가 널 더 사랑한다는 걸 알잖아. 그러니까 그러는 거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해줄리가 없으니까.
제이슨이 대답했다.
미안해.
딕은 제이슨의 목을 눌렀다.
-제이, 이 소설책 결말은 어떻게 돼?
-남자랑 여자, 사고로 함께 죽어.
-해피엔딩이네.
-그래?
-응. 정말로. 조금은 부러울 만큼.
-그래, 내 생각에도... 해피 엔딩인 것 같아.
늦어서 미안해. 딕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삭였다. They died happily ever af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