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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피터/연재]회사원 AU - #1 본문

글연성/[마블]토니피터 회사원 AU

[토니피터/연재]회사원 AU - #1

DayaCat 2016. 9. 19. 01:22


필름이 끊길 만큼 술을 마시고 나니 다음날 낯선 사람이 옆에 있는 것, 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누군가 피터에게 물었다면 당연히 피터는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도대체 언젯적 클리셰냐고, 요즘은 홈비디오용 로맨스 영화에도 그런건 안나온다고, 아주 신랄하게. 로맨스 영화에서야 맨날 그런 일이 일어나지만 솔직히 살면서 정말 그럴 일이 얼마나 있겠냐고,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시면 누군가랑 섹스하기보다는 그냥 잠들어버리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어제까지의 피터는,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머리를 누군가 돌로 짓누르는 고통이 피터의 잠을 깨웠다. 눈꺼풀은 아직도 너무도 무거웠지만 이 고통을 그대로 견뎌내기도 어려운 것이라,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피터는 자신이 낯선 곳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보는 천장에는 화려한 조명이 달려 있었다. 손에 닿는 이불도 어쩐지 폭신폭신 부들부들하니 좋은 것인 것 같았다. 피터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더더욱 당혹스러워졌다. 침실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널찍한 곳이었다. 가격단위가 몇만달러로 시작할 것 같은 원목가구가 주위에 자리잡은데다가 한쪽벽은 아예 전면유리였다. 피터는 멍하니 주변을 구경하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벗은 맨가슴이 보였다. 잠깐, 이거.. 불길한 기분에 피터는 이불을 들어올렸다. 물론 제발 팬티를 입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과 함께.

"....망했네." 피터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중얼거렸다. 팬티는 무슨, 실 한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있는 완벽한 알몸이었다. 피터는 머리를 굴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하려 애썼다. 시작은 어젯밤 걸려온 전화였다.


스타크 인더스트리 연구 개발 3팀은 최근 장기 프로젝트가 끝나서 다들 살짝 풀어진 분위기였다. 보고서와 서류를 산더미만큼 나르고 협력업체와 쉴새없는 통화를 하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오류를 고치고 보고서를 쓰고 메일을 보내는, 정신없는 나날이 끝나고 나서 처음으로 맞는 금요일 밤이었다. 다들 당연히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1분 1초도 지체할 수 없다는 것처럼 필사적인 속도로 뛰어나갔고 그것은 피터도 마찬가지였다. 아, 물론 맥스 모델 팀장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혼자서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피터는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면서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딱히 약속은 없지만 친구들과 만나자고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면 집에서 여유있게 밀린 영화를 볼 수도 있겠지. 제일 좋아하는 페퍼로니 피자 한 판을 시켜놓고서. 그때 피터의 핸드폰이 울렸다. 맥스 모델 팀장이었다. 피터의 얼굴이 순간 구겨졌지만 곧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예요?" "아, 피터. 정말 미안한데.. 자네도 알고 있지? 내가 오늘 원래 완공식에 가기로 되어있던 거."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게 다 그것 때문이었는데 어떻게 모를리가.


이번에 스타크 인더스트리에서 새로이 지은 어벤져스 빌딩은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각종 기술력이 모두 투입된 작품이었다. 특히나 피터의 팀이 새로이 개발한 안면인식 보안시스템이 적용되었다는 게 큰 화제였다. 그리고 이번주 월요일, 어벤져스 빌딩은 마침내 완공되었고 금요일인 오늘 밤 각종 기자와 사회 유명인사들이 초대된 완공 파티가 빌딩 내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리고 맥스 모델 팀장은 팀의 대표로서 이 완공식에 초대받았다. 말이 초대지 거의 강제 참가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가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가셨거든. 원래 지병이 있으신 분이셔서.. 지금 응급실에서 치료받고 누워계신다고는 하는데 내가 당장 가봐야할 것 같아."피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혹시 피터 자네가 대신 가줄 수 있나?" 피터는 음, 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저, 맥스. 혹시 말인데요, 다른 사람들도 다 못간대요..?" "이미 다 연락해봤어. 사자니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화를 계속 안 받고, 쟈니는 가족들끼리 여행간다고 벌써 비행기를 탔대. 안나도 지금 공연을 예약해놔서 취소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 아. 피터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별 수 없지. 금요일 밤에 한가한 내가 잘못인거지. 피터는 알겠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어머님을 잘 보살펴드려요. 제가 대신 갈테니까." "고마워, 피터. 덕분에 살았어. 가보면 별거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맥스는 그렇게 말하며 통화를 끊었다.


집에 가서 대충 가장 덜 구겨진 정장을 골라 입고는 지하철을 탔다. 어벤져스 빌딩은 맨해튼 한복판에 우뚝 서 있었다. 몇번 시스템 작동여부를 체크하기 위해 왔을 때는 그냥 공사장으로만 보였는데, 이렇게 완공된 걸 보니 확실히 으리으리했다. 피터는 빌딩 앞에 미끄러지듯 계속 도착하는 고급 외제차를 걸어서 지나쳤다. 그냥 파티장으로 걸어들어가려는데 덩치큰 시큐리티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죄송하지만 명단 체크 좀 해도 괜찮을까요?" 피터는 그가 자신을 위에서 아래로 훑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럴 줄 알고 가져온 사원증을 내밀면서 덧붙였다. "맥스 모델 씨를 대신해서 온 겁니다." 몇 번 체크를 하더니 순순히 통과시켜주었다. 빌딩 안은 놀라우리만치 반짝거렸다. 갓 지은 새건물은 벽도 바닥도 흠집 하나 없이 반들거렸다. 서버가 들고다니는 샴페인잔의 끝이, 여자들의 귀걸이가, 남자들의 커프스에 달린 보석이 온통 반짝이는 빛을 뿌렸다. 피터는 시선을 어디다 둬야할지 몰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신문과 TV에서 자주 보았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기서 뭔가 설명하고 있는 남자는 일명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였다. 그 옆에 서 있는 여자는 CIA 국장인 마리아 힐이고. 맙소사, 방금 나타샤 로마노프가 내 앞을 지나친거야? 그 '블랙 위도우'가? 피터는 멍하게 입을 살짝 벌렸다. 그때 어디선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상에 토니 스타크가 서 있었다.


토니 스타크,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사장이자 천재, 바람둥이, 자선사업가. 언제나 그에게는 두세 개 이상의 수식어가 따라붙었지만 대중들은 보통 그를 '구제불능 바람둥이'로 기억했다. 토니 스타크와 그의 연애사업은 가십지와 타블로이드 신문이 가장 선호하는 1면 주제였다. 본인도 그런 이미지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아니 오히려 부추기려는 듯 이 여자 저 여자를 바꾸어댔다. 하지만 어쨌든간에 그의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피터는 이따금 그런 사생활 때문에 정작 토니가 가진 능력이 묻혀버렸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가 만들어낸 발명품들은 언제나 천재적이고, 획기적인데다가 경영자로서의 능력도 나쁘지 않다. 피터는 사회초년생이었지만 이 회사의 사람들이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런 행동만 안했어도 사람들이 바람둥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텐데 말이야. 토니 스타크는 여유롭게 웃으면서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농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래요. 내가 오늘 좀 잘 차려입었죠. 맞아요. 꼬시려는 거죠. 누구 내일 나랑 같이 신문 1면에 나오고 싶은 아가씨 손들어 볼래요? 피터는 손을 뻗어 서버가 들고 있는 쟁반에서 샴페인잔을 집었다. 그때 비서가 토니 스타크에게 마이크를 가져다 주었다. 토니는 마구 늘어놓던 농담을 멈추고 마이크를 집었다.

"아, 음. 잘나오네요. 모두들 참석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뭐, 이런데서 할말이 뭐가 있겠어요. 블라블라블라, 솔직히 이미 질릴만큼 많이 들었잖아요. 그러니까 간단하게 갈까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어벤져스 빌딩은 멋지고 대단하니까 그냥 구경 좀 하시고 감탄 좀 하고 가라는 겁니다. 그러라고 초대한 거니까요. 자, 그럼 즐기세요."

짧고, 간단하고, 토니 스타크스러운 연설이었다. 사람들은 잠시 멍해졌다가 한박자 뒤늦게 박수를 쳤다. 토니는 그러거나 말거나 마이크를 비서에게 건네주고는 여유롭게 단상을 내려갔다. 피터는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저렇게 하고 싶은대로 살면 무슨 기분일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파티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피터는 벽에 기대서 평소라면 모니터와 사진으로만 봤을 사람들을 실컷 구경했다. 거기다가 샴페인은 달짝지근하니 음료수같고. 피터는 세잔째 샴페인을 마시면서 역시 비싼 건 맛있구나, 하는 뻔한 생각을 했다. 그때 누군가가 피터의 옆에 다가왔다. "어때, 파티는 즐길만한가?" 피터는 누구지, 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자기도 모르게 샴페인을 뿜을 뻔했다. 토니 스타크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이따금 회사에서 멀찍이 본적은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기엔 사장실은 너무 높은 층에 있었다. 그러니까, 회사에 다닌지 몇년이 되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본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토니 스타크는 여성잡지에서 항상 결혼하고 싶은 백만장자 1위에 꼽힐만큼 매력적이고 완벽한 미소를 띠고 피터의 바로 앞에 있었다. 피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안녕하세요..."  멍청이같으니. 피터는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안녕하세요가 뭐야, 안녕하세요가. 완전 쫄아버린 것처럼 보이잖아. 하지만 토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계속 말을 걸었다. "맥스 모델 팀장 밑에서 일하지? 이번에 많이 힘들었다고 들었어." "어, 어떻게..." 

 토니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파티에 초대될만한 사람 같지 않은데 여기 있다면 우리 회사 관계자 말곤 없을거고, 그렇다면 누군지 아는 건 쉽지. 모델 팀장은 오늘 안 왔나?" "어머님이 갑자기 아프셔서 못 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대신 온거구요." 피터는 아까보다 한결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흐음, 그렇군. 어때, 파티는 재밌나? 자네같이 젊은 사람들은 이런 걸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피터는 술기운에 살짝 붉어진 얼굴로 웃었다. "이런 데는 처음 와봤는데 나름 재밌는 것 같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저를 몰라도 저는 그 사람들을 알거든요. 그러니까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피터는 뭐라 말을 더 이으려다가 멈췄다. 토니가 피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방금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피터는 애써 자기가 뭘 잘못 말한 게 있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서서히 술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머리는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토니가 빙긋 웃었다. 진하고 새까만 눈썹이 곡선으로 접히는 게 보였다. "샴페인 더 마시겠나?" 그렇게 물어보는 주제에 벌써 토니의 손은 쟁반 위의 샴페인잔을 들어 피터 앞으로 가져오고 있었다. 피터는 얼결에 샴페인잔을 받아서 마셨다. 혀에 닿는 샴페인은 여전히 달콤하고, 톡톡 튀었다.


그 이후로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피터는 머리를 감싸쥐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도대체 나는... 뭘..."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잘 잤어?" 낯선듯 낯설지 않은 목소리. 사진에서처럼, 완벽한 미소. 다만 사진과는 다른 점은 지금 토니 스타크는 알몸에 수건만 아래에 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막 욕실에서 씻고 나온 참인지 그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목덜미에 달라붙어있었다. 그는 피터의 멍한 얼굴을 보며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그 놀란 표정은. 어제 다 즐겨놓고선." 토니가 피터의 옆에 털썩 앉았다. 동시에 피터의 몸이 움찔거렸다. 피터는 이불을 쇄골까지 바짝 끌어올리면서 어깨를 웅크렸다. "저, 죄송한데 제가 뭘 했다는 건가요...?" "기억 안나?" 토니는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흐음, 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몸이 피터에게 살짝 기울어졌다. "어제 엄청 취했었는데. 그것도 기억 안나나 보지?" 아, 맞다. 그랬다. 피터의 머릿속에서 어제 일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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