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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술루]어른은 어른답게 본문

글연성

[커크술루]어른은 어른답게

DayaCat 2018. 4. 14. 23:33

어른은 어른답게

for. 동해 님

스타트렉_커크술루



일이 마침내 이렇게까지 되었을 때― 제임스 T. 커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히카루 술루는 보기와는 다르다. 그는 겸허한 태도로―이 말이 적절한지는 커크 스스로도 의문을 가졌지만―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니까, 지금. 고장 난 샤워실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커피를 뒤집어쓴 채로 갇혀 있는 지금 바로 이때, 커크는 자신이 술루에게 된통 당했다고 깨달았다.


히카루 술루의 첫인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딱히 별 인상 없었다는 게 솔직한 말이겠다. 일등 항해사가 될 정도니 똘똘한 것이야 당연지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함께 있어보니 이따금 허술한 면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체로 빠릿빠릿하니 잘했다. 뭐 그 정도야 어디까지나 예상 안이었다. 

책상물림일 것만 같은 인상과 다르게 펜싱을 배웠다거나 은근 욱할 때가 있는 건 누구에게나 있는 ‘의외의 면모’ 정도로 여겼다. 왜, 인간관계의 양념 같은 것 말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커크는 전혀 의도하지 않게 이 모든 일련의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 되어버렸다.


시작은 어느 날 간단한 게임이었다. 새로운 행성을 찾아서 탐사하는 엔터프라이즈 호의 여정은 언뜻 듣기엔 흥미진진하고 기상천외한 모험처럼 들리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다르다. 행성 하나를 탐사하고 나면 다른 행성을 찾아 우주 안을 항해하는 길고 지루한 시간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1시간을 어느 장소에 머무르기 위하여 5시간을 이동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우주는 아무리 많이 이동해도 풍경이 바뀌는 법이 없기 때문에 지루함은 배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동안에 흔히들 지루함을 쫓을 만한 잡담이나 게임을 주로 하곤 했다.

그날의 게임은 우후라가 가져온 옛날식 보드게임, 시타델이었다. 왕, 상인, 암살자, 도적, 주교, 건축가, 마법사, 장군이라는 8개의 직업이 각자의 특성을 이용하여 서로의 건물과 금화를 뺏고 뺏기는 게임이었다.

심심한 사람들에게 뭔들 재미없겠냐마는 이 게임은 특히나 엔터프라이즈 호 선원들의 입맛에 딱 맞아 붐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 여기저기서 하고 있었다. 그날의 참가자 중 본즈, 술루, 우후라, 체콥은 경험자였지만 커크, 스팍, 스콧은 무경험자였다.

커크는 초심자의 행운으로 첫 번째 판부터 왕이라는 사기급 직업을 뽑았다. 커크는 종횡무진 신나게 모두의 건물과 돈을 약탈했고, 그중에서도 히카루 술루의 돈을 가장 많이 약탈했다. 술루는 건축가였는데 아무리 건물을 지어도 커크가 빼앗아가버리자 마치 쌓던 레고가 부서진 아이처럼 허탈한 얼굴을 했다.

두 번째 판에서 커크는 암살자였는데 제일 먼저 죽인 사람은 상인인 술루였다. 그다음 판에도, 그다음다음 판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약탈과 살인, 점거행위에 술루는 결국 다섯 번째 판에서 더는 못하겠다고 일어났다.

커크는 뭘 그러느냐며 빙글빙글 웃으며 앉아서 좀 더 하라고 했다. 하지만 술루의 얼굴은 이미 뾰루퉁할 대로 뾰루퉁해져 있었다.

“아뇨, 전 이 게임을 잘 못하나 봅니다. 그냥 가서 쉬려고요.”

“그런 게 어딨어? 운이 나빴던 거지. 여기 앉아. 캡틴의 명령이야.”

그렇게 말했던 것은 본인이 잘못했다고 커크는 나중에야 반성을 했다. 하지만 그때는 어디까지나 술루가 단순히 게임 때문에 그 정도로까지 기분이 나빠져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술루는 그 당시의 커크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이 받아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툭 대꾸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불공평하게 운에 의존하는 게임 같은 것엔 이길 자신도 이길 의미도 없습니다. 차라리 다른 거라면 모를까요.”

그 어투는 명확하게 커크를 향해 가시를 향하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껏 운으로 이겼지만 다른 거라면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뜻의. 커크는 그 정도도 못 알아들을 위인이 아니었고 실제로도 너무 잘 알아들어서 왜 갑자기 얘가 이렇게 공격적인가 싶어서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당황 뒤에 찾아온 것은 괘씸함과 오기였다.

“호오, 자신만만한데? 그렇다면 술루 넌 뭘 잘할 수 있는데?”

“캡틴보다는 뭐든지요.”

“뭐든지?”

그 순간 지금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엔터프라이즈 호의 대원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당분간 조용하긴 글렀구나. 거의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모두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다음날 커크는 함장석에 앉자마자 술루의 뒤통수를 딱 쳐다보았다. 새까만 술루의 뒤통수는 언제나처럼 동그스름하고 작았다.

“이봐, 술루.”

“네, 캡틴.”

아직 어제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듯 목소리에 부루퉁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뭐야,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뭐든지 잘한다면서, 술루?”

“어제 한 이야기는 잊어주시면 좋겠는데요.”

“아니, 그럴 리가. 우리 히카루 술루 대위께서 대단한 분인걸 내가 몰라뵀거든. 아아, 그래. 기왕 하는 거 오늘은 행성 워프를 한번 해보는 건 어때? 저기, 앞에 보이는 저 행성 말이야.”

그러면서 커크는 함교에 보이는 붉은 행성을 가리켰다. 행성워프는 혼자서 해내기엔 꽤나 힘든 고난이도의 기술이었다.

술루가 이를 빠득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커크는 무시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술루는 행성 워프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전까지 수많은 궤도 계산을 해내느라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데 약 세 시간 정도 걸렸지만 해내긴 했다. 커크는 어쨌든 술루를 골탕 먹였다는 만족감에 젖어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술루한테 수고했다고 말하고 나가려는데 그 순간 술루가 의자를 뒤로 쑥 뺐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의자와 커크의 발이 부딪쳤다. 발가락이 부러지는 듯한 격통에 커크는 소리도 못내고 발을 붙잡았다. 커크가 고개를 든 순간, 그는 보았다. 술루의 복수했다는 듯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진짜 치사하고 유치하게……! 커크가 성질을 벌컥 내려는 순간 술루가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합니다, 캡틴. 거기 계신 줄 몰랐네요.”

사과하는 말투마저 매끄럽고 유들유들했다. 이렇게 나온다이거지. 커크는 술루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 뒤 이어진 일련의 일들은 스팍의 말을 따르자면 ‘비논리적이고 무의미한 사적 복수의 연속’이었으며 본즈의 말을 따르자면 ‘애들 장난질이 심하네’ 정도로 정의할 수 있었다. 커크의 음료수에 소금을 왕창 넣는다거나 술루의 등에 ‘저는 오늘도 바보짓을 했습니다’라고 적힌 종이를 몰래 붙인다거나 하는― 유치하고 터무니없는, 하지만 본인들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주고받기가 계속되었다.

참고로 그 사이에 낀 엔터프라이즈 호의 대원들은 적당히 저러다가 그만두겠지 파와 나잇살 먹고 둘 다 왜 저러는지 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자의 대표 주자는 스콧이었고 후자의 대표 주자는 우후라였다. 어쨌든 말은 그렇게 해도 모두들 흥미진진하게 관전하고 있던 차에 사건이 터졌다.

술루가 애지중지하는 식물원을 커크가 폐쇄해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식물원에 들어갈 때의 접근권한을 캡틴만 들어갈 수있도록 바꿔놓고서는 문에 ‘출입금지―폐쇄되었음’이라는 공문을 붙여놓았다. 그것도 모르고 술루는 평소처럼 식물원에 들어가려다가 공문을 보고 첫째로 놀라고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둘째로 놀랐다.

술루는 패닉에 빠져서 한참동안 문을 붙들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인증을 하다가 종내에는 문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발로 차보기까지 하다가― 마지막엔 사색이 된 얼굴로 스콧을 찾아갔다. 스콧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술루는 허탈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중얼거렸다.

“진짜 해보자는 거지…….”

그 해보자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다음 날, 커크는 여느 때처럼 즐겁게 브릿지로 출근을 했다. 어제의 장난질은 성공적이었다. 술루가 사색이 되어 스콧에게 달려갔다는 말을 듣고선 어찌나 낄낄거리며 웃었던지. 오늘쯤이면 내가 졌다고, 애초에 캡틴에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고, 그 까맣고 동그란 눈망울로 자신을 쳐다보며 말할 것이다.

물론 커크는 캡틴의 여유와 품위로 이만하면 되었다, 깨달았으면 그만인 것이지, 모두 용서해주겠다― 라고 아량 넓게 그를 껴안으며 그 눈동자만큼이나 까맣고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어 줄 요량이었다.

아침잠을 깨워줄 커피를 넘실넘실 담은 머그컵을 들고서 브릿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발을 걸었다.

알아차린 순간에는 이미 몸이 통제를 잃고 있었다. 손에 들려 있던 컵은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동시에 새까만 커피는 그 선을 따라 멋지게 흩뿌려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제임스 커크의 몸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커크는 엔터프라이즈 호의 인공중력이 이렇게나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그는 바닥에 널부러진 채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술루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

자기도 모르게 험한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이쿠, 엉망이시네요. 씻으러 가셔야겠어요.”

술루의 목소리는 얄미움 그 자체였다. 점수를 매긴다면 100점 만점에 150점 정도? 커크는 이를 박박 갈며 일어섰다.

“안 그래도 그럴 거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커피를 뒤집어 쓴 채로 브릿지에 나갈 수는 없다. 일단 가장 가까운 샤워실로 직행했다. 다행히도 이 구역에는 샤워실이 가까이 있어 다행이었다. 커크는 샤워부스의 문을 닫았다. 그 순간 덜걱, 하고 심장을 내려앉게 하는 소리가 문에서 났다.

“뭐야?!” 커크는 놀라 문을 잡아당겼다. 문은 덜걱덜걱 소리만 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동시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술루구나……!!!

커크는 문을 쾅!! 두들기며 소리를 질렀다.

“야! 술루!!! 히카루우우!!!!!”

퍼스트 네임까지 부르며 악을 써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끼얹어진 커피는 빠르게 식어 몸이 으슬으슬해지기 시작했다. 잠금장치도 21세기에나 쓸법한 구식이어서 잠금쇠가 걸린 이상 안에선 힘으로 부수는 것 외에는 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23세기에, 이런 아직도 이런 구식 잠금장치를 쓰다니 뭐 이런―!!! 커크는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열릴 리가 만무했다. 망할, 망할, 망할!!!! 그와 동시에 커크는 자신이 술루에게 된통 당했다는 것을 뼈아프게 인정해야만 했다.


커크는 정확히 3시간 후 샤워실이 고장났다는 제보를 받고 점검을 하러 온 스팍에 의해 구조되었다. 스팍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룩덜룩한 갈색인 커크를 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언젠가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알았으면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제가 말했다면 들으셨을까요?”

지극히 논리적인 스팍의 답변에 커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꿍얼꿍얼거렸다.

“그러게 왜 술루 대위는 건드린 겁니까?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게 한두 개야?”

커크는 까칠하게 쏘아붙이고는 대충 머리를 젖은 수건으로 닦았다.

“그렇기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캡틴이 술루 대위를 괴롭히는 건 조금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놀림으로라도 좋아하는 상대의 반응을 얻고 싶어 하는 아이 말이죠.”

커크의 손이 멎었다. 스팍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따져본다면 그전부터 조금씩 그러셨던 것 같군요. 그러다 최근에 술루 대위도 결국 폭발한 게 아닌가 싶은데. 물론 이건 인간의 감정을 잘 모르는 제 개인적인 의견이니 틀렸으면 틀렸다고 하셔도 됩니다.”

커크는 쓰게 웃었다. 인간의 감정을 모른다며 시침을 뚝 떼고선 다 알아채고 있었잖아. 아니, 스팍이 알아챌 정도면― 아마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커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번엔 틀린 게 아냐. 그냥…… 그래, 너무 재밌었거든.”

언제나 단정하게 직선으로 뻗어있던 눈썹이 일그러지는 것도. 얼굴빛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도, 무엇보다도 그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바로 자신을 똑바로 향하는 것도― 너무나도, 좋았으므로.

“술루 대위는 지금 브릿지에 있나?”

“아뇨. 오늘은 휴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나도 오늘 하루는 쉴게. 네가 함장 대리를 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캡틴.”

스팍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시원스레 대답했다. 커크는 마지막으로 윙크를 날리며 “함장 대리라고 권력 남용하면 안 돼. 그랬다간 나처럼 된다고”라는 말을 남기곤 샤워실을 나갔다.


술루는 식물원에 서 있었다. 온갖 종류의 녹색이 자라나 진한 풀냄새와 흙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아이오와 출신인 커크는 지구에 있었을 때조차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강렬한 생명력에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사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결코 크다고는 할 수 없는, 그리고 평소에는 언제나 조용한 남자였다. 술루는 물을 주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커크인 것을 알아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복수하러 오신 거라면―.”

“아냐, 아냐. 싸우러 온 거 아냐. 오히려 그 반대지.”

그러면서 커크는 술루에게 다가갔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려고. 이 식물원……. 네겐 소중한 곳인데 그런 장난을 쳐선 안 됐어.”

그러면서 커크는 화분 위로 곡선을 그리며 뻗어있는 길쭉한 초록 잎을 만지작거렸다. 술루가 잘 돌본 덕분인지 잎은 깨끗하고 윤기가 났다.

“그러시군요.”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물론 그 전에도 내가 잘못했지. 그…… 보드게임 건도, 워프 건도, 모두 미안해. 캡틴으로서 할 짓은 아니었는데.”

“이제라도 아시니 다행이군요.”

술루의 딱딱한 입매가 아까보다 한결 풀려 있었다. 커크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왜 그러는지 나도 이유를 잘 몰랐는데…… 이제 알게 됐어. 혹시 들어볼 생각 있어?”

“뭔가요?“

“그건…….”

커크는 심호흡을 한번 했다. 술루의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이젠 그를 향하고 있었다. 어서 말해보라는 듯이.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랬어.”

까만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며 커크는 역시나 이럴 줄 알았다고,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하지만 그걸 핑계로 앞으로 괴롭히거나 하진 않을게. 그건 너무 어린애 같은 짓이잖아? 역시…… 어른은 어른답게 굴어야 하니까.”

술루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서 커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 하려고. 히카루 술루, 오늘 나랑 같이 저녁 먹지 않겠어?”

기묘한 침묵이 식물원 안으로 내려앉았다. 술루의 손에 들린 물뿌리개 끝에서는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자동인 이 시대에서도 손수 물을 주기 고집하는 점이 무척 술루답다, 라고 커크는 문득 생각했다.

“역시 싫은가. 그렇겠지. 알겠어. 그럼 다음에 브릿지에서―.”

“아뇨.”

술루가 불쑥 대답했다. 이번에 놀란 쪽은 커크였다. 술루는 살짝 처진 눈꼬리를 살풋 접으면서 웃었다.

“받아들이죠, 데이트 신청.”

노려보는 것도 좋지만 웃어주는 게 훨씬 좋구나. 제임스 커크는 그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하며 술루의 손을 잡았다. 따스하고,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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