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Y.A.D.

[딕슨딕]어느 밤 무도회에서 본문

글연성/DC

[딕슨딕]어느 밤 무도회에서

DayaCat 2013. 7. 26. 22:40

제이슨은 연미복의 보타이가 불편한지 자꾸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데미안이 그런 제이슨에게 이런 옷 처음 입어 보냐? 하고 이죽거리자 딕이 그의 머리를 꽁하고 꿀밤을 한대 때렸다. 평소라면 제이슨도 인상을 쓰며 어디서 꼬맹이가 기어오르냐고 살벌하게 대꾸했겠지만 지금 그는 그런데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한테 말이라도 걸까봐 잔뜩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이 은식기에서 반사되어 반짝였다. 참석한 손님들은 물론이거니와 돌아다니는 급사들의 모습까지 고급스럽고 우아해보였다. 작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이 파티장 내에 마치 향기처럼 떠돌았다. 웨인 기업이 주최하는 자선 파티이니 이 정도 수준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제이슨은 이 모든 게 낯설었다. 딕이나 팀은, 심지어 데미안까지 이런 광경에 익숙한 듯 했지만 제이슨은 달랐다. 그가 웨인가에 머물렀던 기간은 단 몇 년뿐이었고 그때도 그는 이런 파티에는 거의 출석하지 않았었다. 그는 다시 신경질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딕과 팀은 이미 다른 손님들에게-주로 여자-끌려가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고 데미안은 반응없는 제이슨에게 흥미가 떨어졌는지 손님들과 악수하는 브루스의 옆으로 가버린 상태였다. 제이슨은 최대한 구석진 자리에서 조용히 와인을 홀짝거렸다. 레드와인의 떫은 맛도, 입술에 와닿는 유리잔의 차가운 감촉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는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청력은 기민하게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를 포착했다.

-저 청년은, 설마, 그-

-그 죽었다던 두번째 양자 아니던가요?

-벌써 몇년이 지난 이제서야 나타난 속셈은 뭐람?

-뻔하지 뭐. 재산 아니겠어. 그나저나 웨인 가도 피 한방울 안섞인 양자들만 잔뜩 들여서 재산만 다 분할되게 생겼군.

-그러고보니, 그 소문 들으셨어요? 브루스 웨인이 자꾸 양자를 들이는 이유에 대한 그 소문 말이에요. 

 

뭐긴 뭐야, 빌어먹을 그 놈의 오지랖 때문이지. 제이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제이슨은 다시금 후회했다. 파티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매분마다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어색한 연미복을 입은 순간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딕이 너도 우리 형제이니 이런 파티에 참석하는 것이 좋다고 했을 때 제이슨은 분명히 미친 소리 하지 말고 꺼지라고 했었다. 하지만 브루스가 쓴 초대장을 내밀었을 때 그는 차마 그것을 찢어버리지 못했다. 그 대신 이미 죽어서 없어진 줄 아는 사람을 파티에 데려가는 게 말이냐 되냐는 정당한 항의를 했지만 딕의 이미 모든 법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노라는 상큼한 미소의 답변에 차마 더 이상 토를 달 건덕지를 찾지 못한 탓에 이렇게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서 있는 것이었다.  

누구든 나한테 말 걸면 죽여버릴거야. 제이슨은 속으로 그렇게 이를 갈며, 그리고 표정으로도 충분히 그 결심을 표출하며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제이슨은 순간 욕이 치밀어 올랐지만 상대방이 여자인 것을 보고 간신히 목구멍으로 도로 밀어넣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통성명 좀 할 수 있을까요? 제 이름은 에밀리 브렉이에요. 

관심없으니 꺼져. 제이슨은 불퉁스럽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왠지 딕과 팀, 데미안, 브루스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은 느낌에 결국 대답하고 말았다.

-전 제이슨 토드...웨인입니다. 

-아, 그럼 혹시 당신이 실종되었다던 그 두번째 양자인가요?

-....네.

괜히 웨인을 뒤에 붙였나. 제이슨은 다시금 후회를-도대체 오늘 후회를 몇번이나 하는지 셀 수도 없었지만- 하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여자는 흥미가 생긴 모양인지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저, 실례가 안된다면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실종되셨던 건지..

-죄송하지만 그에 관해선 말하고 싶지 않군요.

제이슨은 차가운 얼굴로 말을 끊었다. 여자는 단호한 제이슨의 태도에 약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와 다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제이슨은 약간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기자인것 같은데.  

-그러고보니 브루스 웨인에 대한 흥미로운 소문이 있던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무슨...

-브루스 웨인의 양자들이 하나같이 흑발벽안의 미남 미소년들인 것에 대해서 안 좋은 소문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그의 취향에 관해서라던가. 

여자는 느물느물 웃고 있었다. 제이슨은 이제 완벽히 불쾌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거, 질 안 좋은 타블로이드 기자군. 무슨 수로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제이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아하고 완벽한 상류층의 세계. 모든 것이 조근조근하며 섬세하고 은밀하다. 여기서 큰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실례일 것 같았다. 딕과 브루스를 봐서라도-팀과 데미안 새끼는 아무래도 상관없어-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제이슨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봐요, 좋은 말할 때 그만 질문하는 게 좋을 거에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먼저 잘못한 건 그쪽일텐데요.

제이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마치 맹수처럼 흉폭해진 눈빛에 여자는 움찔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그 여자 역시 만만찮은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약간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구요?

원래 성격대로라면, 여자든 뭐든 그냥 당장 기절시킨 다음 질질 끌어 밖으로 내던졌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제이슨은 여자를 노려보았다. 딕이나 팀이라면 이런 인종들을 어떻게 다루는 지 잘 알겠지만 제이슨은 아니었다. 여자는 이미 제이슨에게 남은 수단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제이슨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올라갔다.

-제 동생에게 무슨 볼 일이신가요?

제이슨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딕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딕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팀도 언제 온건지 딕과 함께 서 있었다. 여자도 그들이 누군지 알아본듯 얼굴에도 낭패감이 서렸다. 양자이긴 해도 웨인 가의 장남인 딕과, 웨인 그룹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여겨지는 팀은 함부로 볼 상대가 아니었다. 딕은 다시 한번 완벽한 사교용 미소를 지었다.  

-혹시라도 저희 아버지께 궁금한 점이 있다면 저희 동생이 아닌 아버지께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겁니다. 팀이 도와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시구요. 팀, 이 레이디를 아버지께 소개해 줄 수 있지? 

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팀의 동작은 부드러웠지만 동시에 단호했다. 결국 여자는 팀에게 반쯤 강제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겉보기에는 어디까지나 여자를 에스코트하는 모습으로 보였음은 물론이다.  

 

여자와 팀의 모습이 멀어지자 제이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싱글벙글 여전히 웃고 있는, 그래서 저 면상에다 그대로 와인잔을 던지고 싶을 정도로 상큼한 얼굴의 딕을 째려보았다. 딕은 그 시선을 도대체 무어라 해석했는지, 제이슨에게 찡긋 윙크했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하나도 안 고맙거든.

퉁명스러운 제이슨의 말에도 딕은 다 안다는 듯이 후훗, 하고 소리내서 웃었다. 제이슨의 눈썹이 더더욱 찌푸려졌다.

-제이슨, 너 지금 괜히 왔다고 생각하지?

-내 얼굴 보면 모르겠냐?

제이슨의 얼굴은 살벌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 연미복 안에 분명 나이프와 권총이 들어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험악했다. 물론 딕은 그가 정말로 나이프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면 딕과 팀, 브루스, 데미안 모두 이런 자리에서도 최소한의 무장은 하고 있었고, 제이슨 역시 그들의 가족이었으니까. 

딕은 제이슨과 나란히 선 채로 벽에 등을 기댔다. 둘은 한참동안 파티장 안을 바라보았다. 반짝이고 우아한, 마치 잘 만들어진 유리 세공품 같은 세계에 그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슨에게는 어둠 속에서 권총 소리가 들리는 뒷골목의 세계가 훨씬 더 익숙했다. 이런 곳은 조금만 움직여도 모든 것이 갑갑하게 자신을 죄어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이런 상반된 두 세계를 자유로이 왕래하는 자신의 가족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딕은 어떨까. 제이슨은 흘긋 옆을 쳐다보았다. 딕의 얼굴은 평온했고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제이슨의 시선을 느낀 딕이 얼굴을 돌리며 빙긋 웃었다.

-나랑 혹시 춤추고 싶어?

-아니,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럴 생각 없는데.

-하지만 기껏 파티에 왔는데 춤 한번 못추면 아쉽지 않아?

-저어어어어어어언혀.

정색하고 도리질하는 제이슨을 보며 딕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손을 제이슨에게 내밀었다. 우아하고 반짝이는 미소로 제이슨을 바라보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저에게 함께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총으로 엉덩이를 갈겨주기 전에 꺼져.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이슨은 딕이 자신의 손을 쥐는 것을 뿌리치지 않았다. 딕이 그를 발코니로 이끌었다. 눈부신 달빛이 고담 시의 야경 위로 흩뿌려졌다. 선선한 밤공기가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실내의 음악 소리가 흘러나와 도시 위로 엷게 퍼져나간다. 딕이 제이슨의 한 손을 잡고 나머지 손으로는 그의 허리를 안은 채 마주보며 가까이 섰다.  

-춤 출줄 알아?

-몰라.

-걱정 마, 그냥 따라오면 돼.

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제이슨은 주춤거리면서도 조금씩 그를 따라 움직였다. 딕의 몸짓은 마치 새의 날갯짓처럼 우아했고 부드러웠다. 얼굴을 마주보며, 손을 잡은 채 가슴께의 옷깃이 서로 스치고, 서로의 눈빛이 교차한다. 그때 갑자기 제이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나 지금 여자 역 하고 있는 거지? 

-오, 어떻게 알았대, 우리 제이?

-....죽을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제이슨은 여전히 딕의 손을 놓지 않았다. 느릿한 음악과 춤과 함께 나지막한 대화가 흘러갔다.

-창피한데. 설마 브루스나 팀이나 데미안이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보고 있을걸. 오늘 우리들은 하루종일 너만 보고 있었어. 브루스도, 팀도, 심지어 꼬마 데미도. 

 -행여 창피한 실수라도 할까봐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아니, 널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을까봐. 넌 우리 가족이니까. 

 딕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제이슨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 빌어먹을 기자가 있을 때 그렇게 빨리 와줄 수 있었던 거였군. 제이슨은 빛이 새어나오는 실내를 힐끗 바라보았다. 브루스의 모습이 슬쩍 보였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이슨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때 배트카의 타이어만 훔치지 않았어도....

-어라, 후회하는 거야?

-그래, 그게 내 인생 최고의 실수였어. 항상 후회한다고. 그것만 아니었어도 이 빌어먹을 가족들하고 엮일 일도 없었을 텐데. 

-거짓말하는 아이는 벌 받아.

딕의 말에 제이슨은 피식 하고 웃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딕 네가 어떻게 알아. 제이, 난 보면 알아. 그게 내 슈퍼파워거든. 제이슨 속마음 읽어내기. 하릴없는 대화의 리듬에 맞춰 그들은 천천히 춤을 추었다. 달빛과, 음악과, 도시의 불빛을 배경으로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같은 느린 리듬으로, 그렇게 그들은 함께 마주보며 웃었다.   



그냥 무도회에서 뻘쭘해하는 제이슨을 쓰고 싶었을 뿐. 

'글연성 > D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반뎀딕]감기  (0) 2013.08.27
[딕슨]조각글  (0) 2013.08.09
[팀슨팀]Brother  (0) 2013.08.03
[뎀슨뎀]Be My Robin  (0) 2013.07.29
[딕슨]조각글 - 아마도 15금...?  (0) 2013.07.2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