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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피터]말리부의 밤바다 본문

글연성/마블

[토니피터]말리부의 밤바다

DayaCat 2018. 4. 14. 23:44

말리부의 밤바다

For. 육토 님

마블_토니피터


인생은 고통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정말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고, 피터는 생각했다. 오늘 아침부터 지금 밤까지, 그는 잠시도 도저히 쉴 수가 없었다. 피터가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스타크 인더스트리에서 최근 개발 중인 제품의 프로토 타입을 제작하기 위해 모 업체에서 부품을 오늘까지 납품받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새벽부터 업체에서 전화가 오더니 웬걸, 눈길에 트럭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제품이 죄다 파손이 되었다나?

참고로 프로토 타입은 마케팅 팀이 선정한 100명의 제품 평가단에게 보내 제품 성능을 테스트할 예정이었다. 오늘 부품이 제때 도착하기만 했으면 차질 없이 돌아갔을 텐데, 하필이면 눈이 와서!! 피터는 그 순간 이 하늘에 대고 나한테 너무한 것 아니냐고 소리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급하게 빌딩 숲 사이를 거미줄로 스윙하며 날아가는 사이에도 업체와 계속 통화하고―업체 담당자는 도대체 어디길래 이렇게 바람 소리가 많이 들리냐고 물어보았다―또 통화했지만 결론은 부품을 재생산하려면 시간이 일주일은 더 걸린다는 거였다. 피터는 알겠다고 한숨을 푹 내쉬고는 통화를 끊고서는 소매치기 당한 할머니를 도우러 내려갔다.

3분 카레를 데우는 속도보다 빠르게 뚝딱 소매치기를 잡고나서는 또 달려가며 어떻게든 이 부품을 조달할 수 있는 다른 업체가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만일 이대로 일주일이 미뤄진다면― 일정이 어그러지니 주위 팀원들한테 온갖 원망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마케팅 팀의 그 필 유릭의 히스테리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액막이 역할까지 해야 한다. 절대로, 절대로 그것만은 안돼!

필 유릭은 모두가 유능하다고 인정은 하지만 그 성격은 정말 지랄맞음의 결정체 같은 인간이었다. 무례한 말을 던지는 것은 일상다반사요, 통제광 기질이 심해서 누군가가 프로젝트 관련으로 실수를 저지르거나 차질이 생기거나 하면 난리를 치며 온갖 성질을 부리기로 유명했다. 심지어 마케팅 팀장조차 일개 사원인 필의 눈치를 볼 정도면 말 다했지.

피터는 아침부터 기운도 좋게 가게를 털려고 하던 강도의 입을 거미줄로 쏘아 막으며 골똘히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걸 수습할 수 있지? 일단 비슷한 업체는 죄다 검색해서 전화를 돌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피터는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다시피 하며 의자에 앉았다.

옆의 베티가 무슨 일이냐고 걱정스레 물어보았지만 큰일 났다고 수다를 풀어놓을 여유조차 없었다. 피터는 “지금 일이 좀 꼬였어”라는 말만 하고 서둘러 일하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 전화를 30통 가까이 돌렸는데도 소득이 없었다. 뉴욕 안에 이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이렇게나 적었나. 피터는 탄식하며 책상 위에 널부러졌다. 하도 말을 많이 했더니 입이 얼얼하고 혀가 꼬일 지경인데 전화한 곳마다 자기네들은 그 부품을 취급하지 않는다거나 재고가 지금 하필 없다거나 같은 답변만 내놓았다. 다른 팀원들도 도와주었지만 비슷한 결과만 나왔다. 피터는 이제 거의 절망에 빠져서 마케팅 팀에 일정을 미뤄야겠다고 말할 준비를 했다.

딱 하나, 이 번호에만 물어보고 점심을 충분히 먹어 배를 채운 다음 깨지러 가야지. 피터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수화기를 들었다. 익숙한 수신음이 들리고 피터는 30번 정도 반복했던 말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그런데 이번의 답변은 달랐다.

“가능합니다.”

그 순간 피터는 오예!! 하고 소리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치 터치다운을 방금 해낸 미식축구 선수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포즈라도 취하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은 사무실이라 참았다.

“그런데 오늘 중으로 배송해드리는 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아, 그건 상관없어요! 제가 가지러 갈게요!”

“……무거운데요?”

“1톤은 안 넘죠? 그거면 되는데.”

담당자는 헛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당연히 1톤은 안 넘는다고 했다.

“그럼 그걸로 충분해요. 점심 뒤에 가지러 갈게요!” 라고 대답하고는 피터는 전화를 끊었다. 대충 거리를 계산해보니 거미줄 스윙으로 다녀오면 1시간이면 갔다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좋아. 어차피 짐이야 거미줄로 대충 싸서 등에 지면 그만이다. 스파이더맨인 걸 이럴 때 써먹을 줄은 몰랐는데. 피터는 재빨리 코너스 팀장에게 외출하겠다고 말한 다음 사무실을 나섰다.


업체를 만나고 부품을 전달받고 거미줄로 튼튼하게 싼 다음 어깨에 둘러멨다. 좋아, 이대로라면 일정에도 전혀 차질이 없다. 피터는 마음껏 거미줄 스윙을 할 수 있게 스파이더맨 슈트까지 풀로 갖춰 입고선 힘차게 도약했다.

업체가 있는 스태튼 섬에서 브루클린으로 향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윌리엄스버그 다리가 가까운 곳이었다. 공기를 찢는 요란한 소방차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매캐한 냄새도. 내려다본 순간 빌딩 창문에서 불꽃이 터졌다. 그 순간 피터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구해야만 해. 피터는 몸을 튕겨 불붙은 빌딩 앞에 착지했다. 등에 메고 있는 물건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생각보다 화재는 꽤 컸다. 피터는 정신없이 불길과 자욱한 연기 속을 헤치며 사람을 구했다. 마침내 불길이 잦아들었을 무렵 피터는 이마에 새까맣게 묻은 검댕을 손으로 닦아냈다.

연기를 들이마셔서 앰뷸런스에 실려 간 사람은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로 충분하다. 피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물건!”

물론 이미 부품들은 열에 녹아 못 쓰게 변해 있었다. 피터는 아아, 하고 일그러진 얼굴로 고통스럽게 신음을 내뱉었다.

“망했다…….”


모두가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 피터는 혼자서 고개를 책상에 처박고 있었다. 하도 소리를 많이 들었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집에 갈 기력조차 없어서 책상에 엎어져 있던 바로 그 순간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누가 메시지를 보냈는지 확인하고 피터는 으으, 하고 죽어가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럴 때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 아니야,

이거. 어쨌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중한 슈퍼히어로 동료이자― 무엇보다, 자신의 보스인데.

피터가 답장하려는데 이번엔 아예 전화가 걸려왔다. 성격도 급하시긴. 피터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토니?”

“무슨 일이긴, 늘 하는 그 일이지.”

언제나 유들유들한 목소리였다. 피터는 아주 잘 들리라고 한숨을 과장되게 푸욱 내쉬었다.

“오늘은 안돼요. 너무 피곤해서 집에도 못 가고 사무실에 쓰러져 있단 말이죠. 진짜 오늘만은 안 돼요…….”

“아직 사무실이야?”

토니의 질문에 피터가 네, 하고 대답했다.

“진이 빠져서 집에 갈 힘도 없다고요. 어쨌든 집에 가긴 가야하지만…….”

피터가 이야기하는데 전화가 뚝, 끊겼다. 뭐야, 하고 피터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다시 책상 위에 드러누웠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 소리가 띵, 하고 울렸다. 그리고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피터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토니가 앞에 있었다.

“진짜잖아?”

토니의 말에 피터는 끄응, 하고 이마를 짚었다.

“그럼 거짓말 하는 줄 알았어요? 그나저나 토니도 회사에 있었네요.”

“당연하지. 나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는데.”

“그러시겠죠, 보스. 그나저나 이런 거 누가 보면 안 되는데…….”

“왜, 너랑 나랑 아는 사이인 거 들키면 안 되니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낙하산으로 들어왔단 이야기도 듣기 싫고 제 정체를 짐작하게 되는 것도 싫다고요. 빨리, 빨리 도로 올라가요.”

피터가 질색팔색하며 말하자 토니가 쿡쿡 웃더니 피터에게 다가왔다.

“누군가 오늘 굉장히 힘든 하루를 보내셨나 보네.“

그러면서 토니는 피터의 눈가를 가리켰다.

“아직 묻어있어, 검댕.“

피터는 황급히 주먹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토니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피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토니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뭘 봐? 잡아.”

어쩐지 하라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아서 얼결에 덩달아 손을 내밀었다.

“좋아, 가자고.”

토니는 시원스레 말하면서 피터의 손을 잡았다. 뭔가 낚인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피터는 토니에게 이끌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피터는 헬기를 타고 토니의 말리부 집에 와 있었다. 물론 사무실에 있으면 들킨다고 하긴 했지만,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아니, 그 전에 따라오란다고 따라온 나도 문제다. 어째서인지 토니랑 있으면 언제나 이렇게 말리는 느낌이란 말이지. 하긴 처음에 관계를 시작했던 것도 거의 그래서였지― 피터가 머리를 싸매고 새삼스레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인생과 태도를 반성하고 있을 때 토니가 나타나 가운과 수건을 앞에 툭, 놓았다.

“물 받아놨으니까 목욕해.”

“고…… 고마워요.”

토니는 얼른 가라는 듯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어라, 이 사람이 왜 이러지? 평소라면 옷부터 벗기고 더듬는 것부터 시작할 텐데. 피터는 이상하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지만 토니의 최고급 욕조에서 즐기는 목욕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딱 좋게 데워진 물과 부드러운 거품은 하루 종일 시달려 너덜너덜해진 신경을 부드럽게 가라앉히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하아…….”

기분 좋은 탄식이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마워요, 토니. 오늘 정말 피곤했거든요.”

“뭘.”

영화에서 종종 보던 것처럼 욕조는 유리창 앞에 놓여 있었다. 말리부의 아름다운 밤바다 풍경이 통유리창 너머로 한가득 펼쳐졌다.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은 피터는 조금 창피한 기분도 들었지만 어차피 이 앞은 토니의 사유지라 사람이 다닐 일은 없었다. 토니는 욕조 근처의 소파에 앉아 무언가 일을 하고 있었다. 허공에 떴다 사라지는 수많은 푸른 화면 위로 토니의 손가락이 움직이며 파문을 만들어냈다.

“저, 토니.”

토니의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던 피터가 입을 열었다.

“히어로이면서 회사 일을 함께 하는 건…… 조금 버겁지 않아요? 특히나 토니는 일이 많잖아요? 나야 일개 사원이지만 토니는 사장인데.”

“나야 천재니까. 아무나 못해내는 거지.”

자신만만하다기보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한 태연한 목소리에 피터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시겠죠,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토니 스타크 님.”

피터는 턱을 욕조 위에 괴고는 중얼거렸다.

“역시 똑똑한 사람은 다른가 봐요. 저도 나름 똑똑하다고 자부하는데, 생각보다 일머리랑 공부머리랑 다른 것 같더라고요. 아니 아니, 그냥 히어로 일을 함께 하려고 해서 힘든 건가? 그런데 말이에요, 당장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 같이 힘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고귀한 자는 희생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말 있었는데 뭐였더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넌 그런데 보통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말하지 않았나?”

“맞아요, 맞아. 늘 같은 이야기만 하려니 식상해서 말이에요. 어쨌든 노블레스 오블리주. 맞아요. 그 말은 힘이 없거나 고귀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건가? 싶기도 하고. 고민이 된단 말이죠.”

“오늘 하루 많이 힘들었나 보군?”

토니의 말은 불쑥 튀어나왔다. 떠들던 피터의 몸이 굳었다.

조금 전까지 화면에 못박혀 있던 토니의 새파란 눈동자가 피터를 향하고 있었다. 추궁하는 것도, 비난하는 것도 아닌, 그저 빤히 바라볼 뿐인 시선으로.

피터는 끄응, 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직 따스한 욕조의 물이 목까지 부드럽게 차올랐다.

“맞아요. 오늘…… 정말 일이 많았으니까. 모르겠어요. 히어로 일과 회사 일을 병행하는 건 일단 제겐 너무 힘드네요. 당신 말대로,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라서 그런가 봐요.”

“그럴지도.”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토니의 손이 움직였다.

“하지만― 이걸 봐.”

허공 속으로 영상이 떠올랐다. 개인이 찍어 올린 영상이라 화질은 나빴지만 누가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오늘 오후의 피터였다. 피터가 사람을 등에 업고 불꽃 속에서 달려나오는 모습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불꽃소리, 살수차 소리, 사람들 고함소리와 비명 속에서도― 누군가 외치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스파이더맨!

“―내 생각엔 넌 꽤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낮고 다정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같은 목소리. 피터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 토니를 바라보면 이상한 표정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눈가는 빨개지고, 입은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억지로 악물고 있는 얼굴 같은 것―애써 얼굴을 가렸다.

“고마워요. 전…….”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며 이상하게 꺾였다.

“전, 그 말이 필요했어요.”

토니의 눈이 몇 번 깜박였다. 그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리부의 바다 위로 떠오른 보름달이 그들 사이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나와. 몸이 다 퉁퉁 불어버리겠다.“

토니가 손을 내밀었다. 피터는 물기 어린 미소를 띠며 그의 손을 잡았다. 피터의 손을 다 덮어버릴 것처럼 크고, 따스한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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