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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BL]홍콩, 1998년 여름 본문

글연성

[1차BL]홍콩, 1998년 여름

DayaCat 2017. 12. 22. 00:06
유호가 그 집에 살기로 결정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위치가 그의 직장과 가까웠고, 낡았지만 따스한 물이 잘 나왔고 근처에 시장이 있어 이것저것 물건을 사러가기가 편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얄팍한 지갑사정이 가까스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월세를 받았다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아파트의 좁고 가파른 계단은 빛이 잘 들지 않아서 낮에도 온통 어두컴컴했다. 천장에 하나밖에 없는 전구는 늘 금방이라도 꺼질듯이 파들파들 떨리는 빛을 냈다. 구름에 가려진 달빛처럼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그 빛을 따라 발을 헛디디지 않으러 안간힘을 쓰며 걸어올라가면, 좁다란 문과 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복도가 나왔다. 복도의 담장 너머로는 언제나 한데 어둠으로 뭉친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작은 창문과 문이 벽지의 무늬처럼 계속해서 반복되는 복도를 한참을 걷다보면, 가장 안쪽 비상계단 옆에 자리잡은 문이 유호의 집이었다. 


살다 보니 어느새 복도에서 첫번째 집은 낮에도 늘 불이 켜져 있고, 세번째 집은 자주 큰 소리가 나고, 네번째 집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호의 바로 옆집에는 유호 또래의 젊은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유호가 이사오고 나서 3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유호가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불이 꺼져 있다가 한밤중, 보통 밤 9시나 10시쯤이면 문을 여는 소리가 얇은 벽을 통해 들려왔다. 이따금 동행이 있는지 여자의 높은 웃음소리나 조근조근한 말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한 편인지 일부러 귀기울여 듣지 않고선 거의 들려오지 않았고 유호는 굳이 귀기울여 들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날 저녁도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게 없는 날이었다. 회사에서는 늘 하던 똑같은 일을 반복했고 여느 때와 똑같은 시간에 돌아와 늘 하던 대로 집안에 있는 통조림과 라면 따위로 저녁을 때운 뒤 영화 비디오나 보며 시간을 보내다 씻고 잠들 예정이었다. 그날이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밤인데도 유달리 공기가 후끈하고 더웠고 낡은 선풍기로는 더위를 모조리 쫓아낼 수 없어 가만히 있는데도 등허리에 흥건하게 땀이 흘렀다는 것 정도였다. 유호는 찬물로 샤워라도 해야겠다 싶어 욕실로 들어갔다. 물을 틀고 머리를 식히려는데 비누가 작은 조각만큼 남아있었다. 


오늘 아침 비누를 새로 사서 집으로 들어와야지 하고 생각했던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차피 대충 등목은 했으니 물기만 닦고 나가서 비누를 사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유호는 밖으로 나왔다. 그때 유호는 복도에서 걸어오는 누군가를 보았다. 


젊은 남자와 여자였다. 남자는 키가 컸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어두운 복도에서 남자의 얼굴은 그닥 잘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얇고 짧은 옷을 입고 있었다. 여자가 무어라 남자에게 속삭이며 키득거렸다. 웃음소리가 저번에 들었던 것과 달랐다. 발소리 두 쌍이 겹쳐져 점점 더 유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복도는 아주 좁아서 모르는 체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남자와 여자가 마침내 유호의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는 거리였다. 그는 유호에게 시선을 던졌다. 남자의 눈은 길고, 깊었다. 눈썹은 직선으로 뻗었고 웃거나 말할 때 얇은 주름이 눈가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턱선은 조금 각진 편이었다. 


그는 유호를 보자마자 아하, 하고 웃었다. 유호가 누군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옆의 여자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이라서." 오늘이 처음 얼굴을 마주친 사이일텐데. 유호는 그가 마치 자신을 친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여자가 무심하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곧 그들은 유호의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와보니 그는 유호와는 머리 하나 정도 키가 차이 났다. 술냄새와 담배냄새가 훅 끼쳤다. 여자는 남자의 팔을 마치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꼭 껴안고 있었다.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남자가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들어가기 직전, 남자가 유호를 향해 찡긋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길을 막은 건 미안해요." 

그러고는 마치 거짓말처럼 남자와 여자가 사라졌다. 남자의 말이 지금 이건 좀 봐줘, 라고 말한 것처럼 들린 건 왜일까. 유호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유호가 옆집 남자를 다시 만난 것은 일주일 정도 뒤였다. 그는 웬일로 혼자였다. 복도에서 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유호는 비켜달라고 말할까 하다가 그냥 잘 알아서 몸을 틀어 빠져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 그에게 낯선 목소리가 툭 던져졌다. 

"영화, 좋아해요?"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울렸다. 유호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던 흰 비닐봉지를 보며 아, 하고 알은 소리를 흘렸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비디오가 여러 개 담겨 있었다. 


"좋아... 하죠. 굳이 말하자면."

"그래요? 나도 좋아하는데. 뭐 좋아해요?" 

이야기가 더 이어질줄은 몰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대화할 생각이 없었더라면 굳이 질문할 이유도 없었겠지. 유호는 글쎄요, 그냥 이것저것... 하고 어물어물 대답하다가 문득 말했다.

"홍콩 영화 같은 것도 좋아하고, 옛날 영화도..."

"홍콩 영화라면,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 같은 것?"

남자의 물음에 유호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아, 네... 그런 느와르도 좋아해요, 네."

"나도 좋아해요.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멋있잖아요?"

"그렇죠. 오우삼 감독 특유의 비장미라고 해야할까, 그런 게 있죠. 특히 연출이라든가... "

거기까지 말하다가 유호는 앗차, 하고 말을 멈췄다.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고 있었다. "난 주윤발을 좋아해서요. 감독은 잘 모르지만." 부드러운 말투였다. 


"그러고보니 가던 길을 막은 셈이네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다음에 시간 되면 또 이야기하죠." 남자가 고개를 밖을 향해 돌렸다. 남자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뱉었다. 빨간 불빛이 도시의 수많은 빛과 섞여서 반짝거렸다. 유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여기 사거리 슈퍼 옆의 비디오 가게가 재밌는 영화가 많아요." "그래요?" 남자가 다시 유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더워서일까, 어쩐지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영화 좋아하면 한번 가봐도 좋을 거예요." "그래요, 그러죠." 남자의 대답은 선선했다. 유호는 그럼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는 걸어갔다. 남자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름이 되자 해는 놀라울 정도로 길어졌다. 저녁 7시가 지났는데도 사위가 온통 환하고 하늘은 보랏빛 도는 파란색이 되어 어둠이 밀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호는 퇴근길에 비디오 가게에 들렀다. 주인은 유호를 보자 알은체를 했다. "저번에 추천해준 영화는 재밌었어요?" "네, 생각보다 더 웃긴 영화였어요." 그러면서 유호는 빌려갔던 <트루 로맨스>를 들어올렸다. "음악 좋죠, 그 영화." "네. 정말 좋더라고요." 유호가 대답하며 비디오를 카운터 위에 올리자 주인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둥, 둥둥, 둥, 둥둥... 트루 로맨스 OST 도입부였다. 주인은 노래를 썩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다. 유호는 피식 웃었다. 


그때 뒤에서 문이 열리며 방울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어서 오세요, 라고 말하는 소리와 함께 유호가 고개를 돌렸다. 이웃집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이런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낯설어 보였다. 그리고 왠지 스스로도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느리게 유호에게 가 닿았다. "또 보네요." 나직한 목소리. 결코 높게 솟아오르지 않으면서도 귀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목소리였다. 저 사람, 배우 하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이 유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 네, 반가워요." 유호는 뭐라 말을 더 이으려다 머뭇거렸다. 아직도 저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뭐야, 아는 사이야?" 주인이 유호에게 물었다. "아, 네. 이웃집 사람이에요." 주인은 흐응, 하고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는 조금 머뭇거리는 눈치더니 카운터 앞으로 다가와 누구에랄것도 없이 말했다. "이런 데는 오랜만에 와서 그런데... 추천해줄 수 있어요?" 남자에게서는 담배냄새와 향수냄새가 뒤섞여서 났다. 독한 여성용 향수 냄새였다.


"좋아하는 영화가 뭐 있어요?" "글쎄요, 영웅본색 같은 것도 좋아하고..." 남자가 대답했다. 유호는 이전의 대화를 떠올리고 자기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맞아요. 홍콩 영화 좋아한다고 했죠?"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은 추천할 만한 것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카운터 위에 올라와 있는 <트루 로맨스>에 시선이 닿았다.


"그럼 이건 어때요. 여기 남자주인공이 홍콩 영화를 좋아해요." 주인의 말에 남자가 오, 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로맨스 영화라 애인이랑 봐도 좋을 거고..." "애인은 없어서요." 남자가 짧게 대꾸했다. 유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저번의 그..." 유호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아차, 하고 말을 멈췄다. "죄송해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아, 아뇨.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새 그는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헤어졌거든요. 저번에 봤던 그 여자는 그때까지는 제 애인이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한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유호는 두 달 전쯤에는 또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도 기억해냈다. 남자는 주인이 추천해준 비디오를 들었다. 


"그럼 이걸로 할게요." "이 영화 정말로 괜찮아요. 이 친구한테도 내가 추천해줬다니까." 주인이 재차 강조하자 남자가 유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요? 혹시 이거 그럼 봤어요?" "어... 아뇨."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주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저절로 입밖으로 나온 거짓말에 유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들키면 어쩌지... "그럼, 같이 볼래요? 오늘 시간만 괜찮다면." 남자가 제안했다. 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죠. 좋아요." 주인의 눈이 더더욱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는 더이상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남자에게 비디오를 대출해주었다. 유호는 서둘러 남자와 함께 대여점을 나왔다. 


남자의 집은 넓어보였다. 분명히 유호와 똑같은 평수의 똑같은 구조의 집에 살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넓어보였다. 유호는 곧 그건 가구가 별로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호가 어정쩡하게 침대 위에 앉는 동안 남자는 냉장고에서 내올만한 음료수를 찾았다. 침대 시트는 깔끔한 하늘색이었다. 낡지만 꽤 넓은 방 안에는 옷장과 침대 옆 협탁, TV장이 가구의 전부였다. 눈둘 데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둘러보던 유호의 시선 끝에 작은 장식물이 하나 걸렸다. TV장 위에 조그마한 비행기 모형이 놓여 있었다. 


곧 남자가 맥주 두 캔을 가져왔다. "술 마셔요?" "네... 맥주 정도라면." 남자가 내민 맥주는 차갑고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축축하고 서늘한 감촉이 늦은 밤더위를 식혀주었다. 남자는 선풍기를 틀고 비디오를 플레이어 안으로 집어넣었다. "어라." 뭐가 잘 안되는지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잘 안되네요. 이사 오고 나서 처음 쓰는 거라서..." 유호는 들고 있던 맥주를 내려놓고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남자의 눈썹이 찌푸려지며 주름이 깊은 음영으로 새겨져 있었다. 찡그리듯 가늘게 뜬 눈은 전등불의 빛을 받아 진하고 투명한 갈색이었다. 유호는 한번 자기가 해보겠다고 했다. 비디오를 밀어넣자 플레이어 안쪽에서 덜걱거리며 뭔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안되겠다. 유호는 고개를 저었다. 


"안에 뭐가 있나봐요. 이대로는 틀어봤자 테이프가 씹히기만 할걸요. 이건 나중에 고치고. 오늘은 우리 집 가서 볼래요?" 남자는 미안해요, 하고 머쓱하게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호는 집안에 들어서려다가 으악, 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생각해보니 어제 집안을 치우지 않았다. 유호는 재빨리 안으로 뛰어들어가 바닥에 널려 있는 옷을 재빨리 집어 세탁 바구니 안으로 던졌다. 하지만 이미 남자는 유호의 속옷을 봤을 게 분명했다. 유호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자 남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시선을 위로 돌리고는 아늑하네요, 하고 말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손에는 조금 전에 자기 집 냉장고에서 꺼냈던 맥주 캔이 들려 있었다. 기왕 꺼낸 거 아까우니까, 라는 이유에서였다. 유호의 집은 침대에 앉아서 곧바로 TV를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남자는 유호의 침대에 앉아 유호가 비디오를 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유호가 선풍기의 버튼을 톡, 누르고 리모콘의 버튼을 꾹 눌렀다. 파란 화면이 뜨더니 곧 영화가 시작했다. 


활짝 열어젖힌 창문으로 낮보다는 아주 조금 서늘해진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외국어가 멀찍이 들리는 도시의 소음과 섞였다. 선풍기에서는 마치 한숨이라도 쉬듯이 습한 바람을 얼굴에 불어댔다. 어두운 방 안, 남자의 얼굴로 푸르고 붉은 빛이 쏟아지는 것을 유호는 보았다. 긴 속눈썹을 깜작이며 화면의 빛을 빨아들이듯 반사하는 눈동자를 유호는 보았다. 마치 파도처럼, 고요히 남자의 몸 위를 일렁이는 빛을 유호는 보았다. 손에 쥔 맥주는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신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신 씨, 라고 불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냥 신, 이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신은 마치 처음부터 유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유호야, 하고 천연덕스럽게 불렀다. 신의 비디오 플레이어는 도저히 고쳐지지 않았다. 신의 말로는 본인이 산 게 아니라 전에 살던 사람이 이사갈 때 놓고 간 것이라고 했다. 안되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부터인가 신은 자주 유호의 집에 놀러왔다. 보통 맥주 두 캔을 손에 든 채였다. 유호는 언제부턴가 비디오 가게에 갈 때마다 홍콩영화를 한 편씩 빌리기 시작했다. 하루는 주인이 그 잘생긴 총각 취향이지?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유호는 그냥 글쎄요, 하고 말하면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둘은 보통 불을 끈 방 안에서 침대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았다. 그들은 이소룡이 나오는 옛날 무협영화도 보았고 가끔은 주성치가 나오는 코미디도 보았다.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도 많았다. 의외로 신은 취향이 까다롭지 않았고 무얼 보든 후한 평가를 내렸다. 그래서 유호는 신과 영화를 보는 것이 점점 즐거워졌다. 함께 영화관에 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심야영화를 보러 가자는 말을 꺼낸 것은 유호였다. 그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서 유호는 하루 종일 내내 입안으로 그 말을 연습했다. 나랑 심야영화나 한번 보러 갈래? 아니아니, 그냥 영화표가 생겼는데, 나랑 보러 가면 좋고... 아냐, 이건 너무 변명 같잖아. 결국 그는 신을 마주하고서는 딱 한 마디밖에 제대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나랑, 보러 갈래?"


주어와 목적어가 모조리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은 좋아, 라고 시원스레 대답했다. 오히려 말을 꺼낸 유호가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신은 마시고 있던 맥주 캔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영화 보러 나가자는 거지? 집 안에만 있는 것도 썩 좋은 건 아니니까. 바람 쐴 겸 나가는 것도 좋지." 마치 유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조리 꿰뚫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말이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안 되겠고, 내일 보러 가자. 내일 밤 시간 괜찮지?" 당연히 괜찮았다. 아니, 괜찮아야 했다. 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영화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왕가위 감독 영화인데, 나 이 사람 영화 좋아하거든. 너도 틀림없이 좋아할 거야." 신은 빙긋 웃으면서 끄덕였다. "그래, 기대할게."

 

그날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오후 내내 꾸무럭하던 하늘이 해가 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대비를 쏟아냈다. 유호는 시내의 극장 앞에서 우산을 받쳐든 채 신을 기다렸다. 비가 투둑투둑, 우산을 두들기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도 세차게 내리는 장대비는 운동화 끝을 적시고 바짓단을 더럽혔다. 오늘 지나가는 대화로 비가 오면 더위도 좀 식혀지겠네요, 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더위가 식으면 여름도 끝이 난다. 신은 영화 시간이 다 되도록 오지 않았다. 유호는 결국 우산을 접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는 사랑하지만 성격차이로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는 연인의 이야기였다. 헤어진 연인 중 한 명은 홀로 잊지 못해 외로워하고 한 명은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만난다. 유호는 언제나 여자 향수 냄새가 몸에 묻어 있는 신을 떠올렸다. 그 향의 종류가 늘 바뀌는 것을 유호는 떠올렸다. 신도 외로워하는 걸까. 외로워서, 다른 여자를 만나야 해서. 그래서 오늘 오지 않은 걸까. 느릿한 배경음악, 등장인물들의 조용한 말소리를 따라 유호의 생각이 천천히 흘러갔다. 


집에 가는 길에 작은 화분을 샀다. 화분은 꽃집 건물의 밖에 놓여 있었다. 비를 맞아 축축하게 이파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보기 싫었다. 문을 닫으려는 꽃집에 비집고 들어가 화분을 샀다. 꽃집 주인은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내놓고 물을 자주 주라고 했다. 화분을 껴안고 집에 가는 동안 길고 가느다란 초록색 잎은 끝에서 계속계속 물방울을 똑, 똑 떨어트렸다.


아파트에 도착해서 언제나처럼 어두운 계단을 올라갔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비갠 후 특유의 습하면서도 시원한 공기가 오랜만에 호흡하기 편했다. 유호는 계단에서 복도로 향한 순간, 복도 끝에서 까만 형체를 발견했다. 어쩌면 위험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과, 어쩌면 신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유호의 가슴속에서 교차했다. 유호는 빠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느린 것도 아닌, 조급하게 걷다가도 이따금 주춤거리는 발걸음으로 그 형체에 다가갔다. 서서히 그 형체는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모습을 드러냈다. 신이었다. 


유호는 신인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그에게 달려갔다. "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유호가 놀라 신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웅크리고 있던 신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주먹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눈두덩은 멍이 들어 있었고 코와 입가 주변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꼭 쥔 손은 생채기로 가득했고 옷은 더러워져 있었다. 누군가가 신을 때리고 발로 걷어차기라도 한 것 같았다. 


유호가 놀라 말을 하지 못하자 신이 피식 웃다가 아야,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별거아냐. 음, 뭐라고 해야할까. 딱 걸렸다고 해야하나." 신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뭐가 딱 걸렸다는 거야..." "임자 있는 여자랑 놀아났던 거." 유호는 멀거니 신을 바라보았다. 신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모든 게 장난인 것처럼. "괜찮아. 얻어맞은 걸로 끝났거든." "그게 무슨..." 유호는 기가 차서 도저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는 신의 팔을 잡아당겨 일으키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자. 연고라도 발라야지." 신은 순순히 유호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유호가 신의 얼굴에 소독약을 바르자 신이 "앗, 따거!" 하고 비명을 질렀다. "천천히 해. 아파 죽겠어." 유호는 시끄러,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계속해서 소독약을 발랐다. 멍든 곳에는 연고를 바르고 작은 생채기에는 반창고를, 꽤 큰 상처에는 거즈를 붙여주었다. 옷은 너희 집에 가서 갈아입어, 라고 유호가 말하자 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입술은 찢어진 채였다. 


"그런데 넌 다쳤으면 병원이나 가지 왜 거기서 그러고 있었던 거야?" "네가 발견해주길 기다렸어." "그게 무슨..." 유호가 웅얼거리듯 중얼거렸다. 얼굴이 어쩐지 붉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신이 유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이렇게 해줄 걸 알았으니까." 


한참 뒤, 유호는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너, 그거 응석 부리는 거잖아." "그러면 안돼?" 신이 되물었다. "난 우리가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유호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를 생각했다. 조금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넌... 친구라면서, 오늘 내 약속도 바람 맞혔잖아." 그러자 신이 아이쿠, 하고 아픈 데를 찔린 것처럼 웃었다. "맞아. 미안해. 오늘 가려고 했는데 이런 일에 휘말려서 말이지... 정말 미안해. 그래서 영화는 잘 보고 왔어?" 제대로 못 봤어. 보는 내내 계속 다른 생각을 했어. 모두 너 때문이야. 유호는 대답했다. "응, 좋았어." 


신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라, 하고 유호의 옆을 가리켰다. "그러고보니 이 화분은 뭐야?" "아, 저거. 그냥 오는 길에 샀어." "그래? 식물 키우는 거 좋아해?" "아니,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나도 내가 왜 샀는지 모르겠네. 식물은 늘 키우면 죽이기만 하는데." "그래?" 신은 손을 뻗어 식물의 긴 잎을 건드렸다. 잎이 통, 하고 스프링처럼 흔들렸다. "기껏 데려와서 죽이면 미안하잖아." 신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유호는 신을 잠깐 쳐다보다가 불쑥 내뱉었다. "네가 키울래?" "응?" 신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네가 키우면 되잖아. 어차피 난 충동구매한 거였고, 늘 죽이기만 하는걸. 네 말대로 기껏 데려와서 죽이면 미안하니까 네가 키우는 거 어때? 줄게." 유호는 스스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입을 빌려 대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키워. 너희 집에 아무 것도 없던데. 이런 거라도 있으면 보기 좋잖아. 가져가. 오늘 나한테 신세진 거, 이걸로 갚는다고 생각하고." 신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라는 뜻이 담긴 몸짓이었다. 곧 그는 화분을 껴안고 일어났다. "오늘은 고마웠어." 신이 유호의 어깨를 껴안으며 가볍게 두드렸다. 유호는 조금은 무뚝뚝하게 "그래" 하고 대답했다. 



잠시 누그러드는 것 같던 더위가 어느새 다시 살아나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열대야에 불면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뉴스 아나운서는 퍽이나 심각한 문제인 것마냥 이야기했다. 낮잠을 충분히 자고, 수면 습관을 깨트리지 않도록 노력하세요... 아나운서의 말은 알아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고 뉴스를 보든 말든 당연하게도 밤이 되면 사람들은 더위에 허덕이며 잠을 설쳤다. 더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것이므로 유호도 며칠째 꽤나 더워서 자다 깨다 쪽잠을 자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나마 유호네 집은 창문을 열어두면 밤바람이 통하는데, 바로 옆집인데도 불구하고 신의 집은 좀 사정이 다른 모양이었다. 신은 며칠째 서너 시간씩만 자고 있다고 말했다. 


"진짜 죽을 맛이야. 선풍기가 뜨거워져서 더 틀어놓을 수가 없다니까. 꼭 터질 것 같은데다 집안의 온도만 더 올려서." 신은 유호의 집에서 차가운 맥주 캔을 얼굴에 대며 그렇게 툴툴거렸다. 신의 말마따나 불면증이 심각한지 눈밑에 거뭇한 기미가 보였다. 유호는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고 유호 쪽으로 돌려주었다. "그래도, 네가 준 식물은 안 죽이고 잘 키우고 있어. 요즘 햇빛이 너무 뜨거워서 꽃집에 물어봤는데 그런 종류는 너무 또 햇빛을 많이 쐬면 말라 죽는다더라. 그래서 일부러 살짝 그늘진 곳으로 옮겨놨어. 다행히 싱싱해." 신은 너도 참 까다로운 녀석을 골랐다며 조금은 기쁜 듯이 키득거렸다. 유호는 그러게, 하고 가능한한 무심하게 대답하며 비디오를 플레이어 안으로 밀어넣었다. 


영화 내용은 단순했다. 팝송을 크게 듣는 걸 좋아하는 여인이 있다. 그리고 실연당한 남자가 있다. 여인은 남자를 좋아하고 그의 집에서 옛 연인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동시에 남자의 주위를 조금씩 자신의 것으로 채워나간다. 마치 물이 스며들듯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조용히, 살며시. 여자가 남자의 수족관에 물고기와 물을 채우고 있을 때쯤 신은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유호는 신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신의 얼굴이 마치 수족관이라도 된 것처럼 TV의 빛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비쳤다. 감은 두 눈의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오늘따라 짙은 직선의 눈썹이 편안하게 풀려 있었다. 유호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이 천천히 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자주 보아 익숙해졌지만 단 한 번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다. 쭉 뻗은 코끝도, 빛을 담은 인중도, 매끄러운 입술도. 어느새 숨결이 서로 맞닿을 만큼 유호는 신에게 가까워져 있었다.


신이 눈을 떴다. 그 순간 유호의 몸이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하고 멈추는 소리를 냈다. 신은 아무 소리도 없이 오로지 눈만 뜬 채 유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로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다만 그렇게 그들은 마주보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신이었다. 그가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외꺼풀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것을 보며 유호는 자신의 입술에 따스하게 닿는 감촉을 느꼈다. 신의 손이 유호의 뺨을 쓰다듬었다. 신은 능숙하게 굳어있는 유호의 입술을 열고 혀를 움직였다. 유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는데도 어느새 신에게 휩쓸리고 있었다. 신의 손이 천천히 유호의 티셔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이 세상을 온통 채우고 있는 열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종류의 기분좋은 열기가 신의 손을 따라 퍼지기 시작했다. 


유호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보통 영화에서는 이때쯤 되면 바로 다음날 아침으로 장면을 전환하던데. 이 상황에서도 쓰잘데기 없는 잡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어쨌거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신은 자신을 원하고 있으니까. 신은 자신의 셔츠를 벗었다. 화면의 불빛이 근육의 결을 따라 파르스름하게 빛났다. 유호도 티셔츠를 벗었다. 신이 다시 유호에게 키스하며 바지 단추를 끌렀다. 자신을 서서히 아래로 짓누르는 몸의 무게를 느끼며 유호는 손을 뻗어 리모콘의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삑. 작은 소리와 함께 세상이 멈췄다. 



"영화, 결국 다 못 봤네. 어떻게 끝나는지 말해줄 수 있어?"

"아아, 그거. 남자는 결국 여자가 한 짓을 알아차리게 돼. 그리고 여자한테 데이트 신청을 하지."

"흐음, 그래서?"

"하지만 약속장소에 여자는 나타나지 않아."

"왜?"

"여자는 떠났거든. 멀리, 스튜어디스가 되어서. 그리고 몇 년 뒤 돌아와서 남자와 재회하지."

"부럽네."

"뭐가?"

"떠날 수 있다는 것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하긴, 그러니까 영화지만."

"하지만 그래서 좋은 거 아닐까. 거짓말이라서."

"그러게, 그러고보니 그렇네."



한번 하고 나니 두번째는 훨씬 쉬워졌다. 유호는 신이 생각보다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신은 유호가 무리한 체위나 요구에도 순순히 응하는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유호는 남자와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좋은 축에 속했다. 신은 부드러웠고 필요할 때만 거칠어졌다. 맥주와 함께 영화를 보던 그들만의 작은 의식은 어느새 섹스로 끝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주윤발의 죽음으로 끝나는 영화 중 하나를 보던 어느날, 여느때처럼 신은 유호에게 입맞춤하며 허리로 손을 올렸다. 유호는 익숙하게 신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 순간, 신의 목덜미에서 어깻죽지 부근 위로 긴 머리카락 한 올이 보였다. 그 머리카락은 길고 가늘었으며 연한 갈색빛이었다. 왜 그 머리카락이, 그 작고 가벼우며 사소한 것이 유호의 시선을 붙들었는지. 유호는 자신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신을 느끼면서 그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몸을 섞는 관계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신의 몸에 묻어나는 낯선 향수 냄새라든가, 간혹 벽을 타고 들리던 높은 목소리 같은 것들이 천천히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신은 유호가 평소와 다른 걸 깨달았는지 입술을 떼고 유호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얼굴이 유호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난, 네 수많은 애인 중 하나일 뿐인 거야? 혹은, 난 네게 아무 것도 아닌 거지. 같은 말들이. 무수한 말들이 떠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유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안되겠어." "왜?" "그냥, 그냥... 기분이 아냐." 신은 유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도 괜찮아."

유호는 신의 눈을 쳐다보았다. 까맣고 맑은, 진지하고 고요한 눈동자. 유호는 난처한 질문을 던져 저 고요를 흔들고 싶지 않았다. 그 파문 뒤에 돌아올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너의 입으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 받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유호는 다시금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그냥 오늘은 기분이 그래. 다음에 보자." "...알았어." 신은 더이상 캐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자라." 현관문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그가 건넨 말이었다. 유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 사랑에 빠진 남자가 있다. 열차에서 만나 잠깐 이야기했을 뿐인 여자에게 빠져 함께 빈을 돌아다니자고 청한다. 비행기에 타기 전, 단 하룻밤만 함께 있자고. 여기, 사랑에 빠진 여자가 있다. 터무니없는 꿈을 신나서 이야기하는 낯선 남자와 기꺼이 하룻밤을 함께 있기로 한다. 그들은 서로를 잘 모른다. 그러나 단 몇 마디, 그 몇 마디의 말을 나눴을 때부터 그들은 안다.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사랑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 마주치는 눈빛이, 끄덕이는 고갯짓이, 터뜨리는 웃음소리가, 턱을 괴는 버릇이 그들이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하룻밤 뒤면 헤어질 인연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유호는 이 영화의 끝을 보지 못했다. 보다가 잠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눈을 떠보니 이미 비디오는 끝이 나서 지직거리는 화면만 내보내고 있었다. 바로 그 다음날이 비디오 반납일이었던데다 어디서부터 못 봤는지도 기억이 안나 더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끔 궁금해진다. 그들은 어떻게 됐을지. 그들의 사랑은 어떤 식으로 끝난 건지. 아니, 끝날 수나 있는 것이었는지.



끝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아침, 유호는 출근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라 멈췄다. 문앞에 화분이 놓여 있었다. 유호는 그것이 무엇인지 곧 알아보았다. 유호가 신에게 선물해주었던 것이었다. 사실 선물이라기보다는 강제로 떠안긴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신의 집에 있어야 할 이것이 왜 여기 있는지, 유호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몸을 구부려 화분을 살펴보다가 잎사귀 아래 흙 위에 놓여 있는 메모를 발견했다. 희고 깨끗한 종이에 정자체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유호는 신이 쓴 글씨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내용은 단순했다. 

'미안해. 이 녀석 좀 맡아줘.'

그리고 그게 다였다. 맡아달라는 건 알겠지만 미안하다는 건 뭔지. 유호는 알 수가 없어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화분을 들고 집으로 도로 들어갔다. 물을 준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화분의 흙은 촉촉했다. 유호는 그늘과 햇빛의 경계에 화분을 놔뒀다. 길고 깨끗한 초록색 이파리 위를 가로지르는 하얗고 까만 경계션을 그는 잠시 내려다보다가 집을 나섰다. 신은 아무래도 한동안 돌아오지 않으려나 보다.


그날 저녁, 그는 퇴근하고 혼자서 저녁을 먹다가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초인종이 있으니까 누르면 될텐데. 이렇게나 요란하게 두들겨댄다는 것 자체가 불길했다. 재차 문을 쾅쾅 두드렸다. 유호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험상궂은 남자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이봐, 질문 좀 하지." 남자의 목소리는 얼굴보다 더 험악했다. 유호는 바짝 얼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여기, 옆집에 사는 놈하고 좀 아는 사이냐?" 남자가 신의 집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순간 남자의 뒤에 서 있던 몇 명의 남자들이 얼핏 보였다. 그림자에 가려져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다들 덩치가 있었다. 유호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아뇨." "이 새끼 몰라? 마주친 적도?" "지나가다 얼굴 정도는 봤지만, 안 친해서요... 조금도 교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던가. 유호는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래? 그럼 저 새끼 혹시라도 마주치면 우리한테 연락해." 그러면서 남자는 명함을 내밀었다. 회사 이름은 평범한 건설회사였지만 이 앞에 있는 남자는 아무리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저...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런 건 신경쓸 거 없고, 보면 연락해." 그러지 않았다간 큰일 날거라는, 협박이 담겨 있었다. 유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천천히 닫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가느다란 틈새 사이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튀어버렸나 본데." "씨발새끼, 눈치만 빨라선..." 유호는 문을 닫았다. 동시에 그의 다리가 풀리며 주룩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유호의 시선이 화분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더이상 저 화분을 돌려줄 일은 없겠구나.

  


2000년, 가을.

유호는 오랜만에 극장에 갔다. 언제나 그랬듯 심야 영화, 그것도 혼자서. 유호는 매표소 점원이 건네주는 빳빳한 종이티켓을 받아들고 상영관 안으로 입장했다.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작 10명 정도 되어보이는 사람들은 황무지에 흩어진 바위처럼 드문드문 앉아있었다. 유호는 티켓에 적힌 자리를 찾아 앉았다. 곧 광고가 끝나고 제작사 로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온통 파랗게 흐르는 불빛.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왔다. 두 남녀는 상실과 배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다가, 직시하고, 위로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결국엔 그 상실과 배신 때문에 그 위로조차도 온전한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떠나고, 그 모든 감정이 풍화되어 사라지기를 바란다. 인간의 흔적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유적지처럼. 그 안에 마음을 묻어두고.


영화가 끝났지만 유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까만 엔딩크레딧에 흰 이름들이 끊임없이 올라가는 기나긴 시간 동안, 그는 가만히 있었다. 마침내 엔딩 크레 딧이 모두 올라가고 나가라는 듯이 불이 켜졌을 때야 유호는 몸을 일으켰다. 

극장 밖으로 나오자 찬 밤바람이 선득하게 피부에 닿았다. 영화관 안에서 벗어두었던 겉옷을 입고 길을 나서려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화, 잘 봤어?" 

유호가 고개를 돌렸다. 극장 입구 바로 옆에서 한 남자가 웃고 있었다. 푸르고 노란 네온사인의 불빛이 남자의 몸 위로 비쳤다. 불빛에 물든 미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으므로, 유호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신?"

"오랜만이야."

신이 성큼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머리는 조금 더 길었고, 옷은 가을 코트를 걸쳤지만, 그 외는 모두 옛날과 똑같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유호가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게 나온 것 같았다. "나도 영화 보려고." 그러면서 신은 영화관에 걸린 간판을 가리켰다. "너, 이 감독 좋아했잖아." "...그랬지." "잘 지냈어?" "응." "내가 맡겨뒀던 그 화분은? 그것도 잘 있어?" "잘... 있어. 많이 커져서 분갈이도 몇 번 해줬고..." "다행이다. 역시 너한테 맡기고 가길 잘했어." 신은 그러면서 웃었다. 밝고 환한 미소였다. 유호는 여전히 가만히 서 있었다. 신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지그시 유호를 바라보았다. 


알록달록한 네온사인의 빛이 마치 비처럼 그들 사이에 떨어져 내렸다. 멀리서 차가 도로 위를 달리고 극장 안에서는 희미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흑갈색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조금씩 흐트러지며 날렸다. 신의 따스한 손이 유호의 차가운 뺨 위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미안했어." 길고, 깊은 눈동자가 유호를 바라보았다. 유호는 그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신은 피식 웃더니 손을 뗐다. "난 이제 가봐야겠다. 만나서 즐거웠어. 잘 지내." 빠르고 뻔한 작별인사였다. 신은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언제나처럼 길쭉한 다리로 내뻗는 걸음이었다. 

유호는 붙잡지 않았다. 유호는 그저 그 등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는 신을 불렀다.

"신!" 신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잘 가." 유호가 인사했다. 신은 활짝 웃었다. "너도." 신은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게 되자 유호도 몸을 돌렸다. 




여기서 등장하는 영화 제목은 차례로 <해피 투게더>, <중경삼림>, <비포 선라이즈>, <화양연화>입니다. <비포 선라이즈> 제외하면 모두 왕가위 감독의 영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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