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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밀아 검서X마서 판타지AU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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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밀아 검서X마서 판타지AU

DayaCat 2017. 6. 21. 22:31

새로운 왕의 취임식이 끝나고 이어진 것은 요새는 보기 힘든 규모의 무도회였다. 왕의 등극을 축하하는 자리인만큼, 저 먼 나라에서 실어온 희귀한 식재료며, 가격을 안다면 분명 입이 떡 벌어질만한 화려한 온갖 장식들. 나라에서 제일가는 음악가가 신왕을 위하여 새로이 작곡했다는 음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런 무도회라면, 이 나라에서 귀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자로서는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다. 덕분에 여느 무도회라면 볼수 없는 면면들- 가난한 귀족, 괴팍한 귀족, 추문이 도는 귀족, 그리고- 서로 얼굴을 보는 것조차 증오하는 귀족들도, 함께 이 자리에 참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응당 이 거대한 무도회의 중심이 되어야 할 소년은 혼자 발코니에 나와있었다. 금발의 소년은 이 나라의 둘째 가는 실력자인 기사 대공의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인 검서였다. 자신을 둘러싼 채 쉴새없이 이야기를 던지는 사람들-주로 자기 딸이 신붓감으로 아주 좋다는 요지의-에게 한참을 시달린 후 간신히 피난처를 찾아 도망온 것이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와인을 마셔서 달아오른 뺨을 식혀주는 것이 기분이 좋아 검서는 눈을 감았다. 분명히 잠시 후면 페이나 란슬롯 중 한명이 자신을 찾으러 오겠지만, 잠깐만이라도 휴식을 즐기고 싶었다.


그 순간 검서의 위쪽에서 나뭇잎이 부시럭대는 소리가 났다. 별 생각없이 검서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다람쥐같은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시선을 향한 곳에는, 놀랍게도 소녀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마치 원숭이처럼,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꼴에 검서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소녀는 검서와 눈이 마주치자 난처하게 웃었다. 검은 단발머리에 한쪽만 머리를 두갈래로 땋은 모습이 말괄량이 같았다. 소녀는 여전히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참 난처한 자세로 검서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나 떨어질 것 같은데 좀 도와줄래요?"


검서는 왠지 그래야할 것 같은 의무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검서가 손을 뻗자 소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한쪽 손을 나뭇가지에서 떼고, 이제는 다리를 하나씩 떼내려는 순간, 무게중심이 급작스레 이동하면서 몸이 떨어졌다. 검서는 자기도 모르게 소녀의 바로 밑으로 뛰어들어가면서 팔을 벌렸다.


쾅!!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고, 검서는 엉덩이의 얼얼한 고통을 느끼면서 자신의 바로 코 앞에 있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무릎 위에 안착한 소녀도 엉덩이가 아픈지 으으으, 하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빛이 도는 녹색 눈동자와, 약간 가무잡잡하지만 매끈한 피부, 그리고 도톰한 입술이 바로 자신의 앞에 있었다. 검서는 왠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덕분에 살았어요. 만약 그대로 있었다면 머리를 바닥에 박고 말았을걸요."


소녀가 몸을 툭툭 털며 일어서면서 말했다. 검서도 같이 몸을 일으키면서, 소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저, 근데 도대체 나뭇가지엔 왜 올라간 거지?"

"그거야 자꾸 사람들이 귀찮게 굴고 그러니까 숨어있었는데 시종이 와서 자꾸 나를 찾아대잖아요. 그래서 안 들킬 데가 없는가 찾아보다가 저 나무 위가 적당해 보이길래 올라갔는데 그만 그렇게 된거죠."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표정은 정말로 귀찮아 보이는 것 같아서 검서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었다. 어지간히 특이한 소녀였다. 그때 갑자기 소녀가 쉿!하고 입가에 손을 갖다댔다. 저 멀리에서 긴 머리를 가진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소녀는 검서를 갑자기 끌어안더니 발코니의 벽 뒤로 그를 끌고 갔다.


"이..이게 무슨.."

"쉿, 조용히 해봐요."

"마서. 널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으면 엘이 네 몸의 털을 전부 다 뽑아버릴거래. 어딨어, 마서?"


긴 머리의 여기사가 발코니 근처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소녀는 벽 뒤 그림자에 숨어서 검서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아무래도 소녀의 이름이 마서인가 보다, 검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사는 그렇게 열심히 소녀를 찾을 의지는 없는지 그냥 몇 번 휘휘 둘러보고 떠났다.


"후와- 살았다."


숨을 죽인채 지켜보던 마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서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자신의 입을 틀어막던 손이 코를 막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근데 저 분은 누구신지..? 그대를 애타게 찾고 있는 듯 하다만."

"아, 제 호위기사예요. 별로 날 호위하려는 의지는 안 보이는 것 같지만."


마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호위기사까지 있다면 분명 매우 지체높은 가문의 영양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검서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신경쓸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검서는 레이디에게 응당 보여야 할 예의 바른 태도로, 마서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저렇게 찾고 있으니 가보는 게 좋지 않겠소? 누구나 너무 오래 보이지 않으면 불안한 법. 가서 근심을 덜어드리는 것이 좋겠소."

마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키지는 않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감을 느끼지도 않는 듯 했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그렇게 하는게 좋겠죠. 나가서 사람들한테 시달리는 것도 귀찮지만, 엘이 내 털을 죄다 뽑아버리는 건 백배로 귀찮고 힘들테니까요."


어휘 선택이 정말 보통 레이디 같지는 않군. 검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서는 그런 검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서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 순간, 검서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고마워요. 아까 날 구해줘서."

"...별말씀을."


그리고 마서는 곧바로 몸을 돌려 무도회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검서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서가 향한 곳은 마법사 대공이 서 있는 곳이었다. 기사 대공과 마법사 대공은 이 나라 귀족들의 정점에 서있는 이들이다. 특히나 기사 대공은 나라의 모든 기사들, 마법사 대공은 이 나라의 모든 마법사들의 우두머리이며 물론 그 자신이 가장 뛰어난 기사이고, 마법사이다. 그러나 확연하게 다른 성향 때문에 항상 두 대공 가문은 불화가 끊이지 않았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결코 두 대공은 한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새로운 왕이 등극한 것을 축하하는 무도회 정도의 자리가 아니고서는. 


그런데 지금 마서는 마법 대공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서, 인사도 없이 곧바로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검서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때 마침 근처에 있던 페이가 보였다. 검서는 손짓해서 페이를 불렀다. 그리고 마서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레이디는 도대체 누구신지..?"

"레이디 아닌데요? 마법 대공의 아들이자 후계자잖아요."


이럴수가. 검서는 충격적인 사실에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여잔줄 알았는데 남자고, 우리 가문의 원수나 마찬가지인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고... 아, 그래. 어쩐지 한번 들어본 이름 같더라니. 왠지 드레스를 안 입었더라니. 검서는 진작에 알아채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옆에 선 페이가 검서가 어디 아픈가 걱정하면서 지켜보고 있는 것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말이다.

 

 

 

몇 주일 후, 한 달에 한 번 있는 귀족 회의가 다가왔다. 군사, 경제, 행정 등 모든 종류의 안건을 다루며, 말 그대로 나라의 가장 큰 결정이 이루어지는 자리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자신의 후계자들을 데려오는 귀족들도 제법 많았다. 이 곳에서 만나는 귀족들이 다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이들이기에 이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경험이고 큰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검서 역시 아버지인 기사 대공을 따라 회의에 자주 따라왔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의 옥좌 왼편에 기사 대공이 서자 검서 역시 그 뒤를 따라 섰다. 마침 저 멀리서 마법사 대공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 뒤에 따라오고 있는 자가 있었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못 본 모습이었다. 검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초록색의 로브를 입고 미끄러지듯이 들어오는, 흑색 단발의 키 작은 소년. 마서였다. 아버지인 기사 대공도 마서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마법사도 후계자 교육을 시작하는 모양이구나."


마서는 무도회장에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눈을 내리깔고,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채 걸어가는 모습은 낯설었다. 그 때, 마서가 고개를 들었다. 검서와 시선이 마주쳤다 미끄러졌다. 마서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검서를 향해 싱긋 웃었다. 검서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마주 웃어주었다.

 

왕이 등장하자 경내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왕이 왕좌에 앉으면, 회의는 시작된다. 그리고 몇가지 안건이 차례로 보고 되고, 귀족들이 이에 대해 회의하고 해결책을 내놓으면, 왕이 경청하고 결정한다. 오늘의 안건은 외적이 계속해서 국경선을 침범한다는 것과, 기근이 심해지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마법사 대공과 기사 대공의 사병이 도시 안에서 전투를 벌여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앞선 안건들이 차례로 토의되고, 마지막 안건이 보고되자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건의 개요를 듣고 난 왕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두 대공 다 짐에겐 너무나도 중요하고 과분한 이들이라, 함부로 단죄하거나 심판하고 싶지는 않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오래된 그대들 사이의 원한으로 인하여 유혈 사태가 벌어진 것도 이미 십수번. 짐은 사태가 이미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겨 특단의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


검서는 기사 대공이 움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좌중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지금 여기 서있는 귀족들은 대부분 다 기사 대공 파 아니면 마법사 대공 파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유혈사태가 일어난 판에 섣불리 말을 꺼낼 자는 없었다.


"짐은 두 대공의 사병을 몰수하며, 두 대공의 후계자를 왕궁에 데려와 함께 생활하며 교육시키도록 한다. 이는 더 이상의 원한이 쌓임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는 짐이 왕으로써 하명하는 것이니, 당장 이행되어야 할 것이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결국엔 볼모로 잡아두겠다는 거군. 검서는 왕의 속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버지 기사 대공은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법사 대공도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검서는 지금 이 상황보다는, 바로 저기 맞은편에 서 있는 마서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그와, 왕궁에서 함께 생활하게 될 것이다. 마서 역시 살짝 고개를 들어 검서를 바라보았다. 검서는 기분이 유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왕궁에서 생활한 지 3일째, 검서는 왕궁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사실 별로 달라진 것도 없긴 했다. 어차피 저택에서 생활할 때도 하인과 하녀가 모든 허드렛일을 했고, 자신의 시종인 페이와 호위기사이자 검술 스승인 란슬롯도 왕궁으로 같이 왔기에 적응할 거라고는 달라진 침대 방향 정도가 전부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불만족, 아니 궁금한 점이 있었다. 마서는 어디에 있는거지? 검서와 마서가 왕궁에 온지 3일이 되었는데도 아직 서로를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였다. 왕궁이야 워낙 넓으니 그럴수도 있지만, 어디에 사는지조차 제대로 안 알려주는 건 너무하다 싶었다. 아무리 볼모로 삼으려고 대충 핑계대고 데려왔다 쳐도, 얘기했던 대로 같이 교육은 시켜줘야지 그것도 안 해주는 건 너무 속보이지 않냐고, 혼자 작게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날, 예법 수업이 끝나자 검서는 할 일이 없었다. 뺀질이 란슬롯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페이는 늘상 바쁘니까 부르기도 뭣하다. 그렇다고 이토록 햇살이 좋은 오후에 방에 틀어박히고 싶지도 않았기에 검서는 산책을 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왕궁은 3일을 걸어다녀도 모자랄 만큼 넓다. 하릴없이 이 나라 제일 가는 정원을 감상하며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검서는 천천히 정원을 감상하며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검서는 자신이 낯익은 장소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회가 열렸던, 그리고 마서를 만났던 그 발코니의 바로 아래였다. 마서가 매달려 있던 나무가 우뚝 서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검서는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들어 무성하게 이파리가 달린 나무를 바라보았다. 저기 나뭇가지에 마서가 매달려 있....네?


나뭇가지에, 이번에는 나무늘보처럼 꼴사납게 매달린 게 아니라 안전하게 착석해 있는 마서가 있었다. 무성한 녹음 사이로 초록색 옷자락이 길게 늘어져 바람에 흔들렸다. 한껏 느긋함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검서는 황망해져서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마서가 검서의 존재를 눈치챘다. 마서가 살짝 손을 흔들자 검서도 멍하니 있다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여기 올라올래요?"


어릴 적엔 자주 나무를 탔지만, 나이 좀 든 뒤로는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데.. 하지만 상관없겠지. 검서는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검서는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 나무타기 실력을 보여드리지. 그대야말로 저번처럼 떨어지지나 말라고."

 



호기롭게 말한 것과는 달리, 제법 낑낑대고 나서야 마서가 앉은 나뭇가지에 같이 앉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나무 위로 올라오니 그늘 사이로 바람이 불어 무척이나 상쾌했다. 검서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마서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도 숨어있는 겐가?"

"일단은,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사람들은 제가 빈둥대는 게 그렇게 싫은가봐요. 항상 사람을 못 괴롭혀서 안달들이죠."

"..보통은 빈둥대면 안 되지 않나."

"뭐, 세상의 상식은 그렇지만. 제 인생의 목표는 가능한한 편하게, 귀찮은 일 없이 살자여서요.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 인생 그렇게 급할 필요는 없잖아요?"


아, 그렇군. 이 자는 나와 다르다. 주위의 환경에 짓눌리지도 않고 책임감에 얽매이지도 않은 자유로움. 검서는 말 그대로 태평해보이는 마서의 옆얼굴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그래서 부러운 걸지도 모르겠다. 검서는 검을 휘두르느라 굳은살이 잔뜩 박힌 자신의 손을 들여다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검서의 귓가에 마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검서씨같은 사람이 이 세상엔 더 필요하겠죠. 당신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제가 맘껏 빈둥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마서는 천진난만하고 태평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검서 역시, 마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가슴 속 어딘가가 시원해지는 미소였다.

 

 


알고보니 마서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검서가 있는 건물의 바로 옆이었다. 넓디 넓은 왕궁에서 그나마 가까운 곳에서 살게 해준 것이 배려라면 배려랄까. 그러나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검서가 마서를 3일동안이나 못 봤던 이유는, 보통 마서는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몰래 숨어서 낮잠을 자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늘지고 시원하니 딱 낮잠자기 좋은 곳만 골라서. 고양이는 가장 안락한 곳을 본능적으로 안다는데. 검서는 마서가 분명 전생에 고양이였을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말은 바꿔 말하면, 하루 정도는 땡땡이치고 싶을 때, 마서를 찾아가면 농땡이와 낮잠에 최적화된 장소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검서는 마서 곁에 있는 것이 좋았다. 마서와 있으면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면서, 하릴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 예를 들면, 지금처럼.

 

"구름은 어떤 맛일까요?"

"흠.. 솜사탕과 비슷한 맛이지 않을까 싶은데. 일단 저리 폭신해 보이니 말이야."

"에이, 그렇게 간단하면 재미 없잖아요. 겉보기엔 저렇게 하얗고 맛있어 보여도, 사실은 먹으면 의외로 짜다든가.. 아니면 비린내같은게 날수도 있고. 아쩌면 물비린내가 나지 않을까요? 구름에서 비가 내리니까."

 

검서는 고개를 돌려 재잘대는 마서를 바라보았다. 지금 둘은 잔디밭에 나란히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삐죽삐죽 자란 잔디 사이로 마서의 단정한 옆선이 보였다. 마서의 머리카락 끝에서 부드럽게 반사되는 햇빛. 공기 속에서 부유하는 먼지들. 멈춘 것 같은 시간. 검서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하지만 검서는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을 뿐. 아니, 인정할 수 없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저 올리브빛 눈동자에, 싱긋 웃는 입술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검서는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아도 멈추지 않는다. 커지는 마음을 계속해서 품다가, 끝끝내 감당하지 못하고 눈물을 떨어트리는 구름처럼, 자신도 그리 되리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요즘 태도가 불량해지셨소."

 

란슬롯의 말에 검서는 한참 검을 휘두르다 말고 란슬롯을 바라보았다. 란슬롯은 한쪽 손을 허리에 짚고 한쪽 손은 땅에 박힌 장검을 짚은 채 비스듬히 서있었다. 지금 일단 그런 말을 하는 사람부터 모범적인 기사의 자세는 아닌 것 같은데.

 

"그대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보통 그대와의 검술수업은 잡담이 80%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건 내 신조라고 할 수 있는 거요. 스승과 제자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는 없는 딱딱한 옛날의 수업방식을 지양하고 제자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알고자 하는 스승의 마음의 발현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듯 하오."

"..그냥 수업하기 싫다고 하지 그래."

"참나.. 내가 만약 수업하기 싫었다면 그냥 나타나지 않았지, 뭣하러 재미도 없는 잡담을 하겠소? 날 도대체 뭘로 보는 거요?"

"아깐 제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면서!" 


검서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하자 란슬롯은 갑자기 검서의 손목을 손으로 찰싹 내리쳤다.

 

"아얏!"

"손목의 방향이 틀렸소."

 

..그래, 말을 말자. 자신을 비난하는 분위기로 흘러갈것 같으니까 대놓고 말을 돌리는 저 뻔뻔함이란. 검서는 그냥 열심히 검을 휘두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란슬롯이 툭, 말을 던졌다.

 

"대공께서 어제 요즘 소공작의 태도가 어떤지 물어보셨소."

 

검을 휘두르던 검서의 손이 멈췄다. 소공작은 바로 자신이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자신의 근황을 물어보았다는 뜻인데.. 검서는 갑자기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자신은 누가 보아도 예전보다 나태해졌다. 거기다가 마서.. 검서는 마른 침을 삼켰다. 마서와 친해졌다는 것을 아버지가 알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좋아하지는 않으리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본인은 답했소만, 다른 이들도 그리 대답했을지는 확신하기 어렵구려."

 

란슬롯의 말을 검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란슬롯에게만 검서에 대해 물어보았을리가 없었다. 아니, 그전의 대공의 정보력이라면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알아서 정보가 들어왔을 것이다. 사실 란슬롯에게 물어본 것도 아버지가 한번 떠보기 위한 것임이 틀림없다. 자신이 들은 바와 일치하는 지 아닌지. 그렇다면 누가 봐도 명백하게 변화한 검서의 태도를 보고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 란슬롯은, 사실 위험한 모험을 한 셈이 된다. 검서의 스승이자 호위기사이긴 하나 일단은 기사 대공의 수하인데 그에게 거짓말을 한 거니까. 아마도 란슬롯은... 자신을 보호해주고 싶었음이 틀림없다. 지금 이렇게 넌지시 말하는 것도, 사실은 모두다 그런 것이리라. 검서는 란슬롯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란슬롯, 고맙다."

 

란슬롯은 검서의 말을 들은체 만체 하면서 다시 한번 휘두르기를 100번, 그리고 찌르기를 200번 더 하라고 시켰다. 검서는 고맙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취소했다.

 

 

회색빛 구름이 하늘에 낮게 깔린, 흐린 어느 날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처럼 하늘은 요란스런 검은빛으로 뒤덮였고 습기 찬 공기는 숨이 막힐 것처럼 끈적끈적하게 엉겼다. 이런 날에 우산도 없이 밖에 나와있는 건 비맞기를 각오한 자뿐일 것이다. 혹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 자이거나. 마서는 후자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의 스승들은 그를 가리켜 '머리는 총명하나 의욕이 없어 심히 안타깝다'라고 평하였으나, 마서는 그런 평판마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공작가의 자제란 사람이 비를 맞고 쫄딱 젖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 따위는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서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서는 고개를 들어 두꺼운 유리창문을 바라보았다. 엘에게서 듣기로는 오늘 기사 대공이 검서를 방문하러 온다고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서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검서는 누가 뭐래도 성실한 사람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훈련하고. 마서는 저렇게 뭐든 성실한 사람을 처음 봐서 신기할 정도였다. 사람이 좀 적당히 게으름도 피우고 그래야할텐데 저렇게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다니 피곤하지는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자신하고 친해지더니, 어쩔 수 없이 수업 몇번 땡땡이도 치고(마서가 주로 꼬셔서) 어쩔 수 없이 몇번 훈련도 빼먹었던 것이다. 기사 대공은 엄격한 데다 후계자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들었다. 거기다 원수 가문인 나와 친하게 지냈다는 것을 알면 분명 검서는 엄청 혼날 것이다. 마서는 검서를 어떻게 위로해야할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책임져야할지 골똘히 생각했다.

 

 

검서의 방 안에 서있는 기사 대공은 생각보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검서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최근에 나태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마서와 친하게 지냈다는 사실이 자꾸 검서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검서는 물론 그게 잘못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가문의 이름과, 아버지의 앞에서는 왠지 떳떳할 수가 없었다.

기사 대공은 몇 가지 의례적인 안부 인사를 던진 다음, 본론을 꺼냈다.

 

"요즘 태도가 예전같지 않다던데."

"환경이 바뀌어 나태해졌나 봅니다.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준비했던 대답이 재빨리 튀어나왔다. 검서는 너무 빨리 대답했나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도 없었다. 검서는 조마조마해햐며 기사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놀랍게도, 기사 대공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를 가지고 무어라 질책하거나 더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기사 대공은 다른 소재를 꺼냈다.

 

"요즘 마법사 대공의 후계자와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 들려오던데."

"아..그것은.."

 

아까와는 달리 미리 준비해놓은 대답이 얼른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냥 오다가다 몇번 얼굴을 본게 다일뿐이라고 말해야하는데, 쉽사리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검서는 그 대신 말을 얼버무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완벽한 긍정이었다. 그는 눈을 꾹 감고 불호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잘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검서는 눈을 크게 뜨고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반어법인가했는데, 기사 대공의 얼굴을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진실로 흡족해하고 있었다. 검서는 혼란스러워졌다. 뭐지, 원래 마법사 대공 이야기만 꺼내도 불같이 화내시는 분 아니었던가? 우리 가문의 원수 같은 거 아니었나? 혼란에 빠진 검서를 내러벼두고, 기사 대공은 흐뭇한 듯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역시, 너는 내 자식답게 똑똑하구나. 마법사 대공의 자식하고 친해지다니 말이야. 그쪽의 약점은 얼마나 알아냈느냐?"

 

아, 그런 거였군. 검서는 기사 대공이 어떻게 상황을 생각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처음의 당혹감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심장의 쿵쾅거림도 멈췄다. 그대신 뱃속 깊은 곳에서, 열기 같은 것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검서로서는 난생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지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분노였다.

 

"물론, 아무리 후계자라고 해도 사생아 따위한테 기밀을 알려줄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모르진 않을테니까. 친해질만한 가치는 분명 있을 것이다. 좀 더 그와 접촉을 유지하거라."

 

'사생아'라는 단어에 순간 검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사생아? 검서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마서가, 사생아라고? 이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검서는 알 수 없었다. 검서는 아버지를 쳐다보았지만, 기사 대공은 할 말이 끝난 것 같았다. 그는 몸을 돌려 란슬롯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검서를 쳐다보고는 당부했다.

 

"어떻게든 그와 친해져, 약점을 알아내도록 해라. 그리고, 나태함은 이번만 봐주겠다."

 

말이 끝나자 기사 대공은 몸을 휙 돌렸다. 길다란 망토가 같이 휘날리면서, 그의 모습을 가렸다. 검서는 방 안에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 가슴 속에서는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서 소용돌이치는데, 도대체 이게 뭔지 알수가 없었다. 분노인지, 당혹함인지, 괴로움인지, 온갖 색깔들을 물에 부어 풀어버린 것처럼,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가 없는 감정. 검서는 중얼거렸다. 마서를 만나야 해. 이 모든 것을 풀어줄,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해줄, 단 하나의 한 사람.

검서는 페이를 소리쳐 불렀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페이가 곧 나타났다.

 

"페이.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마서를 찾아서, 나한테 데려다줘."

 

페이의 눈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지만, 절박한 검서의 표정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검서 씨. 절 찾았다면서요?"


마서는 쭈삣쭈삣거리면서 어두운 검서의 방 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검서는 방 안 한구석, 그것도 하필이면 제일 어두운 곳에 앉아있어서 실루엣으로만 모습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마서는 몸을 움직여 방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사실 마서는 페이가 자신을 찾았을 때,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분명 검서는 자기 때문에 혼났을테니까, 분명히 자기한테 화가 단단히 났을 것이다. 마서는 사고치고 주인한테 혼나는 강아지의 심정이 이런걸까, 하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검서에게로 다가갔다. 검서는 몸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자기 목소리를 못들은걸까?


"저, 검서 씨?"


마서가 조심스레 검서에게 말을 걸며, 그의 몸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검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돌렸다. 덩달아 마서도 깜짝 놀라 뒤로 주춤, 하고 물러섰다. 하지만 곧 검서는 마서인 걸 알아채자,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도 검서가 화는 안난 것같아 마서도 배시시 같이 마주 웃어주었다. 그 미소에 검서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검서는 조용히 마서의 손을 잡았다. 마서는 아무 것도 모른채 같이 마주잡아주었다. 마서를 보자 검서의 마음 속에서 뒤섞여 폭발할 것 같던 감정들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혼란도, 분노도, 반항심도, 몰이해도, 당혹감도 모두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검서는 마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난 그대를 결코 이용하지 않아."

 

마서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검서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마서의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행여라도 실수로 놓칠까봐 두려운 듯이. 검서는 이제 그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한 음절, 한 음절 조심스레 말했다. 조금이라도 잘못 전달될까봐, 조심스럽게, 그리고 마서를 향해서.

 

"난.. 그대를 만나게 되어서 무척이나 기쁘다고, 말하고 싶어."

 

마서는 천진하게 웃으면서, 그리고 진심을 담아서 대답했다. 

 

"저도 검서 씨를 만나서 기뻐요. 저도 검서 씨와 친구가 된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 순간, 검서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검서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자신은 '친구'라는 것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검서는 그 순간에야, 마음 속에서 들끓던 감정을, 직시하고, 이해했다. 난, 그대를 가지고 싶다. 지금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저 녹색 눈동자. 약간 거무잡잡한 매끈한 피부.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그 입술. 무도회장에서 만난 그 순간부터 나는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이 마음을 부르고, 마침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모인 이 마음은, 마침내 이렇게 넘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검서는 마서의 손을 붙잡은 채, 그의 녹빛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맞췄다.

 

 

 

마서는 웬일로 온 정신을 집중하는 중이었다. 성냥개비 탑을 마침내 완성하기 위한 화룡점정, 탑의 꼭대기를 세우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혼신이 담긴 손길로 모든 걸 완성시키고 이제 마지막 성냥개비를 지붕 위로 세우는 것만 남았다. 마서는 행여나 숨결 때문에 성냥개비가 떨어질까봐 숨까지 꾹 참고 조심스럽게, 아주아주 천천히 성냥개비를 탑으로 접근시켰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서 마침내, 이렇게 조심스럽게 세우면..!!!

 

"으악!!"

 

실수로 힘을 잘못 줬는지 성냥개비 탑이 우르르르 무너져버렸다. 마서는 허망하게 성냥개비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1시간 동안 공들인 탑이 허사가 되어버렸다. 마서는 한숨을 푹푹 쉬다가, 결국 그냥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그리고 좀 전까지는 자신의 웅대한 이상을 건설하기 위한 주춧돌이었으나 이제는 그저 끝이 빨갛고 동그란 조그만 나무막대기가 되어버린 성냥을 집어들며 애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에휴..."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마서는 성냥을 집어던지고 고개를 엎드렸다. 성냥개비 퍼즐도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검서와의 일을 잊기 위한 소일거리로서는. 일부러 잠이 오지 않을만큼 낮잠도 자봤고, 성냥개비 퍼즐은 이미 실패했고, 공부는 지루해서 그런지 하면 할수록 오히려 생각이 더 났고, 밖에 나가 있어도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 사이 검서를 보는 것 자체를 피하고 있는데도, 조금도 나아진 게 없다. 마서는 한쪽 뺨을 바닥에 댄 채, 작게 중얼거렸다.

 

"왜 그랬을까...."

 

검서의 입맞춤에 마서는 눈을 크게 떴지만, 당혹함과 단단하게 붙들려진 손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올 때는 거의 울뻔했다. 난생 처음 해보는 경험에 몸이 딱딱하게 굳고 머리가 핑글핑글 현기증이 났다. 다행히도 검서도 그 뒤는 어떻게 하는건지 모르는 모양인듯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검서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자기도 자기가 한 짓이 당황스러운 듯, 차마 마서의 눈을 못 마주치고 입속으로 뭐라 웅얼거리다가, 머리를 막 헤집다가, 결국 고개를 떨군 채 더듬으며 말했다.

 

"저.. 그.. 당황하게 해서.. 미안하고..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그게 그만..."

 

그다지 변명처럼 들리지 않는 변명(이라기보다는 횡설수설에 가까운)을 하다가 결국 검서는 이게 더 역효과만 날뿐이라는 걸 알고 입을 다물었다. 이 모든 상황이 어리벙벙하기만 한 마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백지가 된 것마냥, 몸은 석고라도 바른 듯 딱딱하게 굳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은 채 그저 검서가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검서는 으으으으 하고 괴상한 신음을 내뱉으면서 안그래도 까치집인 머리를 더 헤집더니 결국 벌떡 일어섰다.

 

"나, 나 잠깐 마음의 정돈을 하고 오겠다!!"

 

그렇게 검서는 마서가 붙잡을 틈도 없이-사실 붙잡기도 힘들었지만- 줄행랑을 쳐버리고 그 뒤로 얼굴을 한 번도 못 본지 벌써 3일째인 것이다. 아마, 틀림없이 검서는 자신이 실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무척이나 마서가 기분나빠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는데...."

 

마서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깜짝 놀랐다. 사실 남자한테 키스를 당하면 기분나빠야할 텐데, 예상밖의 행동이라 놀랐을 뿐 그렇게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검서가 자신을 계속 피하는 게 아쉬웠다. 검서가 이상하게 행동하니 나도 이상해지는 건가. 마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기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계속 이렇게 피하는 것은 좋지 않다. 만나서, 말해야 하는데...

마서는 몸을 돌려 누워서 위를 바라보았다. 천장의 화려한 무늬를 눈으로 좇으면서, 마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런데 뭘 말하지?"

 

 

 

 

여름이 저물어감과 동시에 새로운 소식이 날아들어왔다. 이제 마서와 검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왕궁에 들어온 지 넉 달만의 소식이었다. 그들의 아버지, 대공들이 탄원했다고 한다. 아마 말이 탄원이지, 이미 왕과 맞먹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니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탄원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고, 계속 무시하던 왕도 결국에는 굴복하고 말았다. 그 대신 젊은 왕은 그들이 가진 군사지휘권 일부를 빼앗는 것으로 타협했고, 그리하여 마서와 검서의 왕궁 생활도 끝이 나게 된 것이었다.

 

갤러해드에게 그 소식을 듣고 마서가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은 불만이었다.

 

"아, 뭐야. 기껏 익숙해졌더니 또 돌아가래. 이건 무슨 똥개 훈련도 아니고."

"사실은 저택에 돌아가면 농땡이 치기 힘들어서 그러는 거지?"

 

갤러해드가 정곡을 찌르자 마서가 움찔했다. 사실 어느정도 맞는 말이었다. 왕궁은 더럽게 넓어서 수업을 빼먹기 매우 쾌적한 환경이었지만 저택에선 그렇지 못하리라. 마서는 대놓고 불평은 못하고 속으로 조그맣게 꿍얼거렸다. 마서야 그러든 말든 갤러해드는 남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당장 돌아가라는 것은 아니야. 비록 일부긴 해도 지휘권이니까, 넘기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게 되거든. 일단 관료들은 일주일 정도로 예상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게 완료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거지."

"그렇다면..."

 

다시 말해, 검서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마서는 순간 초조해졌다. 벌써 한 달 가까이 검서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일주일밖에 안 남는다니... 마서는 이대로 아무 말 없이, 얼굴 한 번 보지 못한채 헤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헤어진다면, 영영 스쳐지나가는 관계로만 남을테니까. 그러기는 싫었다. 검서가 자신을 피하든 말든, 자신은 이미 검서를 친구로 생각했으니까. 마서는 결심했다. 찾아오지 않는다면, 찾아가면 그만이라고. 마서는 몸을 돌려 뛰어나갔다.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검서가 거주한 방이었다. 말이 방이지 에지간한 평민의 집보다 더 크고 화려했다. 마서는 급히 달려와서 헐떡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화려하게 양각된 문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하지? 마서도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마지막 만남은 제법 껄끄럽게 끝났었다. 하지만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검서가 여기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다. 그냥, 검서가 여기 있는지만 확인을 해보자. 마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벌컥 열고 검서를 불렀다.

 

"검서! 나 너한테 할 말이..."


마서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사 대공이 서 있었다. 맞은편에는 검서가 서 있었다. 둘 다 마서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서는 검서를 한번 쳐다보고, 기사 대공을 한번 쳐다보고, 속으로 눈물의 후회를 했다. 나, 최악의 타이밍에 왔구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검서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솔직히 누군들 이 상황에서 놀라지 않겠는가. 기사 대공은 눈살을 찌푸린 채 마서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먼저 입을 뗀 것은 기사 대공이었다.

 

"아아, 너였군. 마법사 대공의 후계자가. 다른 이의 방에 들어오는 예법은 배우지 못한 모양이군."

"저.. 죄송합니다, 대공. 실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서는 재빨리 사과를 하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기사 대공의 말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지. 여기에 온 것은 필시 볼 일이 있어서 온 것일텐데. 기왕 온 거 헛걸음하면 그렇지 않은가. 거기다가 나는 자네에게 궁금한 것이 많이 있고."

 

마서는 울고 싶어졌다. 얼른 여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은데,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마서는 검서에게 SOS를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검서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하고 소리지리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도 없어서 마서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었다. 기사 대공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자, 마서는 주저하며 다가갔다.

 

"마법사 대공은 요즘 안녕하시나?"

"저도 아버님을 뵌지 오래되어서.. 그러나 별 일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사 대공이 무표정한 얼굴에서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다기보다는 이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짐승이 위협하듯. 마서는 입의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며 '널 여기서 죽여주지.'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래? 역시 사생아란 말인가. 후계자 교육은 제대로 받고 있는지 모르겠군."

 

기사 대공의 말에 마서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지금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사생아를 후계자랍시고 내세워야 하는 마법사 대공의 처지에 대해서. 그리고 자격이 없는 자신에 대해서. 마서는 기사 대공의 얼굴을 쳐다보며 똑바로 대답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고의 스승에게 교육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 최고의 스승인 갤러해드는 사실 자기 취미생활하기에 바쁘고, 거기다 마서도 맨날 수업을 빼기에 바쁘기 때문에 약간 양심에 찔리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기사 대공에게 질 수는 없었다.

 

"교육을 받는다고, 천한 피가 사라지나? 피부색을 보아하니 천한 이방인의 피도 섞인 것 같군."

 

마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물론 어머니가 외국인, 거기다가 평민 출신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었다. 마서는 심장부근에서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그대신 단호한 눈빛으로, 분노로 차갑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역시 대공가의 핏줄이며 후계자입니다. 더 이상의 모욕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의를 지켜주십시오."

 

기사 대공은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짐승의 흉포한 미소였다. 하지만 마서는 주눅들지 않고 기사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검서는, 그 모든 것을 놀람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기사 대공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갔다.

쾅, 하는 소리 이후 남은 것은 정적이었다. 마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창문에서 비치는 빛때문에 음영이 진 그의 모습은, 처연하고 슬프며 화나보였다. 검서는 차마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마서와는 달랐다. 하지만, 마서는 곧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야, 검서씨 아버님은 되게 무서우신 분이시네요. 무서워서 죽을뻔했어요."

 

마서는 웃으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서는 마서의 눈이 웃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가가 떨리고 목소리는 애써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듯 유달리 톤이 높았다. 검서는 마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정말이지 무서워서 주저앉을 뻔 했는데. 사실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검서는 깜짝 놀랐다. 마서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시작하고 있었다. 마서는 얼른 소매로 눈을 닦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검서는 마서의 손을 잡았다.

 

"하하.. 제가 왜 이럴까요. 이상하네요."

 

눈물이, 계속, 한 방울, 두 방울. 마서의 미소 위로 떨어졌다. 멈추지 않고. 계속. 검서는 마서를 바라보았다. 마서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느긋하고 낙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속에 꺾이지 않는 단단한 심지를 가진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상처받는 것이다. 누구도 모욕과 괴로움에는 익숙해질 수 없다. 그러나 마서 역시... 검서처럼, 남 앞에서 마음껏 울 수조차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검서는 마서의 볼을 쓰다듬었다. 눈물로 얼룩져 축축하고 따뜻했다. 마서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며, 검서는 마서의 입술에 다시 한번 키스했다.

 

잠시 후, 검서가 입술을 뗐다. 마서는 더이상 울지는 않았지만, 약간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 커져있었다. 하지만 곧 하하하, 하고 웃으며,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두번째네요."

"기분나빴다면 미안하게 생각해."

 

검서의 사과에 마서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아뇨아뇨. 기분나쁘진 않았어요. 사실은, 첫번째도요."

 

이번엔 검서가 놀랄 차례였다. 마서는 남아있는 눈물자국을 손으로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 그의 마음속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안돼요. 그 말을 하러 왔어요."

 

검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대답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의미없으며,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검서씨도 알죠? 전쟁이 일어날거예요. 지금이야 잠잠하지만, 갈등은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어요. 왕이 누르려고 노력하지만, 오히려 반발만 거세질 뿐이죠. 그러니까...."

 

검서는 마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으면 했다. 현실을 그의 입에서 듣는 것은 잔인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서는 말해야 했다.

 

"다음에 우리가 만날 곳은 전쟁터겠죠."

 

어떤 형태로든. 검과 검이 부딪치는 곳만이 전쟁터는 아니다. 말과 말이, 권력과 권력이 맞부딪치는 곳도 전쟁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한번 어긋난 힘의 알력은 마침내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마서는 슬프게 미소지었다. 검서는 울고 싶어졌다. 그대신, 그는 손을 뻗어 마서의 목을 껴안았다. 마서는 가만히 검서를 받아들였다. 어두운 방에, 드리워진 햇빛이 눈부시고 따스했다. 그 한가운데에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검서가 변했다는 소리가 기사 대공의 저택에 일하는 이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떠다녔다. 본래 검서는 하인과 하녀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아주 좋았다. 다른 여느 귀족 도련님처럼 까탈스럽게 구는 경우도 없었고, 하인들을 매질하는 잔인한 성품도 아니었고 하녀들을 희롱하는 난봉꾼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랫사람에게도 적절한 예의를 갖춰 대할 줄 알아서 다들 그를 좋아했다. 혹자는 오만한 기사 대공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도 했다. 그래서 그들의 그 수군거림은, 음험하게 가십삼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가 담긴 것이었다.


그 소문은 보통 검서가 항상 하던 검술수련도 빼먹고 멍하니 창문만 보고 있었다든가, 아니면 가정교사의 숙제를 3일째 무시했다든가, 지나가다 누가 검서한테 물을 끼얹었는데도 뭐에 홀린 것처럼 별 반응없이 걸어가고 있었다든가, 가만히 혼자 있다가 벽에 머리를 박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든가 하는 바른생활청소년 검서가 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슨 병에 걸린게 아니냐는 소리도 나왔다. 그리고 그런 추측에 힘을 실어주듯이, 검서는 며칠째 계속 힘이 없는 모습이었다.

 

검서는 저택의 거대한 창문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시선은 창문 너머 정원을 향해 있었지만, 그것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검서는 마서의 마지막 말을 계속해서 곱씹고 있었다. 전쟁이라, 전쟁.. 지금까지 두 대공 사이에 다툼은 자주 있었지만, 물론 피를 흘리기도 했지만 그 규모 자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거기다 언제고 두 대공의 꼬투리를 잡아 힘을 약화시킬 궁리만 하고 있는 왕이 있는데도 전쟁이라니. 그 단어는 낯설었고 뜬금없었다.

물론 그가 말한 것이 병력이 움직이는 전쟁은 아니리라. 물론 전쟁터는 어디에나 비유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말이지만... 그래도 하필이면 그 단어를 선택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섣불리 내뱉지 않는 말. 왜냐면 정말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검서는 마서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혹시 마법사 대공이 이 상황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한 순간 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래, 후계자도 볼모 신세에서 풀려났겠다 더이상 그들을 막을 것은 없다. 이 나라의 군대는 이미 대공들의 사병이나 마찬가지다. 전쟁을 일으키고 싶다면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고, 그 규모는 엄청날 것이다. 검서는 착잡해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검서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토록 무력한 나 자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어서 이렇게 멈춰서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 검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창문을 내리쳤다.


쾅!!하는 소리와, 주먹의 화끈한 아픔과, 부서져 흩어져 내리는 유리조각들. 모든 것들이 뒤섞여 시간 위로 내려앉았다. 천천히, 새하얀 빛을 반사하는 조각들이 무지개를 뿌리며, 눈처럼 내린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검서는 가만히 그걸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마서, 그대도 이걸 보면 좋을텐데.


깨지는 소리에 놀라 달려온 페이가 외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마치 메아리처럼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란슬롯이 나타나 어깨를 붙잡고 홱 끌어당기기 전까지도 검서는 그들의 존재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서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화난 듯한 란슬롯의 얼굴과, 피를 보고 새하얗게 질린 페이의 얼굴이 보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오!!"

 

란슬롯이 어깨를 거칠게 붙잡으며 외쳤다. 그 역시 요즘 검서가 이상하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는데,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 검서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란슬롯. 그대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어디까지 믿는가?"

"..그게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질문에 당혹해하는 란슬롯을 가만히 바라보며, 검서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늙은이처럼 피로해보였다.

 

"난 말야, 내 힘으로는 사람 하나 가지지 못하는 그런 존재라는 걸 알게 됐어."

 

그저 자신은 하잘것없는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걸, 하필이면 이럴 때에 깨닫고 싶지는 않았어. 검서는 남아있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하필이면 누군가를 이토록 간절히 원하게 되었을 때, 그 사실을 알고 싶지는 않았어. 검서의 손에서 핏방울이 뚝, 뚝, 떨어져 붉은 파문을 만들고 있었다.

 

 

 

또다시 연회에 나가란 통보를 받았을 때 마서는 투덜거렸다. 도대체 귀족들이랑 왕족들은 무슨 놈의 연회를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거기다 대공쯤 되면은 이런 거 안나와도 되잖아. 하지만 마서는 대공쯤 되니까 연회에 후계자를(아무 사정도 없는데) 대신 내보내는 무례가 용납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연회는 무척이나 중요한 자리였다. 몇 안되는 중립을 지키는 귀족이자 왕의 친척인 가웨인 경의 연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 이자리에는 검서도 나와있을 것이다. 마서는 그 생각을 하자 마치 가슴에 가시라도 걸린 듯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헤어졌는데, 다시 얼굴을 마주하면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냔 말야. 자기가 차놓고는 뻘쭘하게 마주보면서 하하하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라고 말할수는 없다. 마서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말을 걸며 다가오는 사람들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마서는 기계적으로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힐끗거리며 좌중을 살폈다. 그때, 사람들의 머리 사이로, 익숙한 금발이 보였다. 마서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얼른 도망가야 해. 날 보지 못하게. 마서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잠깐 실례한다고 말한 다음 서둘러 어두운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최대한 검서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누구보다 빠르게 그러나 은밀하게.

 

검서는 피로했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에는 익숙해졌다 여긴지 오래였지만, 그럼에도 유달리 오늘따라 피곤했다. 어쩌면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미 언질은 들은 바였다. 마서도 이 곳에 와 있다는 것은. 하지만 사람들이 자꾸 말을 걸며 자기를 에워싸는 통에 찾을 수가 없었다. 보고 싶은데. 검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슷비슷한 얼굴과 비슷비슷한 옷과 비슷비슷한 목소리들. 다들 비슷한데 거기다 너무 많아서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그 속에서, 단 한명을 찾고 있었다. 누구와도 다른 한 사람. 가장 간절히 원하는 한 사람. 그 순간 검서의 눈에 익숙한 검은 머리가 보였다. 한쪽으로만 두갈래로 땋은 머리가 춤추듯 팔랑거린다. 검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정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검서는 다른 이들에게 실례한다고 말한 다음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아직 여름의 향기가 머무르는 초가을 밤이었다. 저택에서 새어나온 불빛은 몇걸음만에 흔적만을 남기고 스러졌다. 풀냄새 사이로 풀벌레 소리가 요란스레 들렸다. 서늘한 공기에 청명한 달빛이 머물러 있었다. 검서는 어두운 정원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섰다. 삐죽삐죽 키 큰 나무와, 나지막한 관목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이었지만, 그 때문에 마서의 모습을 놓쳐버렸다. 마치 미로처럼 울창한 관목 사이로 가는 오솔길이 나 있었다. 마서는 그쪽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검서는 미로 사이로 발을 내딛었다. 멀리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검서는 그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발자국을 내딛는 소리가 황급히 멀어졌다. 검서는 달려갔다. 흙을 짓밟는 자신의 발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바스락거리며 수풀을 스치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뛰어간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서의 푸른 로브 자락이 나비날개처럼 달빛을 뿌리며 팔랑인다. 검서는 손을 뻗었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마서가 뒤를 돌아본다. 차마 검서인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라 크게 뜬 눈동자가 보인다. 달빛, 새하얀 달빛. 그 사이로 그대가 보인다. 그대의 얼굴, 그대의 몸짓, 그대의 숨결이 가까이 있다. 멈춰설 수 없다. 이미 달리기 시작한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 검서는 그대로, 마서를 껴안았다.

 

"역시, 잡혀버렸네요."

 

마서가 난처하게 웃었다. 마치 못된 장난을 들킨 개구쟁이처럼. 검서는 꼭 마서를 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이 풀린 듯 자신에게 온몸을 기대오는 검서를 마서는 어쩌지 못한 채,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마서에게까지 전해온다. 아니, 이건 마서 자기 자신의 것일지도 모른다. 검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서의 새파란 눈동자와, 마서의 녹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검서가 마른 입술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보고 싶었어."

"저도요."

 

마서도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검서는 다시금 마서의 눈을 바라보며, 키스했다. 급작스러운 입맞춤이었지만, 마서는 거부하지 않았다. 따스한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천천히 떨어졌다. 마서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정말 너무하네요, 검서 씨는."

"뭐가 말인가?"

 

검서는 의외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불쾌할만한 짓을 했나? 그렇지만 마서의 기분은 나빠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해보였다.

 

"이렇게 되면 제가 기껏 차버린 게 아무 의미도 없어지잖아요. 안 된다고 해봤자 뭐해. 어차피 쫓아와서 이렇게 붙잡을 거."

"그..그거야..그, 그대도 기분나빠하지 않는 듯 하여..."

 

검서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검서의 반응이 재밌는지 마서는 이제 한껏 짖궂은 표정으로, 검서 씨는 기분나빠하지 않으면 추행해도 괜찮은가봐요?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네~ 라고 하면서 검서를 놀리기 시작했다. 검서는 진심으로 창피해하고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마서가 정말로 거절했었으니까. 그가 자신이 정말 성추행범이 되어버린 건가 진지하게 고뇌하기 시작하자, 마서는 놀리는 것을 멈췄다. 그는 검서의 어깨를 붙잡으며, 개구쟁이 소년처럼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날 보고싶어 해줘서 고마워요."

"그런건 고마워할 게 못돼."

 

검서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신기한 사람. 마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할 나위없이 진지하고 올곧다. 스스로에게는 엄격하며 누구보다도 성실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허술한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다시금 본래의 올곧고 진지한 얼굴을 보여준다. 마서는 서글프게 웃었다.

 

"이제는 인정해야겠네요."

"뭘 말인가?"

"더이상은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요."

 

마음이, 마음을 부른다. 어느쪽에서 먼저 시작되었는지 모를 마음은, 그 감정은 어느샌가 거대한 인력으로 다른 마음을 끌어당기고, 마침내 겉잡을 수 없게 된다. 마서는 자신과 검서 앞에 놓인 길이 험난할 것임을 예견하며, 검서를 끌어당기며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마서는 5살때까지 '아버지'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런 것을 알 필요도 없었고, 알 수도 없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오두막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숲을 뒤로 하고 바다를 내다보는 언덕에 앉은 작은 집이었다. 햇볕 좋은 날에는 모래사장에서 조개를 주웠고 바람이 시원한 날에는 숲의 가장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 저녁놀이 질때쯤이면 굴뚝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따라 가면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5살의 가을, 처음으로 시내에 갔을 때 '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았지만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네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고만 했다. 마서는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 알고싶은거지 세상에 있고 없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의 표정이 슬퍼보여 더는 묻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도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이다.

9살 생일 때 낯선 남자들이 집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어머니는 자신을 뒤로 숨겼지만, 남자들은 어머니를 밀치고 마서의 손을 낚아챘다. 남자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어머니가 집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어머니와 오두막집을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끌려간 곳은 커다란 저택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커다란 집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마서는 그때 처음 알았다. 오두막집이 통째로 다 들어갈 법한 커다란 방 안에서, 마서는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는 이제부터 마서가 자신의 후계자로써 교육을 받게 될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정실부인은 10년째 아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약간의 생활비를 주는 대신 영원히 그의 삶에서 사라지기로 했던 이방인 혈통의 천민 여자와 그의 아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마서는 그의 어조에서 성에 차지 않지만 어쩔수 없다는, 언짢음을 읽었다. 그리고 마서는 예감했다. 자신은 평생 그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으리라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도대체 할 수 있는 것이 뭐냐?"

 

마법사 대공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마법사 대공 자신을 대신하여 마서를 내보낸 연회 자리에서 마서가 큰 무례를 저질렀다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서는 그게 일부러가 아님을 해명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는 그대신 가만히 고개를 떨군 채, 마법사 대공의 꾸중을 들었다.

 

"내가, 항상 말했지 않았느냐. 연회에서 말없이 사라져버리는 것만큼 무례한 일이 없다고! 갤러해드에게 시킬 일이 있어 이번엔 혼자 보냈더니.. 아니나 다를까... "

 

마법사 대공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어느샌가 꾸중인지 불평불만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된 그의 말은 낮게 잦아들더니, 곧 그쳤다. 그대신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마서를 쏘아보더니, 차갑게 내뱉었다.

 

"계속 그렇게 고개만 푹 숙이고 있을 거냐?"

 

마법사 대공의 말에 마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법사 대공을 보는 순간이 싫었다. 항상 그에게 이 '아버지'란 존재는 낯설기만 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의 삶에 불쑥 나타난 이후, 그를 한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차피 그 역시 자신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지 않아 자주 보지 않았는데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을 볼때마다 그 기분나쁜 낯선 느낌이 찾아오곤 했다. 마치, 지금처럼.

 

"그건 그렇다 치고, 기사 대공의 아들과 어울리다니 무슨 짓이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마서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거의 관심이 없는 마법사 대공마저 그 사실을 알게 된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마법사 대공의 반응은 기사 대공의 반응과 판이했다. 자신의 아들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기사 대공은 매우 긍정적으로 그 현상을 해석했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언제나 못마땅한 점만을 발견하는 마법사 대공은 부정적으로 사태를 해석하고 있었다.

 

"조금도 치밀하지 못한 네 성격에, 기사 대공의 아들하고 어울리다가 중요한 정보를 누설했으면 어쩔 뻔 했느냐? 내 어차피 그리 될까봐 너에겐 별로 말은 안했다만.."

 

어째 걱정하시는 부분이 기사 대공하고 똑같네요, 하고 마서는 고개를 숙인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국엔 두 사람 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가문과, 권력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 그러니 생각하는 것도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기사 대공이 외적들하고 손을 잡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마법사 대공의 그 말에 마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법사 대공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에 갤러해드에게 직접 확인을 하도록 시켰는데, 사실이라고 한다. 어차피 언젠가 이리 될 줄은 알았지. 그 자는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서는 천한 이방인들과 손을 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위인이니. 이대로 멈춰버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뭔가 전환책이 필요했겠지. 왕은 더이상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않을 것이고, 지휘권도 사병도 이제 뺏겼으니, 남은 타개책은 어차피 그것 하나뿐. 들리는 바로는 그는 이미 외적과의 협상을 모두 끝냈다고 한다."

 

마서는 마법사 대공의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그 말. 그 단어가 지금 나오려 하고 있었다.

 

"남은 건 전쟁뿐이다."

 

 

초원은 피냄새를 풍겼다. 갈빛의 풀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단풍잎과 뒤섞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단풍잎이 끈적한 피냄새와 함께 발에 달라 붙었다. 사람들은 유달리 올해 단풍이 붉다며 수군거렸다. 다들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첫 전투는 마법사 대공의 승리였다. 그러나 누가 이겼는지를 세는 것이 무의미해 보이리만큼 양측의 피해는 비등비등했다. 하지만 기사 대공의 자존심은 결코 그 결과를 용납할 수 없었다. 1명이라도 더 죽여서 자신이 승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이든 처음 시작하는 것이 어려운 법이고 두번째는 훨씬 손쉽게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음 전투가 이어지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검서는 그래서 괴로웠다.

 

기사 대공의 진지는 침울했다. 대패는 아니지만, 그래도 패한 마당에 기사 대공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숨을 죽인 채 조심하며 걸어다녔다. 검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같아서는 소리라도 꽥 지르고 싶었다. 하루종일 이어진 군사회의에서는 별 생산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수적으로는 기사들이 우세하지만 마법사들은 질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기사 대공은 결국 기분이 나빠진 채, 모든 회의를 중단시켜버리고 막사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검서는 이 모든 상황에 어정쩡하게 발을 걸치고 있었다. 검서는 암담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도대체 뭘 해야만 하는 거지? 평생 잘못된 길은 걷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분명히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에도, 어느샌가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채 선악의 구분마저 모호해지고 있었다. 마치 심장 위에 돌이라도 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검서는 한숨을 쉬며 기사 대공이 있을 막사로 향했다.

 

막사 안에는 뜻밖의 풍경이 있었다. 거무스름한 피부의 이방인이 기사 대공과 서 있었다. 색다른 형태와 복잡한 문양의 의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서는 제법 지위가 높은 이로 보였다. 기사 대공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기사 대공은 검서를 알아보고 손짓했다.

 

"이리 와보거라. 중요한 분이시란다."

 

이방인은 검서에게 고개를 숙였다. 검서는 뻘쭘하게 내민 손을 도로 회수했다. 이방인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마서를 연상케 했다. 검서는 다시금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방인은 유창하게 왕국의 언어를 구사했다.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소공자시여."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기사 대공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분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오신 분이다. 현재 군사 오백을 이끌고 오셨고, 차후 더 많은 병력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검서는 화들짝 놀라 기사 대공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기사 대공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검서는 자기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수가 없었다. 마법사 대공과 싸우기 위해서, 외적을 지금 끌어들인다는 건가? 검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확실히 잘못되었다. 검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기사 대공과 이방인은 무어라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검서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있을 수가 없었다. 막사를 나오자마자 눈에 보인 것은 이방인의 군사였다. 갑주가 아닌 그냥 천으로 된 옷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기사 사이에 있으니 확실히 눈에 띄었다. 검서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모두가 이 전쟁을 더 키우길 원하고 있는 거다. 검서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는데도!

 

검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더 이상은 주위에 휩쓸릴 수 없었다. 검서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돌려 기사 대공이 있는 막사를 바라보았다.

 

 

올빼미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밤이었다. 기사 대공은 군사지도를 살펴보고 있던 참이었다. 검서가 들어오자 그는 고개를 들어 웬일이냐고 했지만, 자신의 아들이 찾아온 걸 딱히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이 밤에 무슨 일이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검서는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굳은 눈동자로 기사 대공을 똑바로 쏘아보면서, 검서는 말했다.

 

"이 전쟁은 잘못되었습니다."

 

기사 대공의 눈에 실망하는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이제 차갑게 대꾸했다.

 

"잘못되지 않은 전쟁은 없다. 그러나 필요한 전쟁은 있지."

"필요한 전쟁은 없습니다. 그저 무익할 뿐입니다."

"언제부터 네가 이상주의자의 헛소리를 지껄이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전쟁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원하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그리고 공고하게 쟁취하게 해주는 수단."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외세까지 끌어들이다니요!! 도대체 무엇을 얻고 싶어하시는 겁니까?!"

 

기사 대공은 차갑게 웃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만드리만치, 서늘한 미소였다.

 

"정말 모르느냐? 내가 원하는 것은 완벽한 승리다."

"그렇게까지.. 마법사 대공을 증오하시는 겁니까?"

 

기사 대공의 눈빛이 한심하다는 듯이 바뀌었다.

 

"너는 지금까지 정치를 헛배웠구나. 내가 증오하는 것은 마법사 대공이 아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가 가진 힘을 증오한다. 나말고도 이 나라를 반을 틀어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증오한다. 내 위에 올라서려 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증오한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부인하지도 않은 채 당당하게 내뱉을 때는, 비난할 수조차 없다. 그 욕망이 저열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는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그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검서는 절망을 느꼈다.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이런 사람에게는 어떤 설득도 소용없다. 하지만 검서는 언제나 바라왔던 것이 있었다. 결코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그는 지금 그 좌우명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를 처음으로 거역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저열한 욕망을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지 마십시오. 더러운 것은 아버지 한 명으로 족합니다. 주위 사람들까지 더럽혀서 욕망을 쟁취하지 마십시오."

 

기사 대공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하지만 검서는 그 눈빛을 그대로 쏘아보며, 선언했다.

 

"저는 당신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것이지요."

 

란슬롯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방인들 사이에서 혼자 하얀 갑주를 입고 있는 란슬롯은 어두운 밤인데도 눈에 금방 띄었다. 검서는 아버지에게 맞아 아직도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씹어내뱉듯이 말했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라 하시더냐?"

"글쎄요, 그걸 말씀드릴 수는 없소. 그래도 소공자시고, 대공께서도 잠시 화가 나셨을 뿐이니 얌전하게 행동하신다면 금방 풀려나지 않겠소?"

"난 그럴 생각이 없어."

"그렇다면 계속 갇히셔야 하실게요."

 

란슬롯은 빙긋 웃었다. 검서는 그의 얼굴을 한대 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방인들이 몰려와 검서를 포위했다. 란슬롯은 그 중 한명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뭐라 지시했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검서를 보며 다시 말했다.

 

"지금부터 소공자께서는 잠시 몸이 불편해 쉬고 계시는 것으로 처리하겠소. 그럼, 그동안 푹 쉬고 오시오."

 

그와 동시에 이방인들이 검서를 밧줄로 묶었다. 검서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란슬롯은 뒤도 안 돌아보고 유유히 걸어가버렸다. 검서는 이를 갈았지만 이방인들은 어느새 검서를 다 묶고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방인들과 도착한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바로 기사 대공의 저택이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신의 후계자인지라, 아주 남들에게 맡기는 것은 불안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기사 대공의 저택은 이방인 군사로 바글바글했다. 검서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 얼굴조차 못보고 방 안에 강제로 끌려들어갔다. 방의 문이 열리는 경우는 하루에 딱 세번, 식사를 들여올 때뿐이었다. 시종인 페이의 접근도 금지되었다. 방문을 밤낮으로 지키는 것은 이방인, 즉 외적의 병사들이었다. 그래서 검서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지금처럼 멍하니 창문 밖을 내다본가 하는 일 정도... 그런데 창밖에 뭔가 익숙한 형체가 보인다? 검서는 황급히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마서가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검서 씨."

 

검서는 너무 놀라서 채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린채 손가락으로 마서를 가리켰다. 마서는 창문에 거꾸로 매달린 채 얼굴만을 빼꼼 내민 상태였다. 마서는 씨익 웃더니 빙글 몸을 돌려 열린 창문 안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교본에라도 나올 것 같은 완벽한 자세였다. 여전히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대는 검서에게로 마서는 느긋하게 다가갔다.

 

"저 보고 싶었죠?"

"....도, 도대체 여긴 어떻게...!!!"

 

마서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이지 귀찮아 죽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검서 씨를 구하러 이렇게 왔죠. 이렇게 귀찮게 만든 대가는 나중에 치뤄주셔야 해요."

"날 구하러 왔다고?"

 

검서는 마서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저택 안에는 엄청나게 삼엄한 경게가 펼쳐져 있는데, 지금 마서는 변변한 무기 조차 제대로 들고 있지 않은 홀몸이었던 것이다. 마서는 집게손가락을 검서의 입술에 대며 미소지었다.

 

"마법사를 얕보면 안된답니다. 특히나 마법사 대공의 아들인데다가 고대마법 덕후에게 온갖 괴상하고 복잡한 마법을 전수받은 사람의 경우에는요."

 

마서의 말은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검서는 단 한번도 마서가 마법은 커녕 마술조차 부리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에-검서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군사들의 목소리였다, 

 

"일단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에 차차 이야기 하기로 하고, 슬슬 떠날까요?"

 

마서가 싱긋 웃으면서 손을 검서에게로 내밀었다. 검서도 싱긋 웃으면서, 그 손을 마주잡았다.

 

 

"침입자가 여기있는지 살펴봐라!!!"

 

요란한 소리와 군사들의 우두머리가 내지르는 소리가 뒤섞임과 동시에 문이 쾅 하고 열렸다. 그러나 병사들이 활짝 열린 창문과, 밤바람에 흔들리는 커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우두머리는 검서가 사라졌다는 걸 알고 당황해서 소리쳤다.

 

"비상사태다!!! 당장 소공자를 찾아라!!!!!"

 

 

 

"휘유~ 되게 시끄럽네요."

 

마서는 그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면서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검서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은 밤하늘에 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마서와 검서가 발 디디고 있는 마법진이 상공에 떠 있는 것이지만, 검서를 공포스럽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마서는 태연자약했다. 검서는 질린 얼굴로 마서를 보며 물었다.

 

"이런 마법이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흔한가?'

"아뇨, 전혀요. 지나가는 마법사-물론 마법사가 흔한 건 절대 아니지만-를 붙잡고 물어보세요. 백에 백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마법이라고 할 걸요. 제 경우는 갤러해드가 고대마법 덕후라서 온갖 쓰잘데기없고 괴상망칙한 고대마법을 주입시킨 케이스라 특수하답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써먹을 때가 오네요."

 

마서의 설명에 검서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하기사 모든 마법사들이 하늘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들어본다. 하지만 마법에 문외한인 검서라도, 이런 고대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 자체가 마서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맨날 농땡이만 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지만은 않았구나 라고 생각하며 검서는 마서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서는 중얼거리며 좌표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검서는 질문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향할 예정인가? 마법사 대공의 저택? 진지?"

 

그 말에 마서가 홱 하고 검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서로서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검서도 왠지 모르게 그 기세에 압도되어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검서 씨. 저는 이 전쟁을 멈추고 싶어요. 검서 씨도 그런가요?"

"당연하지. 누구보다 바라고 있는 바야."

"그렇다면, 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나요?'

"글쎄..... 대공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 아마도 그것이겠지."

"우리는 그 힘을 가질 수 없죠. 하지만 명목상으로 그걸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마서의 말에 검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이제 마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마서는 검서가 두번째로 보는 단호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네, 저는 지금 왕궁으로 갈겁니다."

 

 

 

 

 

작은 파문이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밤하늘에 퍼진다. 검서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마서가 가르쳐준대로 아무 것도 없는 밤하늘에 걸음을 내딛으면 은빛 마법진이 발 밑에서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빛난다. 마주 잡은 마서의 손의 체온이 신경쓰였다. 기묘하게 심장이 간질거린다. 마서가 동그란 녹빛 눈동자로 검서를 보며 빙긋 미소짓는다. 은빛 구름 사이를 헤치며, 좀 더 선명해진 별빛 아래로 단둘이 걸어간다. 마치 꿈에 취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둘은 오랜만에 실컷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내가 거기 갇혀 있다는 걸 안거야?"

"란슬롯 씨가 도와줬어요."

 

그 말에 검서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완전 이제는 검서에게 볼일없다는 식으로 취급하더니만, 사실 속내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 뺀질이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일부러 그런 식으로 군단 말이야. 검서는 투덜거렸지만 사실은 란슬롯이 고마웠다.

 

"그리고, 공주님은 왕자님이 구하러 가야죠. 안 그래요?"

"얼씨구? 누가 공주님이라는 거지?"

"당연히 검서 씨죠!! 성 안에 갇힌 공주님. 저는 이제 공주님을 구하러 가는 용맹한 왕자님인거고."

"내 참. 외모상으로 보면 누가 봐도 그대가 공주님이라고 할 걸."

"참나. 이 사람 정말 뻔뻔하네요. 누구는 죽을 만큼 귀찮은 걸 극복하고 구하러 가줬는데, 한다는 소리가 그런 거라니."

"나를 구하러 오는게 그렇게도 귀찮았단 말인가? 세상에, 정말 실망이로구만."

"저한테는 숨쉬는 거랑 밥먹는 거 빼면 세상만사가 다 귀찮은 일이에요. 이제야 그걸 아셨나요?"

 

그렇게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은빛 구름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흐르는 구름 사이로 조그만 장난감 도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깜박이는 가로등 불빛이 수놓은 도시는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달빛을 하얗게 반사하는 하얀 지붕이 보였다. 왕궁이었다.   

 

 

 

전쟁이 처음으로 일어났을 때, 젊은 왕은 대공들을 파직시키고 귀족지위를 찬탈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시했다. 왕은 무력으로 그들을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야 할 군사들은 이미 대공들의 손에 들어간지 오래였다. 그들을 멈추기 위해 필요한 병사들은 그들의 싸움에 이용당하고 있었다. 왕은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강요된 침묵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장식이 되어버린 왕을 방문하는 이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왕은 한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무척이나 놀란 상태였다. 자다가 황급히 일어난 탓에 왕의 위엄있는 복식 대신 대충 걸친 금빛 가운이 전부였고 머리는 헝클어져있었다. 그꼴을 보다 못한 시녀들이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려고 붙잡았지만, 방문자의 이름과 신분을 듣자마자 왕은 벌떡 일어섰다. 그는 서둘러 그들을 들이라 일렀다. 물론 근위병들이 그들을 호위-혹은 다른 말로는 포박-하도록 이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창문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주황빛 부드러운 빛을 뿌리는 등불을 등진 채, 마서와 검서는 푸른 그림자를 마주하며 왕을 바라보았다. 젊은 왕의 금발은 달빛에 반짝였고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야심만만한 젊은 왕이라 들었건만,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 때문인지 피로해보였다. 마서와 검서는 가볍게 인사를 했다. 왕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입을 열었다.

 

"말하라."

 

짧은 말이었지만, 무엇을 뜻하는지는 마서도 검서도 알 수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마서였다.

 

"저희가 왜 실례를 무릅쓰고 이 곳에 이리 찾아왔는지 말씀드리기 위해서, 먼저 근위병을 내보내도록 해주십시오. 저와 검서, 그리고 국왕폐하 말고는 아무도 이 대화를 듣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엄하도다. 너희들이 무엇이길래 감히 짐에게 명령하느냐?"

"명령이 아니라, 간청입니다. 저희들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하여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맞받아치는 마서를 왕은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곧 근위병들에게 손짓했다. 근위병들이 빠져 나간 뒤 문이 닫히자 마서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국왕폐하, 먼저 저희는 저희들의 아버지의 행동에 결코 찬동하고 있지 않음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희는 이 전쟁은 무익하며 불필요한 희생만을 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힘만으로는 중단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된 바, 이렇게 국왕폐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온 것이냐? 이미 피는 흘렸고 짐은 무력하다. 지금에서야 온 이유를 말하라."

 

이번에 답한 것은 검서였다. 결연한 눈빛이 푸르게 빛났다.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곧 이내 가라앉았다.

 

"저는 전쟁을 반대하다 지금까지 아버지에 의하여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마서의 도움으로 다행히도 이렇게 탈출했고 이렇게 온 것입니다. 저희는 무력합니다. 아직 어리고, 어떤 지위도 권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는 다르십니다. 이 나라 모든 백성의 어버이시자, 모든 이들의 위에 군림하는 분이십니다. 저희는 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선, 폐하에게 반드시 도움을 요청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도움을 원하는가?"

 

검서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마서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저희에게 명분과 지위를 빌려주십시오. 저희는 저희가 가진 위치를 활용할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고하라."

"저희는 두 대공의 합법적 후계자이며, 전장에서의 지휘권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말인즉슨, 저희는 두 대공의 진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저희가 다른 기사와 마법사들을 포섭하고, 내분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멸하겠군."

 

왕의 눈빛에 처음으로 흥미가 스쳐갔다. 그는 이제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짓고 있었다. 마침내 적을 눌러버릴 방법을 찾아낸 난폭한 기쁨의 미소였다. 하지만 검서는 어안이 벙벙한 채 마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서가 그런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마서의 말은 아버지를 배신하자는 거였다. 음지에서 책략을 꾸미고 배신을 하는 행위는 검서에게 본능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마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그리고 자신도 그 행위에 동참해야할 줄은 몰랐다.

 

"두 대공의 행위는 당장이라도 멸문함이 마땅하나, 너희들이 성공한다면 가문을 보존함은 물론, 너희 둘의 목숨은 보장하며 처벌은 두 대공의 목숨으로 끝내겠다."

"그리고 저희에게 협력한 이들의 목숨도 보장해주십시오."

"약속하겠다. 국왕은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검서는 지금 국왕이 엄청나게 선심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국왕을 무시하고 사사로이 군대를 일으켜 분란을 일으킨 죄, 3족과 그 군대를 모두 멸함이 마땅하지만 그는 지금 두 대공만의 목숨만을 받아가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신의 대가였다. 검서는 심장 속에 벌레가 들어앉은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국왕과의 대화가 끝나고, 두 사람은 이제 왕궁의 거대한 문 앞에 서있었다. 새파란 달빛이 유달리 눈부셨다.

 

"아무 말도 안하네요, 검서 씨. 역시 마음에 안 드는 거죠?"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검서 씨에게 제 방식을 강요하진 않아요. 하지만 전 계획을 실행할 겁니다. 검서 씨야 어떻든."

 

마서의 초록색 눈동자가 굳게 빛났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강한 의지를 담은 눈. 검서는 마서가 결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새삼 깨닫는 것이지만.. 마서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보다도. 검서는 쓰게 미소지었다. 

 

"이게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어.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결말을 내는 방법이라는 것도."

 

타의로 전쟁에 참가한 이들,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당할 다른 가족들을 모두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이 방법 말고는 없다는 것을 검서도 잘 알고 있었다. 책략과 기만. 이 두 글자가 만들어내는 본능적인 혐오감과, 아버지를 배신한다는 죄책감만 극복한다면 모두가 살 수 있는 결과가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지가 없잖아. 모든 죄는 내가 지고 가는 수밖에. 평생동안 괴로워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소임이니까."

 

아, 역시 그렇군. 마서는 생각했다. 저 사람은 한없이 올곧고, 바르고, 자신에게 엄격한, 그래서 남들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이다. 당연한 합리화 대신 자신이 그 죄책감을 지고 가겠다고 선언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마서는 작은 경외를 담아,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죄책감, 함께 지고 걸어가도록 하죠."

 

 

 

 

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긴장감으로 달구어진 평야를 식혔다. 양측의 군대는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진군을 알리는 뿔나팔이 울리면, 두 군대는 서로를 향해 돌격할 것이다. 폭풍전야의 기묘한 침착한 열기가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기사 대공은 화려하게 장식된 흑마 위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한 연설을 한창 하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틀림없이 마법사 대공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기사 대공은 목에 핏대를 올리며, 마지막 말을 토해내듯이 외쳤다.

 

"-그러니, 싸우라!!!!"

 

병사들이 소리지르며 환성을 질렀다. 기사 대공은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지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작전은 완벽했고, 속을 썩이던 아들도 이제 마음을 고쳐먹었으며, 병사들의 사기는 높았다. 이제는 승리할 때였다. 그는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전군, 돌격!!!"

 

거대한 뿔나팔 소리가 공기 중으로 울려퍼졌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여기까지입니다, 아버지."

 

기사대공은 자신의 목덜미에 겨누어진 차가운 칼날을 놀란 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는 지금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신뢰하는 부하인 란슬롯은 그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놀람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노성을 내질렀다.

 

"네 어찌.. 감히!!!!!"

"전 이미 아버지께 경고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귀담아듣지 않으셨지요. 더이상은 당신의 전쟁놀이를 묵과할 수 없습니다."

 

검서는 차갑게 말했다. 여전히 칼날은 기사대공의 목에 닿은 채였다.

 

"국왕 폐하의 명에 따라, 당신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이날부로 군대는 해산합니다."

"자- 들었지? 모두 해산시켜. 자자, 시그룬. 거기 기사들 돌려보내고. 빌헬름, 너는 궁수들 도로 집으로 보내. 지크프리트. 너는 보병들 담당하고."

 

검서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란슬롯이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했다. 이미 사전에 모두 협력하기로 약속한 이들이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지시를 이행했다. 누구하나 반발하는 이가 없었다. 일반 병사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기사들의 지시에 의아해하면서도 따르고 있었다. 기사 대공은 분노감에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변하고 있었지만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판에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검서는 살짝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마법사 대공의 진영을 살펴보았다. 마법사들이라 그런지, 자신처럼 검을 쓴건 아니고 마법으로 협박한 모양이었다. 허공에 둥둥 떠있는 투명한 구체 안에 누군가가 소리지르며 발악하고 있는게 작게나마 보였다.

이제 이 전쟁도 끝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세 달동안, 검서는 지독하게 바빴다. 모든 사후처리를 도맡아 해야만 했다. 군대 해산 문제, 그리고 대공직위와 재산의 반납 문제, 이방인의 군대를 돌려보내고 달래는 문제, 옥에 갇힌 기사 대공 대신 가문 관리까지. 마서도 비슷한 문제로 눈코뜰새 없이 바쁠 것이었다. 결국 그는 세 달간 마서의 얼굴을 4번 본게 전부였다. 그것도 회의할때 본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정리된 참이었다. 이제 자신은 귀족이 아닌 일반 평민이었다. 엄청났던 재산은 최소한의 식량만을 생산하는 영지만을 남겨두고 모두 다 몰수당했고, 대공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였던 군대는 이제 새로이 개편될 것이다. 이 조치는 마법사 대공 측에도 똑같이 실시되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가졌던 엄청난 부와 특권을 모조리 뺏겼으니 조금은 아쉬워질 법도 한데 어째선지 검서는 기분이 홀가분했다. 그는 기지개를 펴며 커다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제 뭘 하지? 검서는 잠시 생각했다가, 곧 답을 찾아냈다.

마서가 보고 싶었다.

 

"...행방불명이라고요?"

"응. 모든 업무를 끝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라졌어. 어딨는지는 아무도 몰라. 없어진지 한 3일 됐나?" 

 

갤러해드의 말에 검서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살짝 벌렸다. 하기사 원래 갤러해드는 매사에 무관심하고, 이제 대공도 뭣도 아닌 마서를 신경써줄 이유가 하나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3일이나 사람이 없어졌는데 저런 태도라니.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도 저것보단 더 걱정스러워 하겠다. 검서는 기가 찼지만 지금 급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마서가 어디있는지가 먼저였다. 검서는 황급하게 갤러해드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혹시, 어디 짐작가는 데라도 있어요?!"

"글쎄.. 아, 혹시 거기 갔을 수도 있겠다. 저택에 오기 전에 예전에 마서가 살던 집이 있어. 근데 거긴 이미 아무도 안 살긴 하지만. 흠, 또 다른데는 딱히 떠오르는 데가 없네."

"거기가 어디죠?"

 

갤러해드가 가르쳐 준 곳은 지도에도 이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구름과 안개가 수평선을 지워버린 풍경에서, 마서는 서 있었다. 하늘과 바다가 갈라지기 전의 모습이 이랬을까.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마저도 고요한 모래사장에서 마서는 천천히 걸었다. 신발은 벗어 한쪽 손에 들고 있었다. 축축한 모래의 질감이 맨발을 간지럽혔다. 마서는 고개를 들었다.

 

"모든 게 끝나면 기분 좋을 줄 알았는데."

 

자신의 아버지를 가둔 그 순간은 기분이 좋았었다. 자기 인생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던 존재를 마침내 이겼다는 기쁨이 그를 지배했었다. 그는 검서와는 다르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다. 차라리 증오했다고 말하는 편이 진실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배신에 대한 죄책감도 거의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가문이니, 직위니 하는 자신을 얽어매던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나면,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저택으로 잡혀가다시피 한지 3년 후에 죽었다. 작은 오두막집은 흉가가 되었다. 그리고 모래사장을 달리던 아이는 손에 피를 묻히고 나서야 돌아와 여기 서 있을 수 있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이 바다의 소리와 백사장의 색깔뿐. 여기에 돌아오면 숨막히던 그리움의 시간은 끝날 거라 믿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자신인 것을 미처 몰랐다. 마서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탄식은 대기에 가벼운 흔적만을 남기고 이내 사라졌다. 마서는 메마른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꼼짝않고 해변에 서 있는 마서의 모습은 마치 작은 동상처럼 보였다.

 

검서는 그 동상을 향해, 한걸음씩 한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았던 숲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각종 나무와 이끼와 돌멩이와 동물의 의도치않은 습격을 헤치고 검서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작은 언덕배기와 그 너머로 보이는 조그마한 해안가였다.


바닷바람에 쉴새 없이 휘날리는 검은 머리칼과 초록빛 옷자락이 검서의 눈에 들어왔다. 청회색빛 바다를 바라보는 자그마한, 그리고 아름다운 소년. 검서는 나지막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마침내 보물을 찾아낸 탐험가의 탄식과도 비슷했다. 검서는 오랫동안 걸어와 무거운 발걸음을 한발짝씩 내딛었다. 마음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마서가 서 있는 풍경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검서 마음 속으로 떠오르는 하나의 확신이 있었다. 자신은, 이 순간을 위해 이렇게 걸어온 거라고.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마서의 모습이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검서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짙은 바다내음이 그리움과 함께 몰려온다. 마서는 여전히 계속 바다를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녹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다. 검서는 미소지으며, 한 걸음 더 내딛고, 그리고 마서의 손을 붙잡는다.

 

"데리러 왔어."

"고마워요."

 

마서는 살풋 웃었다. 검서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왠지 창피한지,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로 마서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사랑스럽다. 마서는 마침내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있잖아요, 검서 씨. 제가 여기 온건 말이죠... 전 항상 제가 돌아올 곳은 여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아니란 걸 알았어요."

 

마서는 검서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서로의 손을 감싼다. 마서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바로 당신이었어요."

 

검서와 마서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내 둘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글쓰기 싫어서 옛날 블로그를 뒤지다가 모처에 올렸던 무려 2013년도(!) 글을 발견했지 뭐예요. 이때는 일본소설을 열심히 읽었던 티가 나서 제 글 같지가 않아서 신선하기도 하고 오그라들기도 하고 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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