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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피터]코니 아일랜드의 겨울 바다 본문

글연성/마블

[플래시피터]코니 아일랜드의 겨울 바다

DayaCat 2016. 12. 14. 01:48

For. 킥애스님(@kickass_man)



 피터는 핸드폰을 꺼내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겨울이 성큼 다가온 뉴욕의 공기는 차갑고 시려 손가락 끝이 발갛게 얼어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피터는 언 볼을 언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곧 플래시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베티에게 전화가 온 것은 이틀 전이었다. 담담하지만 어딘가 젖어있는 목소리로, 베티는 플래시와 헤어졌다고 말했다. 피터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플래시도 베티도, 둘 다 그의 오래되고 소중한 친구였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대강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젠가 플래시가 군인인 탓에 오래 헤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베티가 불평한 것이라든가, 혹은 베티와 플래시 사이에 있으면 느낄 수 있던 기묘한 삐걱거리는 느낌 같은 것들. 그래서 피터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안 됐다는, 뻔하디 뻔한 말을 내밀었다. 베티는 고맙다고 말했다.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야, 피터.


 플래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걱정이 되어 피터가 먼저 연락하자 플래시는 흔쾌히 오랜만에 얼굴 한 번 보자고 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가 잘 없잖아, 이참에 만나자. 평소처럼 남자답고 경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피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인지. 피터는 도저히 알 수 없어서 그냥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피터는 이렇게 플래시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피터는 너무 일찍 와버린 탓에 10분째 추운 뉴욕 길거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건널목 신호등이 초록불에서 빨간불로 바뀌며 도로의 자동차가 물살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코너에서 잘 빠진 스포츠카 하나가 나타났다. 빨간색이랑 파란색으로 도색을 하다니, 꼭 스파이더맨 같네. 피터는 쿡쿡 웃으면서 스포츠카를 바라보다가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스포츠카가 피터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스포츠카의 창문이 내려가며 플래시의 얼굴이 드러났다. 고등학교 때 수많은 여자애들을 홀렸던 시원스런 웃음을 머금고서 그는 피터에게 인사했다. “안녕, 피터.” 피터는 벙찐 얼굴로 플래시를 바라보았다. 플래시는 고개를 까닥였다. “뭘 그렇게 멍하니 봐? 자, 타라고.”


 피터는 엉거주춤 차 안에 탔다. 플래시는 엑셀을 밟으며 쾌활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파견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샀어. 모아둔 돈을 여기 다 투자했지.” “그래? 난 네가 스포츠카에 관심 있는 줄 몰랐는데.” “베티를 태워주고 싶었거든. 늘 미안해서 말이야.” 베티, 라는 이름에 피터는 힐긋 곁눈질로 플래시의 얼굴을 살폈다. 플래시는 여전히 웃음을 띤 채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피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베티랑 헤어진 건, 유감이야. 아무래도, 넌 군인이니까... 베티를 자주 못 봐서 그렇게...” 플래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야. 군인인 게 문제였다면 진작 베티를 사귀지도 않았겠지.” “그럼...?” 플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은 코니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파도가 계속 밀려와 인간의 발자국을 지우고 있었다. 어스름이 깔린 푸르고 붉은 빛깔 하늘 속으로 관람차가 반짝이며 천천히 돌았다. 희미한 음악소리가 향기처럼 공기 속을 맴돌았다. 학교 다닐 때는 너무 자주 와서 지겹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는- 그러나 지금은 그 지겨움마저도 어느새 정겹게 느껴지는 코니 아일랜드의 풍경. 피터는 하아, 하고 바다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바닷바람이 피터의 갈색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흐트러트리며 넘겼다.


 “코니 아일랜드, 오랜만이네.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였지, 고등학교 3학년 때 네가 날 모래사장에 꽂아놨을 때였나?” 피터의 목소리는 들뜬 향수에 젖어 있었다. “아마 그럴 거야. 내가 그때... 아마 터치다운! 하고 외쳤었지?” “너 그때 완전 쓰레기 같았어.” 피터가 웃으면서 말하자 플래시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쓰레기였지.” 


 피터는 모래알갱이가 운동화 틈새로 들어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래사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겨울바다는 청회색 빛깔이었고 모래사장은 걸을 때마다 파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플래시는 피터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피터는 밀려오는 파도의 선을 따라 걸으면서 신나게 떠들었다. “겨울 바다도 꽤 좋다, 그치? 여름에 왔으면 북적북적했을 텐데 겨울이라 아무도 없고.” 플래시는 그저 빙긋 웃었다. 피터는 연신 몰아치는 바닷바람에 귀가 빨갛게 얼어 있었다. 피터는 몸을 빙글 돌리며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원래는 베티랑 여기 오려고 했던 거야?” 플래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자 피터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스포츠카로 드라이브해서 올만한 데는 아니잖아. 물론, 나는 좋지만...” “베티와 헤어진 건 모두 나 때문이야.” 플래시의 말이 바닷바람과 파도소리 한가운데 툭 던져졌다.


 피터는 멍하니 서서 플래시를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조금 지친 미소를 짓는 플래시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베티였어. 베티도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거든.” 플래시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울렸으나 곧 파도소리에 쓸려 사라졌다. 플래시는 말과 말의 공백을 채우는 바람소리 속에서 피터를 응시했다. “내가 베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에.”


 피터의 시선은 플래시에게 못박혀 있었다. 피터가 동그랗게 크게 뜬 갈색 눈을 깜박이자 플래시는 쓰게 웃었다. “난, 그래서 미안했고, 어떻게든 보상하고 싶었고... 그런데, 더 이상은 안 되겠더라.” 플래시의 목소리는 낮고 쓸쓸했다. “그럼 왜 베티랑 사귄 거야...?” 피터의 목소리는 약하고 속삭이는 듯 했다. 플래시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처음에는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사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더 나중엔 사랑하려 애썼어.” “그런데, 왜 안 된 거야?” 플래시는 피터를 바라보았다. 겨울바다를 닮은 청회색 눈이 젖은 모래사장의 빛깔을 가진 눈을 응시했다. “난 이미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거든.”



 코니 아일랜드의 바다에는 끊임없이 파도가 쳤다. 고요하고 규칙적인 파도가 조금씩 그 궤적을 달리하며 두 사람의 발밑으로 밀려왔다. 언젠가, 아주 오래 전 그들은 이 해변에 함께 있었다. 더운 여름 햇살 아래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작은 비명소리와 함께. 그때 피터는 플래시 앞에만 서면 두려워 숨이 막혔다. 지금,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전혀 다른 계절, 전혀 다른 관계로 함께 마주보고 선 지금, 피터는 또다시 숨이 막혔다. 플래시가 무슨 말을 할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너무도 두려웠다.


 플래시 톰슨은 피터 파커를 보며 고백했다. “난 널 사랑해.” 파도소리, 바람소리, 희미한 음악소리... 공간을 메우는 온갖 소리의 물결 속에 플래시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쓸려 사라졌다. 그러나 피터는 움직일 수 없었다. 플래시의 말이 만들어낸 요란한 침묵 속에서, 피터는 도망갈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언제나 플래시 톰슨이 피터 파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플래시는 웃었다.


 “맨 처음 여기 서 있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었어.”


 피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플래시를 바라보았다. 플래시는 다시 한 번, 피터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사랑해, 피터.”


 하늘과 바다는 모두 한 데 흐린 색이었다. 희미한 수평선 속으로 흰 눈 조각이 조금씩 흩날리다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겨울의 바닷바람은 소금기를 품고 쉼 없이 몰아쳤다. 코니 아일랜드의 관람차는 언제나처럼 천천히 하늘 속을 유영하듯이 회전했다. 아주 오래 전 그러했듯이, 피터와 플래시는 서로를 마주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티스토리 2만 명 방문자 기념 이벤트로 쓴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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